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728
◈ 728. [Side Story] 피날레를 위하여
“내일은 소풍을 갈까요, 에이더?”
어느 때의 일이었던가.
가짜 왕자 노릇에 지친 에이더가 완전히 방전되어 소파에 앉아 있으려니, 다과를 들고 앞자리에 앉은 아리엘이 이리 물었다.
에이더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소풍이요?”
“네. 교외에, 어릴 적에 오라버니와 함께 자주 놀러 가던 언덕이 있거든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고, 여름이면 꽃이 피는…….”
아리엘이 멋쩍게 웃었다.
“나를, 그리고 왕실을 위해 고생해주고 있으니까요. 내일은 일정도 없고…… 음, 싫거나 피곤하면 거절해도 돼요.”
“아뇨, 아뇨! 전혀 싫지 않습니다!”
허겁지겁 손을 내저은 에이더가 어수룩하게 웃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왕녀님. 내일…… 기쁘게 기다릴게요!”
하지만 다음날, 두 사람은 교외로 소풍을 가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비가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풍을 가는 대신, 왕성의 안뜰 정자에 나란히 앉아서…….
함께 내리는 비를 보았다.
그런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어느 하루의 기억이.
이토록 마음에 깊게 남아 있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
“허억! 쿨럭, 쿨럭쿨럭!”
호수왕국이 침몰하던 순간. 호숫가.
에이더는 첫 번째 저주- 영생의 저주에는 걸렸으나.
왕녀의 추방령에 의해, 호수왕국에 내려진 두번째 저주와 세번째 저주는 받지 않고 호수왕국 바깥으로 튕겨 나왔다.
그리고 호숫가에서 호수왕국 전체가 침몰하는 것을,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탈출하지 못하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
한 세상의 멸망 앞에서, 작은 인간에 불과한 에이더는 압도당했다.
거대한 왕국이 호수 아래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이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에이더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왕국 전체가 남김없이 가라앉은 뒤, 천지를 뒤흔들던 진동과 소음이 모두 멎은 뒤.
뒤늦게 에이더의 뇌리에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 뭘 어째야 하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신이 호수왕국을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호수왕국에서 부려지던 노예일 뿐이며, 국민조차 아니었다. 평생 더럽고 궂은일만 도맡아 하다가, 왕자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끌려와 대역을 수행해야 했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다. 연고도 인연도 없다.
이대로 훌훌 털고 떠나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달그락.
에이더의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소리를 냈다. 에이더는 의아해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것을 꺼냈다.
그것은 검은 나무로 만들어진 호패(號牌)였다.
‘이것은……?’
왕녀 아리엘의 호패였다.
그녀의 이름과 신원이 새겨져 있었고, 왕족의 호패답게, 호화롭게도…… 상흑수 에버블랙의 조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대체 언제…….’
추방 명령을 내리던 그 순간, 아리엘이 에이더에게 건네준 모양이었다.
어째서였을까.
어째서 그 순간 왕녀는 자신을 호수왕국 밖으로 빼냈고, 어째서 그 순간……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 중 가장 귀한 것을 쥐여주었을까.
– 에이더.
문득 환하게 웃는 아리엘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자신에게 이름을 붙여준 사람.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준 사람.
– 내일은 소풍을 갈까요?
“…….”
알고 있다.
그 온기가 온전히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왕녀는 유년기에 사이가 좋았던 오라비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영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왕족과 노예, 국민과 비국민…….
그녀와 자신 사이에는 하늘과 땅보다도 더 머나먼 거리가 있음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하고 싶다.’
온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당신만은.
‘당신만은, 구하고 싶어…….’
왕녀가 전달한 호패를 소중하게 품에 챙긴 뒤.
에이더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뭘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유약한 얼굴에 의지를 되새기고,
“뭐든지 해볼게요, 왕녀님.”
에이더는 점차 검고 혼탁하게 물드는 호수의 수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멸망한 왕국을 구하기 위해, 가짜 왕자는 기나긴 유랑을 시작했다.
***
“……그 뒤로는 뭐, 지루한 이야기의 반복입니다아.”
에이더는 이야기를 일단락하고는, 나를 보았다.
“처음에는 무작정 검을 잡고 싸웠습니다. 저주를 내린 세 명의 현자…… 마왕과 그 동료들을 모두 죽이면 사태가 해결되리라 생각했죠.”
“그래서, 죽이는 데 성공했어?”
팝콘을 주워 먹으며 이야기를 듣던 나는(좀 실례 같긴 한데 이야기가 좀 길어야지) 놀라서 물었다.
