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0)
10화. 노랑색 친구
범재는 가방에서 큰 비닐 하나를 쑥 꺼냈다.
비닐 안에는 웬 옷이 하나 들어 있었다.
사이즈를 봐서 나 입으라고 주는 건 아닌 거 같았다.
딱 봐도 여자 옷으로 보였으니까.
여자 옷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아마 원피스인 거 같았다.
‘연두한테 주는 거구나.’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예고해서 그런지 선물을 챙겨 온 모양이었다.
감동이네. 생판 남인데 며칠 봤다고 선물까지 챙겨주다니.
연두는 자기 선물인 줄도 모르고 내 옆에 붙어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원피스를 바라봤다.
그나저나.. 고민이 됐다.
마음은 고마운데 이걸 받아야 하는 건가?
“연두한테 잘 어울릴 거 같아서요. 이름도 연두니까 연두색 원피스로······”
그러고 보니 원피스 색깔이 연두색이구나. 센스 있네.
옆에서 다른 녀석들이 끼어들었다.
“행님, 사양하지 마십쇼. 범재 아빠 키즈 쇼핑몰 사장이거든요.”
“맞아요. 금수저 간지 지리네~”
“햐, 나도 범재처럼 살아보고 싶다..”
그러자 범재가 고개를 휙휙 좌우로 저으며 내게 해명했다.
“아, 아니에요! 이새.. 아니, 얘네 말 다 구라예요. 그냥 작은 쇼핑몰 운영하세요.”
“그렇구나.”
“어쨌든 사양 말고 받으셔도 돼요. 그거 되게 싼 거니까.”
“음.. 그래도 너무 미안한데. 아, 차라리 내가 값을 지불할게!”
어차피 연두를 위해 원피스 하나쯤은 구매할 필요가 있었다.
며칠 전 퇴근하며 연두가 입을 티셔츠와 바지를 몇 개씩 사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여자아이니까 예쁘게 입을 옷 하나쯤은 필요했다.
‘나는 여자아이 옷에 관해서는 잼병이라.’
어떤 걸 사서 입혀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기본 티셔츠와 반바지만 산 이유도 그래서였다.
허나 쇼핑몰 사장의 아들이라면 어느 정도의 안목은 있을 테고, 연두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라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제값을 줘서 구매하고 잘 입히기로 하자.
하지만 내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진짜 괜찮아요. 그렇게 되면 선물이 아니잖아요. 그냥 받아주세요.”
옆에서 동건이 녀석이 또 말을 보탰다.
“네, 행님. 그냥 받으십쇼. 범재가 아버지 몰래 간신히 빼돌린 건데······”
“아오, 안 빼돌렸다고! 울 아빠한테 지금 전화해 봐?”
“킥킥, 넝담~”
“씨이…”
하주연도 범재 놀리기에 동참했다.
“아저씨, 진짜 그냥 받으셔도 돼용. 범재가 학교에서 연두 줄 거라고 얼마나 자랑했는데요. 심지어 수업시간에 옷 흔들면서 자랑하다가 선생님한테 뺏길 뻔했다니까요? 선생님한테 오늘이 연두 마지막이라고 한 번만 봐 달라고 얼마나 애원하던지······”
“야, 이 또라이야! 그건 왜 말하는데!
녀석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또 웃음이 나왔다.
자초지종을 들으니 더 거절하기는 힘들 거 같다.
“고맙다. 나중에 형이 밥이라도 사 줄게, 범재야.”
“네.”
나는 건네받은 원피스를 연두의 손에 넘겨줬다.
“연두야. 네 옷이야.”
“.. 연두 옷이요?”
“응. 저기 범재 오빠가 연두 입으라고 선물한 거야. 오빠한테 고맙다고 인사할까?”
“네, 아빠!”
“흠.. 크흠..”
범재는 낯간지러운지 괜히 시선을 돌린 채 헛기침을 내뱉었다.
한편, 연두는 받은 옷을 테이블 의자에 내려놨다.
그리고는 냅다 범재를 향해 달려갔다.
‘저 움직임은······’
예상이 갔다. 달려가서 다리에 안기려는 것이다.
몇 번이고 나한테 그랬으니까 준비 동작을 잘 알고 있었다.
나 말고 누군가에게 안기는 건 처음인데.
뭐, 고마움을 표현하는 거니까 말리지 않기로 했다.
‘어..?’
그런데 내 예상이 틀렸다.
연두는 범재의 바로 앞에 멈춰 서서는 90도로 배꼽인사를 했다.
“고마씁니다, 오빠!”
그렇게 깍듯이 인사한 후, 연두는 오히려 내게 달려와 안겼다.
