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703
◈ 703. [Side Story] 남은 사람들
몰려든 영웅과 병사들, 그리고 왕들 사이에서. 우리는 모두 울고 웃으며 승리를…… 그리고 생존을 자축했다.
동시에 동료의 죽음과 전선이 입은 피해에 슬퍼했다.
다시 밝아온 햇볕 아래에서 계속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고 싶었지만, 복구해야 할 피해가 너무 컸다.
도시는 파괴되었고 성벽은 무너졌으며 사람들은 죽었다. 나는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을 모아 뒷수습을 지시했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아니, 제발 저희가 하게 해주십시오!”
비교적 부상 정도가 덜한 일반 병사들이 앞다퉈 앞으로 나섰다.
특히 아리안 왕국 병사들이 가장 앞에서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파괴된 도시 앞에서 슬퍼하면서도, 저 먼 북쪽에서 자신의 나라가 구원받았으리라는 사실에 어쩔 수 없이 기뻐하고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슬퍼하는 이들과 기뻐하는 이들로 뒤섞여 있었다. 이번 전투는 그만큼 영광된 패배였고 처참한 승리였으므로. 각자 다른 감회를 느끼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제각각 다른 색을 띤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슬퍼하고 기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세상은 이렇게 계속되고 있다.
“우선은 도시부터 수습하고…….”
가장 긴급한 복구 지시가 끝난 뒤, 오전 햇살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말했다.
“피난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또 각국에서 인력을 보충해 오면…… 남쪽에서 흑룡과 싸우다 전사한 3만 용사들의 시체도 수습해 와야겠습니다.”
이번 전투의 인명피해 대부분이 그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반드시 수습해와야 한다.
“당연히 그럴 겁니다, 황태자 전하.”
다른 왕들과 함께 내 지시를 받아 전달하던 도시국가연합의 장, 발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 브레스 직격에 휩쓸렸다는 발렌은 애지중지 길렀던 콧수염이 모두 불타버린 몰골이었다. 화상을 입은 온몸에 붕대를 둘둘 감은 채였다. 하지만 지금 내 옆에 서 있었다.
“좀 괜찮습니까, 발렌 공?”
조심스레 묻자, 발렌은 버릇처럼 수염을 손끝으로 만지려다가, 수염이 불타서 없어졌음을 깨닫고는 멋쩍게 손을 내리더니 대답했다.
“지금 이곳에 괜찮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
“하지만 괜찮지 않다고 해서 사는 게 끝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할 일을 해야지요.”
그는 이미 지난 파리대왕전 때 마음이 꺾였다.
이번 전투에서는 이만큼의 부상 또한 입었다. 그는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장 도망치는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해내려 하고 있었다.
“도망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조심스레 이유를 묻자, 발렌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태생이 겁쟁이라, 뒤에서 욕먹는 게 무서워서. 최대한 생색 부릴 수 있도록 할 일만 다 처리한 뒤에 내빼려는 겁니다.”
솔직하게 말한 그는 멋쩍게 웃었다. 나도 마주 웃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아직 세상은 유지되는 것이리라.
“……이번에도 많이 죽고 다쳤네요. 아니, 전에 없이 많이 죽고 다쳤습니다.”
기껏 복구했는데 다시 처참하게 무너진 남쪽 성벽을 보며 내가 중얼거리자, 발렌이 엄한 목소리를 냈다.
“상처투성이라고 해도 승리는 승리입니다, 황태자 전하. 전하께서는 그야말로 신화적인 위업을 이룩했습니다.”
“…….”
“그러니…… 남은 수습은 우리에게 맡기고, 좀 쉬러 가세요.”
그는 내 등을 툭툭 쳐서 도시 안쪽으로 보냈다.
“전하께서 다독여야 할 사람들이 또 많이 있잖습니까.”
그 배려를 감사히 받기로 했다. 핵심 지시는 이미 모두 내리기도 했고.
성벽 밖에 서 있던 나는 천천히 도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신전이었다.
‘다들 케어가 필요한 상황이겠군.’
부상을 입은 영웅들도 영웅들이지만, 한번 어둠에 몸을 담근 영웅들을 회복시키는 것도 문제다.
굳이 게임식으로 표현하자면 어둠 속성 성향치가 끝까지 차버렸다고 해야 하려나. 이번 전투에서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유용했지만, 이러면 부작용도 심각하다.
이 어둠을 어떻게 중화시켜야 할까…… 고민하며 걷는데.
“…….”
멀찍이 켈리베이의 모습이 보였다.