그러자 에이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둘은 쓰러뜨렸습니다. 대륙 끝과 끝에 각자의 본거지를 꾸린 둘을, 정말이지 길고 끔찍한 싸움 끝에…… 격퇴할 수 있었어요. 둘 모두 한 차원 위의 존재였기에 쓰러뜨리는 데에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와우.”
솔직히 말해서 에이더 이 녀석, 생긴 것도 비실비실하고 얼굴도 허여멀겋고 농담으로도 일선에서 직접 싸울 타입은 아닌 거 같은데. 옛날에는 좀 쳤나 보다?
“영원한 삶과 꺾이지 않는 의지만 있다면, 이 정도 일은 누구나 해낼 수 있답니다아.”
“아니 보통은 의지가 꺾이니까 말이다…….”
무슨 자취생 요리법 설명하듯이 쉽게 말하지 말라고.
“호수왕국에서, 3인의 조각상 중 좌우만 부서져 있었던 것을 보셨나요? 그 조각상은 마왕이 점거한 뒤 세워진 것인데, 나머지 두 현자를 제가 쓰러뜨렸기에…….”
“좌우 조각상은 부서진 거구나. 그런 거였군.”
에이더는 옅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렇게 두 번째 저주와 세 번째 저주는 풀어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호수왕국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사람이 거의 남지 않았고, 호수왕국은 이미 물속에 가라앉은지라 다시 물 위로 건져 올릴 힘도 남지 않았죠.”
“…….”
“게다가, 정작 가장 중요한 마왕은 쓰러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따지자면.
이것은 에이더에게 ‘1회차’의 일인 것일까.
“속절없이 시간만 흐르고, 끝내 악의로 포화된 호수왕국에서 괴수가 쏟아져 나오고, 세상이 멸망한 뒤…….”
본인에게는 가슴 아픈 이야기일 텐데도.
에이더는 덤덤하게 옛일을 설명해주었다.
“모든 목숨이 사라지고 제가 지상 최후의 인간이 되었을 때, 두 가지 제안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두 가지?”
“가장 먼저, 여신께서. 제게 종족신의 자리를 제안하셨습니다.”
아주 예전에 에이더가 해주었던 말이 생각 났다.
각 종족 최후의 생존자가 되었을 때, 종족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에이더는 불로불사의 영생자였기에, 그 끝에 도달하고 종족신이 된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마왕이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에이더는 쓰게 웃었다.
“상호 간에 서로 구하고 싶은 상대를 구하지 못했으니, 이 멸망유희를 ‘한 번 더’ 하자고.”
“…….”
“멸망한 세계 전체의 대리권자로서, 저는 동의했고. 세계는 호수왕국 침몰 뒤의 순간으로 ‘리셋’되었습니다.”
마왕의 동료 둘은 같은 고차원의 존재였기에, 회귀해도 이미 쓰러뜨린 상태가 유지되었다고 한다.
즉, 2회차부터는 마왕만 쓰러뜨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랬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아.”
에이더는 예의 태평한 태도로 두 손을 휘저었다.
“정말이지 갖은 수를 다 써보았지만, 마왕을 물리치지도, 호수왕국을 구하지도 못했습니다. 수백 년의 무모한 싸움을 계속해서 반복할 뿐이었지요.”
“…….”
“그러다가 제 영혼에 한계가 찾아왔고, 직접 싸우는 것에 한계를 느낀 저는 대리 플레이어를 찾게 되었고…….”
에이더는 나를 향해 눈짓했다.
“그 이후는 뭐, 아시는 대로.”
“과연…….”
“상흑수 에버블랙의 조각이 제게 있었기에, 그것으로 괴수 대침공을 막아낼 나라- 에버블랙 제국을 부흥시켰고…… 그러다가 회귀자 적성을 가진 당신을 발견해서, 어깨를 맞대고 또 무한한 싸움을 거듭한 끝에, 여기입니다.”
에이더는 방싯방싯 웃으며 차갑게 식은 찻잔을 들었다.
“긴 이야기였네요오.”
긴 이야기였다.
하지만 실제 에이더의 싸움은 이 이야기보다 억천만 배 더 길었을 것이다.
훨씬 많은 고통과 외로움과 번민을 요약으로 얼렁뚱땅 넘겨버리고 뭉개버린 에이더는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사실 앞의 긴 실패담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에게 남은 최후의 전투, 그 한 번이 성공하면 되는 것인데.”
“……네 말이 맞아, 에이더.”
나는 씩 웃었다.
“앞에 얼마나 두들겨 맞았든, 최후에 끝내주는 한 판 업어치기로 이겨버리면 그만이잖아. 그렇지?”
9999패 해도 뭐 어때, 마지막에 1승을 한 쪽이 평생 이긴 기분으로 사는 법이라고!
“후후. 맞는 말씀입니다아.”
우리는 잠시 서로를 보며 낄낄거렸다.
