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689
◈ 689. [STAGE 40] 얼음요새 (2)
내게 남은 마지막 기억은 나이트 브링어에게 가슴이 두 번째로 꿰뚫리던 순간이었다.
더스크 브링어는 그 뒤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녀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 나는 멍하니 주위를 살폈다.
“……그래서 저를 찾으려고, 여기까지 직접 온 거예요?”
얼음 속의 세계.
나이트메어 슬레이어 [빛과 그림자] 내부의…… 박제된 보관소.
이곳까지 나를 찾아 직접 들어온 건가.
“너뿐이니까.”
더스크 브링어는 차가운 손끝을 뻗어 내 이마를 어루만졌다.
“이 세상을 다시 밝힐 수 있는 건, 그러기 위해 내 불꽃을 맡길 수 있는 건, 너뿐이니까.”
“…….”
침묵하던 나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대공. 저는 당신이 아끼던 그 애쉬가 아니에요.”
“…….”
“그 애쉬는 이미 죽었어요. 저는 그 애쉬의 기억을 보존해둔 백업…… 복제에 지나지 않아요.”
나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애초에 애쉬가 복제였으니, 저는 복제의 복제, 모조품의 모조품, 레플리카의 레플리카에요. 가짜 중의 가짜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괜찮아.”
내 떨리던 목소리는 더스크 브링어의 굳건한 믿음이 서린 한 마디에 멈췄다.
더스크 브링어는 하얗게 얼어붙은 입가를 치켜 미소해 보였다.
“그것도 너니까.”
“…….”
“그것도 네 인생이니까.”
천천히 두 손을 뻗어, 내 두 손을 맞잡고.
“그리고 네 삶은, 아름다우니까.”
그렇게, 진심을 다해 말해주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애쉬. 너는 이 세상 무엇보다 강한 마음…… 미워하지 않을 용기를 가지고 있어.”
생경한 표현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미워하지 않을 용기……?”
“그래. 증오와 분노 대신 상대를 포용할 줄 아는. 분열된 세계를 끌어안고 타인의 상처를 보듬을 줄 아는. 진정으로 강한…… 선의(善意).”
“…….”
“그 선의를 가지고 있는 이상, 수천 수만 번을 더 복제된다 해도, 너는 너다.”
멍하니 선 내게 더스크 브링어는 말을 이었다.
“나의 어머니, 데이 브링어께서는 내게도 그 용기가 있다고 하셨지. 그래서 나를 믿고 내게 왕위를 물려주셨지만…… 세상의 풍파에 휩쓸리자, 어느새 내 안의 그 용기는 모두 삭아버렸다.”
“…….”
“내 치세(治世) 동안 나의 나라는 피와 재로 범벅이 되었지. 나는 많이 죽이고, 많이 미워했고, 또 미움받았다.”
더스크 브링어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어렸다.
“나는 결국 어머니가 바란 모습대로 살지 못했다. 비겁하고 뻔뻔하게, 흔해 빠진 왕 중 하나로 연명했을 뿐.”
맞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실렸다.
“그러던 중 너와 만났다. 내가 잃어버린 그 용기를 결코 놓지 않는 너를.”
“…….”
“상대와 싸우고 죽이는 것은 쉽다. 반대로 대화하고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하지만 너는 늘 고민하면서도, 끝내 어렵고 고단한 길로 기꺼이 나아가지 않았느냐. 그래서 네 여정이 위대했던 거야.”
그저 떠밀리듯이, 그저 비틀거리며, 넘어지고 기어가며 도달한 곳이 여기였을 뿐인데.
잃고, 잃고, 잃고, 또 잃어서- 이제 세계는 멸망하기 직전이고, 나는 몇 번이고 패배를 거듭하며 굴러떨어진 끝에, 당신이 오지 않았다면 영원히 이곳에 얼어붙어 있었을 텐데.
“나를 믿어다오, 애쉬. 한때 너와 같은 꿈을 꿨지만, 결국 냉혹한 현실 앞에 포기해버린 내가 하는 말이니.”
어째서 당신은,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촛불 대하듯…… 그렇게 나를 소중하게 바라보는 건가요.
“너는 이 세상을 밝힐 수 있다.”
천천히 손을 놓은 더스크 브링어는 자신의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더니, 이윽고 가슴 안쪽에서 일렁이는 붉은 불꽃을 꺼내어 두 손 사이에 모아들었다.
한참 말없이 그 불꽃을 내려다보던 더스크 브링어가 두 손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받아주겠느냐?”
“…….”
내가 망설이자, 더스크 브링어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도 안다. 이 불꽃은 순수하지 못해. 선대 분들이 지켜온 고결함을 나는 지켜내지 못했거든.”