늙은 드워프 대장장이는 비상 착륙한 라 만차 전면에 부착된 [굳건한 미신]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회한이나 슬픔이 어린 얼굴 대신, 담담하고 평화로운 얼굴로. 가만히.
“…….”
나는 굳이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도시 안으로 향했다.
크로스로드 남문 안쪽에는 베르단디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여동생 스쿨드가 죽은 자리에서, 그곳에 남은 나무 밑동에 피어난 새싹에 조심스럽게 물을 주고 있었다.
햇볕 없이, 눈보라 속에서, 혹독하게 방치되어 있던 그 새싹은 놀랍게도 아직 숨이 붙어 있었고…… 베르단디가 주는 물을 맞으며 어린 녹색으로 반짝였다.
“…….”
나는 베르단디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반쯤 폐허가 된, 하지만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 내부를 걸었다.
살아남은 마법사들과 합류해서 서로 얼싸안고 우는 디어뮈딘도, 수인족 사람들과 만나서 서로 둥글게 어깨동무하고 무어라 크게 소리치는 쿠일란도.
신전 입구에서, 어린 수행사제와 빗자루를 놓고 내가 쓸겠느니 아니 제발 쉬시라느니 하며 다투는 토르켈도…….
나는 굳이 다독이지 않았다. 위로하지 않았다. 그들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어둠 밖으로 끌어내지 않기로 했다.
이미 그들 스스로가 어디를 봐야 하는지 알고 있는 듯했기에.
“…….”
신전 바깥 벤치에는 응급치료를 받은 루카스가 무언가 고민하는 듯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서 녀석의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주군…….”
루카스는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은지 잠시 입을 우물거렸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말없이 한동안 벤치에 앉아서 햇볕을 쬐었다.
나도 루카스에게 할 말이 많았다. 혼낼 일도 있었고, 치하할 일도 있었다. 진짜 애쉬에 대한 이야기도, 가짜였던 나에 대한 이야기도. 잔뜩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나중에 서로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기로 하고, 지금은 간단하게.
“고생 많았다.”
이렇게 말했다.
몸을 움찔 떠는 루카스의 어깨로 손을 뻗어 툭툭 두들겼다. 그리고 씩 웃어 보였다.
“잘 해줬어.”
그러자 루카스는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우어어엉.”
“앗?”
울기 시작했다!
“우어어어어엉.”
예의 서러운 곰 같은 울음을 토해내길래 나도 모르게 웃었다. 아니, 부하가 우는데 상관이 웃으면 좀 그렇지만.
여러 감정을 담아 울어대는 루카스의 옆에서, 나는 그렇게 어깨를 한동안 두들겨 주었다.
어두운 늪에 발을 담갔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비단 어둠뿐이랴? 인생이라는 긴 여정 중에는 온갖 더한 오물을 밟는 일도 비일비재할 것이다.
그 정도로 좌절하거나 포기할 필요가 없다.
진흙투성이 신발을 털어내고, 다시…… 다음 길로 걸어가면 되는 일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사람들이 스스로 늪을 마저 빠져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들 모두가 각자 가야 할 목적지를 똑바로 보고 있다고 믿으므로.
“선배님!”
“황자님!”
“전하-!”
그때 신전 안쪽에서 응급처치를 끝낸 나머지 메인 파티원들- 에반젤린, 데미안, 쥬니어가 우르르 빠져나왔다.
모두와 할 말이 정말 많았지만, 우선은 각자 포옹만 한 번씩 나눈 다음.
“다 같이 일광욕 실시!”
루카스가 앉은 벤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일단 내 지시대로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직후 얼굴이 헤실헤실 풀렸다.
“와, 햇볕…….”
“이렇게 따뜻하고 환한 거였나?”
“우리 잠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이렇게 쉴까요…….”
옹기종기 루카스 주위에 모여 앉은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햇볕을 쬐며, 무언(無言)으로 루카스를 달랬다. 루카스는 쿨쩍거리며 울음을 삼켰다.
그런 메인 파티원들을 보며 피식 웃은 뒤, 나는 신전 안쪽으로 들어섰다.
신전 내부를 돌며 부상병들과 면담했다. 다만 부상이 극심한 이들은 만날 수 없었다.
체인이 그랬고, 텔레포트 게이트로 자력으로 귀환한 킹 포세이돈 또한 그랬다. 이 둘과 나눠야 할 말이 많았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아버지. 황제 트라하 ‘피스메이커’ 에버블랙.