나는 에이더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나저나, 그렇게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더니, 결국 사랑 이야기였구나. 이 순정남 자식아.”
에이더는 머쓱해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정확히는, 짝사랑이지요.”
“야아~ 그래도 인정하는구나, 연심이라고. 막 아니라고 잡아뗄까 봐 미리 놀릴 준비 하고 있었는데.”
“제가 어렸던 그때라면 인정하지 않았겠지요. 어찌 감히 노예가 왕녀를 사랑하겠느냐며, 그런 감정 품지 않았노라고 부정했을 겁니다.”
에이더는 안경 너머 노쇠한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저는 늙었습니다, 영주님.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나이를 먹었습니다.”
“…….”
“그때의 그 치기 어린 감정이 연심이었다는 것을, 지금의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의 그 감정?”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면 지금은?”
“……글쎄요.”
에이더는 텅 빈 찻잔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저도 궁금합니다. 그분을 구하리라고 제가 결심했던 첫 감정은 틀림없는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입을 우물거리며 무어라 언어를 만들어내려다가, 이윽고 포기한 그는 맥이 풀린 듯 탁하고 웃어버렸다.
“뭘까요, 제 감정은. 저는 왜 이토록 오랜 세월, 그 사람을 구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
“뭐어, 이제 이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보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가 도달할 진짜 엔딩을.”
잠깐 침묵이 흘렀다.
탁.
찻잔을 내려두고 깍지를 낀 에이더는 후, 숨을 들이쉬더니.
“자, 그럼 옛날 이야기도 할 만큼 했으니…… 앞으로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화제를 돌렸다.
어찌보면 이 자리에서 우리가 나누어야 할 본론을.
“호수왕국으로 향하는 길이 막혀 있다가 지금 개방되었지요.”
“응. 그래서 자유탐사를 보내려던 참이었는데.”
다음 스테이지는 45.
보스 스테이지다. 상대가 누군지 정찰해두어야 한다.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에이더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이제 호수왕국 던전에 진입하시면, 최심부에서 최종보스와 조우하실 수 있습니다.”
“……?!”
“‘게임’에서도 그랬지요? 이 시점부터 만날 수 있었을 겁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최종보스라면…….”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
에이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무명님입니다.”
“……!”
“그동안 호수왕국 진입이 막혀 있던 이유가 뭐겠습니까?”
에이더는 잔혹한 진실을 덤덤하게 읊었다.
“그분의 괴수화(怪獸化) 과정이었습니다. 호수왕국 전체가 어둠에 뒤덮였지요. 그리고 이미 변이는 끝났습니다.”
자신이 짝사랑한 상대가.
억겁의 세월을 싸우며 구하려던 상대가.
이 최후의 회차에서 이미 인간성을 소실하고 괴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이토록 담담하게.
“호수왕국 모든 사람의 악몽을 짊어지고, 그 악몽의 총집체가 되어, 이제 이 세상 어떤 괴수보다도 강력한 존재가 되셨지요.”
“…….”
“그리고 스테이지50이 시작되면, 그분은 호수왕국을 벗어나, 인세로 향하실 겁니다.”
에이더는 어느새 차가워진 눈으로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게임’에서는, 그 전에 그 분을 죽여야 괴수대침공을 저지하고 승리할 수 있었지요.”
“……!”
“즉, 다시 말해서.”
눈빛만큼 차가워진 목소리로.
에이더는 게임에서의 승리 조건을 입에 담았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스테이지50 시작 전까지, 괴수로 변모한 무명님을 죽여야 합니다.”
“…….”
“물론.”
직후, 에이더가 방긋 웃었다.
“이건 제가 바라는 엔딩이 아닙니다. 그리고, 영주님이 생각한 방법도 아닐 겁니다.”
그렇다.
나는 내 나름대로 무명을 구할, 그리고 이 판을 화끈하게 엎어버릴 공략법을 생각해두었다.
그리고 에이더는, 지금부터 ‘무언가’를 준비하러 이곳을 떠난다고 말했지.
“지금부터 제가 준비할 최후의 한 방과, 영주님이 생각해두신 공략법.”
어째 악당처럼 음흉하게 웃은 에이더가 눈짓했다.
“이것을 조합해서…… 한번 화려하게 저질러보지 않으시겠습니까?”
“…….”
“온 우주를 깜짝 놀라게 할, 최고로 화려한 최후의 ‘멸망유희’를 말입니다아.”
아잇…….
그렇게 말하면 대체, 세상 누가 거절할 수 있겠냐고!
피식 웃은 나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 공범!”
에이더 역시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굳게 악수하며 우리는 악랄하게 웃었다.
“우리의 지긋지긋한 공동전선을 마무리하는, 최고의 피날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