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56
◈ 056. [Side Story] 장례식 (2)
“시를 읊는 고상한 취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
에반젤린의 말에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안 어울려서 남몰래 읊은 건데. 들켰군.”
“목소리도 좋으신데, 앞으로는 크게 읊으시지 그래요?”
소녀의 얼굴은 무표정해서 속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좀 괜찮아?”
“그럼요? 당연히 괜찮죠.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는걸요.”
에반젤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제가 다른 전선에 기사로 임관하게 되면, 이 도시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어요. 언제고 아빠가 돌아가신다면 임종을 못 지키는 것도 정해진 수순이었고.”
“…….”
“이렇게 장례라도 참석할 수 있어서 다행이죠.”
고작 열여섯 꼬맹이 주제에 에반젤린은 지나치게 어른인 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어. 이제 이 아이는 정말로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다른 전선으로 떠날 셈이구나?”
“당연하죠. 뭐 살기 좋은 동네라고 이 촌구석 변경에서 꾸역꾸역 살겠어요?”
에반젤린은 멀리 보이는 크로스로드를 흘깃 살폈다.
“유산 상속 건 정리하고, 가문 소유의 저택이나 땅, 재산 같은 거 다 처분하고…… 그리고 떠나려고요.”
에반젤린은 처음부터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니까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무구도 이번에 묻어 버린 것이겠지.
“도와줄게. 가산 정리하는 거.”
내 말에 에반젤린이 뾰족하게 눈을 치켜떴다. 나는 히죽 웃었다.
“아직 어린 청소년이 다 해결하기엔 버거운 일이니까. 어른이 도와주마.”
“저 이래 보여도 아카데미도 졸업했는데요…… 기본적인 법조 지식은 있어요.”
“그럼 같은 아카데미 나온 선배님이 베푸는 호의라고 생각하라구, 후배님! 어쨌든 현 영주님이 도와주면 수월하지 않겠어?”
그런 나를 한동안 빤히 올려다보던 에반젤린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힐난하지 않는 거예요?”
“뭘?”
“저는 지금 크로스 가문의 업을 팽개치고 도망가려고 하는 건데요. 혼자 편하려고, 이기적으로.”
나는 피식 웃었다.
“말이 좋아 업이지, 그동안 너희 가문 사람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 거잖아.”
“…….”
“크로스 가문은 할 만큼 해 주었어. 너희 가문만큼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내가 최선을 다해서 이곳 전선을 수호할게.”
나는 내 가슴팍을 두들겨 보였다.
“걱정 말고 떠나도 좋아, 후배님. 너희 가문이 그동안 짊어져온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나도 각고의 노력을 다하마.”
“…….”
미간을 찌푸리고 그런 나를 한참 살피던 에반젤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로 소문과는 다르네요, 선배님.”
“어, 응?”
“이런 곳에 좌천당해 내려오셨으면, 당연히 다시 돌아갈 궁리부터 하실 줄 알았는데요.”
속이 뜨끔했다. 그야 진짜 애쉬라면 그랬겠지.
“생각 이상으로 진지하게 이곳 영주로서 임하고 계셔서 놀랍네요.”
“하하…….”
어색하게 웃던 나는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여길 잘 지키면 누가 소원 하나 들어준다더라고. 그래서 열심히 하는 것뿐이야.”
자칭 이 게임의 디렉터라는 녀석이 제시한 조건.
– 이 세계를 진엔딩으로 이끌어 주신다면, 고전덕후님의 소원을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래. 어떤 고결한 대의가 있어서 이 고생을 자처한 게 아니다.
나 개인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진엔딩 공략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내 말을 어떻게 들은 건지, 에반젤린은 손으로 턱을 괴고 으음 소리를 냈다.
“황제 폐하께서 그런 약속까지 하셨다고요? 이 벽촌 오지의 전선에 그렇게까지…….”
아니, 황제가 한 약속은 아닌데.
하지만 부연해서 설명해 봤자 더 복잡해질 테니까 저렇게 오해하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때였다.
쿠르릉!
갑자기 웬 천둥 같은 소리가 났다. 뭐야?! 날씨는 맑은데?!
“아, 배고프네.”
뭔가 했더니 에반젤린의 배에서 난 소리였다.
아니 보통은 꼬르륵 정도 소리 나지 않냐? 쿠르릉은 뭐야?
에반젤린은 상의 아래의 배를 벅벅 긁더니 다시 두 손을 재킷 주머니에 폭 꽂고는, 내게 퉁명스레 내뱉었다.
“밥 줘요. 어제 그 요리 맛있던데. 또 해 줘요.”