아, 혹시 이렇게 안기는 건 나한테만 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일주일간 여러 사람들과 접촉했지만 연두는 한 번도 안기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 거구나.’
별생각 없었는데 그 사실을 깨달으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오직 나한테만 하는 행동이라는 사실에.
‘근데 실망했으려나?’
범재가 조금 걱정이 됐다.
연두가 안길 줄 알았는데 실망한 거 아닐까?
나는 연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범재를 바라봤다.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네.’
범재는 내 생각과 달리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 하주연. 방금 진짜 장난 아니게 귀엽지 않았냐?”
“인정.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그냥 선물 가져올걸. 너랑 너무 차이 날까 봐 안 가져왔는데. 나도 연두 배꼽인사 받고 싶다, 힝…”
나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녀석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 생각보다 좋은 애들이구나?”
“뭔가 듣기에 이상한데요, 아저씨? 원래 저희를 어떻게 생각하셨길래…”
“솔직히 처음 봤을 때는 일진 뭐 그런 건 줄 알았지. 우르르 몰려다니길래.”
“헐, 너무해…”
아무래도 이 녀석들과 더 정이 들어버린 거 같다.
***
녀석들이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간 후,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슬슬 교대 준비를 하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사장님에게 걸려 온 전화였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시급 인상 얘기가 나온 이후로 사장님을 뵌 적이 없었다.
그다음 날, 사장님이 가족끼리 여행을 갔으니까.
세부에 간다고 했나?
이 시기에 가기 좋은 여행지라 들었는데 딱히 내 관심사는 아니었다.
해외는커녕 제주도도 가 본 적 없는 나니까.
틱.
“여보세요, 주원 씨?”
전화를 받자마자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왜 이렇게 텐션이 올라간 느낌이지?
평소보다 훨씬 흥분한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여행은 즐거우세요?”
“허허, 재밌어, 재밌어! 오랜만에 와이프랑 애들이랑 오니까 힐링되고 좋네.”
“다행이네요.”
“주원 씨도 와이프랑 애 데리고 세부 한 번 와. 애들 놀기도 무진장 좋다고!”
“… 하하, 시간이 된다면요.”
와이… 조금 찔리는 단어가 귀에 들어왔지만, 못 들은 거로 하자.
그때 사장님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아차!”
깜짝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사장님이 말을 이었다.
“내가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었는데. 주원 씨.”
“네, 사장님.”
“정신없이 노느라 며칠간 매출을 확인을 못 했는데, 오늘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주원 씨 근무시간에만 몇 배가 뛰었어?”
“.. 역시 그렇게 뛰었군요.”
“그렇다니까? 이럴 리가 없는데 하고 몇 번을 다시 봐도 몇 배가 뛰었더라고. 딱 주원 씨 근무시간에만.”
“사실······”
결국 나는 자초지종을 전부 설명했다.
손님의 대부분이 연두를 보러 온 사람들이라는 것.
특히 연두를 귀여워하는 학생들 덕에 매출이 급증했다는 것까지.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연두를 데려오지 않을 거라는 것도 이야기했다.
손님은 확 줄어들 확률이 높다는 것도.
내 이야기를 들은 사장님은 껄껄껄 웃음을 지었다.
“그랬구먼. 예쁜 공주님이 매출 증가의 원인이었어, 허허.”
“네, 고등학생 친구들이 영업을 해 줬거든요.”
“주원 씨도 대단하구먼.”
“제가요?”
“그런 딸아이가 있는 것도 능력이야. 앉혀만 뒀는데 5일 만에 매출이 몇 배가 뛰다니. 내 이런 경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니까? 하긴, 아기가 진짜 천사 같긴 했어.”
“에이, 아닙니다.”
“나중에 내가 보답으로 근사한 곳에서 밥이라도 한 끼 사지. 자네랑 연두랑. 그리고 시급은 내가 와이프랑 얘기를 해 봤는데······”
뭐지? 끝말을 늘이는 걸 보니까 갑자기 불안해지는데.
설마 이제 와서 못 올려준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긴장되는 상황,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부러 내가 밤에 와인 한 잔 걸치면서 분위기 좋을 때 이야기했거든. 자네 사정 얘기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와이프가 안 된다더군.”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불안한 예감이 진짜 맞아떨어지다니.
그때였다. 사장님이 신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 이 양반이. 약 올리는 건가?
“그런 친구가 있는데 그렇게 조금 올려주는 게 말이 되냐고 막 나한테 뭐라 하는데···?”
“.. 네?”
“그러니까.. 내가 말했던 인상 폭의 두 배로 올려줄 수 있을 거 같네.”
방금 말은 취소한다.