그녀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불꽃에는 나의 과오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위대했던 선조의 의지는 모자란 나에 의해 더럽혀졌고, 타락했고, 추악해졌어.”
“…….”
“하지만 이게 내가 줄 수 있는 전부니까.”
진심으로, 그녀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자신의 더럽혀진 삶이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순수한 불꽃을 오염시켰다고 생각하듯이.
“네가 보기에도 이 불꽃이 추악해서……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겠느냐?”
더스크 브링어의 시선이, 목소리가, 그리고 손에 들린 불꽃이…… 모두 가냘프게 떨렸다.
“…….”
침묵하던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추악해도 괜찮아요, 대공.”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에게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때로는 피해를 입히고, 또 피해를 입고, 그렇게 검댕이 묻으며 살아가는…… 그런 삶을, 우리는 평범이라고 불러요.”
완전무결한 선이 이 세상 어디에 있으랴.
전장을 통과하자 피와 재로 범벅이 된 나의 깃발처럼.
어쩔 수 없이 쌓이는 증오와 분노, 원한과 미움을 억누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런 때 묻은 매일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이들이 늘 치러온 위대한 싸움이니까.
“때로는 실수할 수도 있겠죠. 때로는 타인을 상처입힐 수도 있겠죠. 순간의 실수로 오점을 남기고, 흉터처럼 결점이 남겠죠. 돌아보면, 온몸에 상처와 검댕뿐일지도 몰라요.”
“…….”
“그래도 괜찮아요. 대공은, 결국 무엇이 소중한지를 잊지 않았으니까.”
끝내 사람으로 남았으니까.
위정(爲政)의 진창 속에서 살면서도, 마지막까지 별을 보고 있었으니까.
“당신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을게요. 당신의 오점을 없던 일로 만들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렇게…… 당신의 추악을 안아 줄게요.”
나는 더스크 브링어의 자그마한 어깨를 천천히 끌어안아, 다시 포옹했다.
내 품에 안긴 더스크 브링어의 호박색 눈에서 눈물방울이 흘러 떨어졌다. 나는 그녀의 귓가에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고마워요, 대공. 나를 구하러 와줘서. 나의 삶에 가치가 있다고 말해줘서.”
“애쉬…….”
“이제 제가 물려받을게요. 당신의 추악도, 당신의 상처도, 당신의 업보와 후회도, 전부.”
내가 망설였던 것은 그녀의 삶이 추악해서가 아니었다.
이것을 물려받는 순간, 그녀와 이별해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이 사람을 위한다면…… 받아들여야 하겠지.
그녀의 뜻도.
그녀와의 이별도.
사아아아…….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불꽃이 천천히 내 가슴팍 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작은 손으로 그 불꽃을 정성껏 내 안으로 밀어 넣으며 더스크 브링어가 속삭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을 아울러, 용이라 부른단다. 이제 너는 사람들의 이해에서 벗어나, 경외 받고, 손가락질당할 거야. 그게 용의 운명이니까.”
“…….”
“하지만 사랑하려무나, 애쉬.”
애써 웃어 보이려는 더스크 브링어의 양 뺨으로 끊임없이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내가 선대로부터 받은 사랑을…… 내게 남은 사랑을 모두 줄 테니. 부디 너도 사랑하렴.”
“사랑할게요.”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대공이 그러셨던 것처럼.”
불꽃이 모두 내 가슴속으로 옮겨졌다.
“나의 후대(後代)여.”
더스크 브링어의 몸에서 급격히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무너지려는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나의 불꽃, 나의 뜻, 나의 이름을 계승할…… 나의 아들.”
그리고, 대를 이어 계승되는 이름을.
반복되고 이어지는 그 이름을, 내게 붙여주었다.
“던 브링어(Dawn-Bringer).”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내 가슴으로 옮겨진 불꽃에서 뜨거운 열기가 휘몰아치며, 동시에 주위의 얼어붙은 세계를 녹여가기 시작했다.
얼음과 눈이 녹아 사라지자, 새카맣게 탄 검댕투성이 대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검댕으로 가득한 세계가 더스크 브링어의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또한.
지평선 끝까지 불타버린 이 새카만 세계의 중앙에.
그녀가 정성껏 지키고 가꿔낸…… 녹색 풀과 잡초꽃으로 뒤덮인 조그마한 언덕이 있음을 발견했다.
내가 선 곳이었다.
자신의 마음에 드리우는 그 모든 추악, 그 모든 증오, 그 모든 타락으로부터 끝끝내 그녀가 지켜낸…… 아주 작은 희망.
그것은 바로 나였다.
“황혼이 지고 나면 밤이 드리우지만…….”
서서히 무너지는 그녀를 나는 천천히 바닥에 눕혔다.