어이가 없어서 그런 꼬맹이를 빤히 보다가 나도 모르게 하하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산 사람은 먹고 살아야지.
나는 장례식을 따라온 모든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돌아가자! 밥 먹으러!”
잃은 사람을 땅 아래 묻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진해야 한다.
‘할 일을 하러 가자.’
이제 곧 다음 스테이지였다.
***
그날부터 나는 두 가지 업무를 동시에 처리했다.
하나는 기존에 하던 일 그대로. 스테이지 공략 준비.
골렘 군단의 침공에 대비해 성벽의 개조와 보수가 이루어졌고, 아티팩트들도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기에 적합한 것들로 세팅했다.
무엇보다, 대형으로 분류된 몬스터들에게는 기존의 킬존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
대형 괴수들은 자잘한 장애물이나 바리케이드 따위는 무시하고 몸으로 부수면서 전진해 온다.
대신에 몸이 크니까 멀리서부터 화력을 집중하기는 또 나름 편하긴 하다.
‘모든 병사들에게 전술 변경점을 설명하고, 골렘을 상대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골렘의 종류별로 마력핵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지, 모든 것을 훈련해 두어야 한다.
이렇게 스테이지 공략 준비를 계속하는 것이 첫 번째고. 나머지 두 번째는.
‘변경백이 남긴 유산을 깨끗하게 현금화 한다.’
크로스 가문의 가산 정리였다.
에반젤린은 변경백 작위를 포기했고, 아예 다른 곳으로 떠나기를 바랐다.
이 아이가 다시 이곳에 돌아올 필요가 없도록 깨끗하게 가산을 정리해서 주는 게 낫겠지.
이 작업은 에이더에게 일임했다. 나보다 훨씬 빠삭할 테니까.
“그렇습니까. 에반젤린 아가씨를 떠나보내기로 마음 먹으셨군요오.”
아쉽다는 듯 중얼거린 에이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아. 크로스 백작가의 모든 가산을 현금화해서 에반젤린 아가씨께 드리겠습니다. 상속 과정에서의 모든 법적 신고와 처리도 제가 맡지요.”
“부탁한다, 에이더. 중간 중간 내게 보고하고.”
“여부가 있겠습니까아. 흠, 다만…….”
흔쾌히 일을 맡아 준 에이더였지만, 내가 제시한 조건에는 난감해하는 눈치였다.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 만에 전부 현금화시키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요오…….”
내가 내건 시간제한은 일주일.
다음 스테이지가 시작하기 하루 전까지다.
“크로스 가문의 재산은 대부분이 현물. 봉토와 건물입니다아. 일주일 안에 구매자가 나타날지…….”
“그럼 일단 내 명의로 사들여. 적절한 가격 책정해서.”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안에 현금화를 끝내고 에반젤린을 보내 주고 싶다.”
가능한 다음 스테이지 시작 전에 이 일을 끝내고, 에반젤린을 이곳 전선에서 떨어뜨려 놓고 싶었다.
‘다음 전투에 에반젤린을 휘말리게 할 순 없다.’
만약 다음 스테이지 시작 전까지 에반젤린이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괴수가 몰려와 전투가 시작될 테고, 전황에 따라 에반젤린 또한 전투에 휘말릴 수 있다.
그러면 그 뒤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내 품에서 죽은 변경백의 모습이 자꾸 뇌리를 스쳤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크로스 가문은 모든 구성원이 이곳 전선에서 죽었다.’
에반젤린은 그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
달리 말해 유일한 생존자다.
‘적어도 에반젤린만은, 이곳의 전화(戰火)에 휘말리지 않고 온전하게 떠나보내야 한다.’
그것이 변경백의 바람이었고 유언이었다.
나는 그것을 충실히 지켜 줄 심산이었다.
그런 내 얼굴을 마주본 에이더는 내 뜻을 짐작했는지, 이윽고 히히 웃어 보였다.
“알겠습니다아! 저만 믿고 맡기셔요, 영주니임!”
이 게임의 디렉터로서는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영주 보좌관으로서는 나름대로 유용한 에이더다. 잘 처리해 주겠지.
나는 스테이지 정보창을 열어 보았다.
[STAGE 3]– 시작까지 : 8일
시간은 무정하게 흐르고, 다음 방어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해내 보이겠다.
사람의 도리를 잃지 않고도, 사람의 목숨을 탄환으로 사용하지 않고도, 이 게임을 공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낼 테다. 반드시.
***
쏜살처럼 시간이 지나서.
어느새 일주일 뒤.
대장간.