손수 비공함 라 만차를 몰았던 황제는 어떤 영웅들보다도 큰 부상을 입었다. 승전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신전으로 이송되었고, 지금까지 수술 중이었다.
“…….”
굳게 닫힌 신전 안쪽의 문을 보다가 나는 새삼 실감했다.
이번 전투 뒤로…… 아주 많은 것이 변해버리리라는 사실을.
신전 순회를 끝내고 바깥으로 나오자, 격전으로 피곤했던 것인지 햇볕 아래에서 메인 파티원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훌쩍거리던 루카스까지도 심신이 지친 데다 울기까지 한 탓에 기력이 다했는지, 쿨쿨 소리를 내며 낮잠에 빠졌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서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곤히 잠든 아이들을 보며…… 나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토르켈이 조용히 담요를 가져왔고, 나는 그것을 아이들의 무릎 위에 덮어주었다.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제가 깨워드리겠습니다.”
“고마워, 토르켈.”
나는 토르켈의 어깨도 슬쩍 두들겨 주었다.
“고생 많았어.”
토르켈은 말없이 흐릿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대로 나는 신전을 벗어나 걸음을 옮겼다. 그때, 대로로 접어드는 내 앞으로 마차가 한 대 와서 섰다.
“전하!”
윈터실버 상단의 마차였고, 마부는 엘리제였으며, 안에 앉은 이는 세레나데였다.
“오늘 들리실 곳이 많을 듯하여, 급히 마차를 공수해 왔습니다.”
문을 열며 생긋 웃은 세레나데가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숨을 들이켠 나는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북문으로.”
내 가슴 위에 손을 올린 채, 그 안의 온기를 되짚으며…… 나는 굳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브링어 공국의 군영으로.”
***
브링어 공국의 군영은 한산했다.
무사한 병사들은 모두 도시 복구 작업에 투입되었고, 부상 당한 병사들은 신전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용기사들은 차분한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황태자 전하.”
용혈을 회수당한 탓인지 이들에게서는 예전의 강맹한 위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초연한…… 마치 폭설 아래 버티고 선 마른 나무처럼 강인한 의지가 두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
넷에서 셋으로 준, 그리고 예전보다 눈에 띄게 나이를 먹은 용기사들이 내게 경례해 보였다. 그리고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희 각하께서는 무사하신지요?”
“…….”
나는 대답 대신 손을 펼쳐 보인 다음, 손 안에 붉은 불길을 피워 올렸다.
이 불꽃의 의미를 아는 용기사들의 얼굴이 무너졌다. 강인하게 버텨내던 그들의 조각상 같은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슬픔이 들이찼다.
“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그들에게, 나는 담담하게 선언했다.
“더스크 브링어 선대 대공께서는 나에게 자신의 불꽃을 하사하셨다.”
“…….”
“그리고…… 영면(永眠)에 드셨다. 그분의 시신은 내가 수습하여 마법으로 보존해두었다.”
바닥에 쓰러진 채 통곡하는 세 용기사에게 나는 최대한 떨리지 않는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이 도시에 인력이 돌아오는 대로, 가능한 한 빠르게 모든 전몰자의 시신을 수습해 올 생각이다. 대공의 시신 또한 그때 함께 수습하여…… 브링어 공국의 전통대로, 공국에서 국장(國葬)을 치를 것이다.”
정신없이 흐느끼던 용기사들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이제 황태자 전하께서…….”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내가 적통(嫡統)한 브링어 공국의 계승자, 던 브링어다.”
그러자 세 용기사는 거칠게 눈가를 닦아내고 몸을 일으켜 모습을 정돈하더니,
“충(忠)-!”
일제히 외치며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새로운 브링어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에버블랙 제국의 황태자인 내가 브링어 공국의 공작이 된 것이 이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또한 브링어 공국의 국민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제국의 사람들에게는,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아직 모두 알 수 없었으나 용기사들은 망설임 없이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
“부디 선대 대공 각하의 위대한 뜻을 이어가 주십시오……!”
“……그러겠다. 반드시, 그리할 것이다.”
빙긋 웃은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나는 그분의 아들이니까.”
그 말에 용기사들의 얼굴에 일제히 안도가 스치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래. 이 세계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일들이 가득하지만…… 확실한 것도 있다.
내 안에 더스크 브링어의 불꽃이, 그녀의 뜻이 흐른다는 사실.
– 사랑하려무나, 애쉬.
그녀의 마지막 말을 되새기며 나는 눈을 꾹 감았다.
그렇게 할게요, 대공.
당신이 그러셨던 것처럼…… 꼭,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