잡초꽃 위에 단아하게 누운 채, 더스크 브링어는 흐릿하게 미소했다.
“길고 긴 밤이 끝나면 반드시, 새벽은 오고야 말 테니.”
“…….”
“그러니, 던 브링어. 너의 세상에 햇볕을 되찾아다오.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울음을 참으며 속삭였다.
“……대공의 내일도, 틀림없이 맑을 거예요.”
어제가 추악했다 해서, 내일까지 추악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녀의 말대로, 황혼이 저물고, 밤이 새고 나면, 반드시-
새벽은 다시 올 테니까.
“……그래. 이미 이렇게 찬란한 내일을, 찾아냈는걸…….”
힘 빠진 손으로 내 뺨을 한 번 더 어루만지더니, 빛이 꺼진 눈으로 대공은 환히 웃었다.
“내 어머니께서 말씀해주신 전설에 따르면, 수명을 다한 적룡들은 세상 끝의 해안에 모여서…… 함께 세상의 마지막 일출을 기다린다고 하더구나.”
“…….”
“그러니까, 이건 이별이 아니야…… 우리는 그 마지막 아침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더스크 브링어의 호흡이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나를 향해 미소해 보이려 했다.
“또 보자, 나의…….”
그녀는 말을 맺지 못했다.
나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녀의 손을 잡아 조심스레 내려두고, 눈물이 맺힌 채 뜨여 있는 그녀의 호박색 눈을 천천히 감겨준 다음, 그녀의 희고 반듯한 이마에 조용히 입 맞췄다.
“또 봐요. 대공. 아니.”
직후, 정정했다.
나에게 자신의 피와 뜻을 계승시켜준 그녀의 호칭을, 이렇게.
“……어머니.”
깊이 잠든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며, 나는 최대한의 다정함을 담아 속삭였다.
“꼭, 다시 만나요.”
작별을 고한 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거칠게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 터져 나올 것 같은 오열을 속으로 밀어 넣은 뒤.
뒤로 돌아섰다.
검게 불탄, 검댕으로 가득한 그녀의 세계를. 불꽃의 융단이 깔린 긴 수라도를.
얼어붙은 세계에서 그녀가 나를 찾기 위해 기꺼이 행진했듯이, 나 또한 그녀가 살아온 기나긴 궤적을…… 기꺼운 마음으로 걸었다.
***
까마득한 길의 끝에서.
세계의 모습이 변했다.
세계와 세계의 경계에 서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하얗게 타버린 재로 가득 메워진, 끝없는 사막이었다.
최초에 무엇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들이 모조리 타고 타고 또 타서 하얀 잿가루로 변해 휘날리고 있었다.
오직 모래 사각거리는 소리만 가득한, 이 말라 죽어가는 재의 사막에서.
“이봐, 친구.”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움이 필요한가?”
돌아보자, 그곳에는 한 남자가 주저앉아 있었다.
부옇게 일렁이는 아지랑이 때문에 마치 모래 신전처럼 보이는 사주(沙柱)에 등을 기대어 앉은 남자였다. 기묘하게도, 이곳은 정신세계인데도 남자는 자신의 본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온몸이 깨어진 도자기처럼 조각 나, 텅 빈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채. 그 자신도 이 사막처럼 온몸에서 새하얀 잿가루를 흩날리는.
금이 가고 깨어져 구멍이 난 얼굴에는 영문 모를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서. 그는 나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건 네 쪽 같은데.”
헛웃음을 흘린 나는 상대를 불렀다.
“본헤이터.”
그러자, 남자- ‘진짜 애쉬’가 피식 웃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상황이라고 해두자고.”
읏차- 소리를 내며 진짜 애쉬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가볍게 손으로 몸을 털자 부서진 몸 곳곳에서 희뿌연 잿가루가 모래처럼 뿌려졌다.
진짜 애쉬가 멋쩍게 자신의 깨어진 몸을 가리켜 보였다.
“이런 꼬락서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네게 보탬이 될 것 같은데…….”
“…….”
나는 가만히 그를 마주 보았다.
“조각난 공략의 기억과, 파편화된 전투 경험뿐이지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 어때?”
진짜 애쉬가, 가짜인 내게 손을 내밀었다.
부서져 흘러내리는 그의 손은 이 사막에 메마른 삭풍이 몰아닥칠 때마다 힘겹게 떨리고 있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한번 힘을 합쳐보지 않겠어, 던브링어?”
“…….”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토해낸 뒤.
마주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낚아챘다.
“언제는 안 합쳤냐?”
겹친 우리의 손이 무겁게 위아래로 오갔다.
다음 순간, 하얀 잿가루의 세계와 새카맣게 불탄 검댕의 세계가 거세게 진동하며 서로 뒤섞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