“죄송합니다, 전하. 마총 제작은 처음인지라 난관이 많았던 탓에…….”
대장장이 조합장과 연금술사 조합장이 연신 허리를 숙였다.
“다섯 자루 모두를 만드는 것은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손을 휘저었다.
“아니, 괜찮아. 당장 실전에 쓸 수 있는 마총을 확보한 것만으로도 족해.”
애초에 주문한 다섯 자루 전부 이번 스테이지에서 쓸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않았다. 데미안한테도 버거울 테고.
“해서, 몇 자루 제작에 성공했나?”
“그것이…… 두 자루, 입니다.”
긴장한 두 조합장이 내 눈치를 빠릿 살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너네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냐?
“혼 안 낼 테니까 보여 주기나 해. 가져와 봐.”
“예!”
두 조합장은 뒤의 테이블에서 천으로 감겨 있는 두 마총을 가져왔다.
“표준형 저급 마력핵과, 검은 거미 여왕 마력핵. 두 가지를 써서 각 장비의 핵으로 삼고 제작했습니다!”
“우선은 이쪽을 보시지요.”
첫 마총을 감싸고 있던 천이 풀렸다.
드러난 것은 단순한 디자인의 회색 마총이었다. 전에 본 것보다 총신이 다소 짧다.
“표준형 저급 마력핵으로 만든 것이 이 마총입니다. 아무래도 저등급 마력핵이다 보니, 혹여 실패해도 리스크가 적지 않을까 해서 가장 먼저 만들어 보았습니다.”
“성공했나?”
“그럼은요! 아주 잘 작동합니다.”
즉답한 연금술사 조합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성능이 조금 낮고, 한 가지 결함이 있긴 합니다만.”
“결함?”
나는 회색 마총을 받아들고 능력치를 살폈다. 어디 보자.
[딱따구리(N) Lv.20]– 분류 : 마총
– 공격력 : 25-26
– 내구도 : 4/4
– 장탄량 : 20/20
확실히 구리긴 하군. 대미지가 마총답지 않게 낮다.
장탄량은 마총치곤 많은 걸 보니, 장탄 수를 늘리다가 대미지가 떨어져 버린 모양이다.
“결함은 뭔데?”
옆의 테이블에 마총을 놓으며 묻자, 대장장이 조합장이 답했다.
“설계상의 작은 실수로, 그…… 방아쇠를 당긴 채 놓지 않을 경우, 잔탄을 모두 쏟아내 버립니다.”
“응? 연속으로 드르르륵 갈기게 된단 말이야?”
“예. 그래서 이름도 딱따구리라고 짓게 되었습니다.”
“실수로 연발사격을 하게 되면 조준도 유지가 안 되고, 쉽게 과열되는 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두 조합장은 다시 고개를 넙죽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마총을 처음 만들다 보니 이런 저런 실수가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송구스럽습니다, 전하!”
“아냐, 잘 했어. 완성한 게 어디야.”
연사가 된다면 이건 또 이 옵션 나름대로 쓸모가 있을 것이다.
조준 트러블은 데미안에게는 문제가 안 되니까.
그리고 두 번째 마총. 이번에는 두 조합장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빛이 서렸다.
“다음은 이것! 전하께서 주신 특급 마력핵으로 제조한 마총입니다!”
“이것은 저희도 자신이 있습니다! 아니, 자신 정도가 아닙니다! 뭐라고 할까요, 그야말로 신들린 듯 만들었다고 할지……!”
얼마나 잘 뽑혔길래 180도 태도가 변해서 이렇게 자신만만하지?
기대하는 내 앞에서 두 조합장은 단숨에 마총을 덮은 천을 벗겨 냈다.
“…….”
주변의 빛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듯한 짙은 흑색 총신.
화려하게 수놓아진 금빛 문양.
기품 있으면서도 장중하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흘리는…… 길고 얇은 마총 한 자루가 그곳에 있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나는 마총을 받아들고 능력치를 확인했다. 겉만 번지르르한 건 아니겠지?
[블랙 퀸(SSR) Lv.55]– 분류 : 마총
– 공격력 : 225-250
– 내구도 : 7/7
– 장탄량 : 7/7
– 저주의 탄환을 쏘아내어 일정 확률로 적을 즉사시킵니다. 확률은 무기 숙련도에 비례해 증가합니다.
– ??? (이 무기로 처치한 적 숫자에 따라 개방)
– ??? (이 무기로 처치한 적 숫자에 따라 개방)
“…….”
뭐야, 이 괴물은.
터무니없는 물건이 튀어나왔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작게 벌렸다.
이게 대체…… 뭐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