사장님은 천사다. 사장님 와이프는 더 천사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아니야, 허허. 연두 예쁘게 키우게. 가끔 데려와도 되고.”
그렇게 훈훈하게 전화통화가 종료됐다.
***
“아빠아..”
“응.”
“연두 이제.. 아빠랑 가치 못 와요?”
연두는 잔뜩 속상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이제 편의점이 아닌 어린이집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슬픈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까지고 편의점에 연두를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지금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애를 데리고 출근한다고 누군가 민원을 제기할지도 모를 일이고.
“그래. 다음 주부터 연두는 어린이집에 가야 해.”
“연두 어리니집 시러요. 아빠랑 가치 오면 안 대요? 오늘처럼…”
마음은 알겠지만 들어줄 수는 없었다.
“연두야.”
“네에..”
“어린이집 좋은 곳이야. 좋은 친구도 사귀고, 같이 놀고, 공부도 하고.”
“아빠가 조은데..”
“응?”
“친구보다 공부보다.. 연두는 아빠가 조은데…”
“하하, 아빠랑 헤어지는 거 아니야. 어린이집 끝나면 아빠가 데리러 갈 거고. 여기도 아빠랑 같이 또 오면 돼.”
“진짜요..? 또 올 수 이써요?”
“그럼, 진짜지. 그러니까.. 어린이집 잘 다닐 수 있지?”
“.. 네.”
“아유, 착하다. 우리 연두.”
보통 이렇게 말하면 활짝 웃는데 슬픈 표정이 가시지 않았다.
내 생각 이상으로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때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연두야.”
“네.”
“아빠랑 예쁜 거 보러 갈래?”
“예뿐 거요..?”
“응, 예쁜 거.”
연두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대답했다.
“네.”
나는 편의점에서 참치캔 하나를 챙겼다.
그리고 다음 알바생과 교대한 후, 편의점을 나섰다.
‘왼쪽 골목으로 돌아서.’
울타리가 나오는 길을 걸어가면 오른쪽에 풀이 우거진 장소가 나온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은 아니었다.
나도 우연한 일을 계기로 녀석을 발견한 거니까.
‘그러고 보니.’
연두가 오고 나서는 한 번도 오지 못했다.
잘 있겠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나는 다급히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연두도 내 손에 이끌려 함께 들어왔다.
나무 그늘 아래 만들어진 작은 집. 연두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내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누렁아. 나 왔다.”
그러자 귀에 익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냐앙~”
그렇게 집 안에서 노란색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발견해서 이름을 지어준 고양이 ‘누렁이’였다.
누렁이라 지은 이유는 간단하다. 색깔이 노래서.
갑자기 튀어나온 고양이에 연두가 깜짝 놀라 내 뒤로 숨었다.
“겁 안 먹어도 돼, 연두야. 착한 고양이거든.”
알바를 시작할 무렵 발견해서 자주 먹이를 주는 고양이였다.
참고로 이 집도 내가 만들어준 거다.
다행히 녀석의 마음에 드는지 애용하고 있었다.
“일로 와, 누렁아.”
그러자 누렁이가 다가와 내 손을 할짝할짝 핥았다.
이 녀석과 나는 매우 친한 사이였다.
“연두야. 괜찮으니까 한 번 만져 볼래?”
“마, 만저도 대요..?”
“응.”
“아, 안 무러요?”
“안 물어.”
“소, 손으로 때찌 안 해요?”
“하하, 안 해.”
연두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이번에는 누렁이가 연두의 손을 할짝할짝 핥았다.
“꺄아..!”
다행히 연두는 금세 경계를 풀고는 누렁이를 쓰다듬었다.
아까와 달리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누렁이 예쁘지?”
“헤헤, 네!”
“오늘은 누렁이 간식 주러 온 거야. 누렁이가 이거 완전 잘 먹거든. 연두가 줘 볼래?”
연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캔을 따서 연두의 손에 건넸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게 있다.
‘누구지?’
누렁이의 집 앞에는 사료통이 놓여 있었다.
안에 사료도 조금 들어있고. 오늘만 이런 게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누군가 누렁이에게 밥을 주기 시작했다.
“우아… 잘 머거요, 아빠!”
사료가 남아있어도 간식은 잘 먹는다.
사람에게 발견되기 쉬운 장소는 아니라 사료를 준 게 누군지 무척 궁금했다.
‘설마 예전의 그 녀석들은 아닐 테고..’
한편 연두는 누렁이가 많이 귀여운지 간식을 먹는 동안 계속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야말로 귀여운 애 옆에 귀여운 애다.
누렁이가 캔을 말끔히 비운 후, 내가 입을 열었다.
“연두야. 슬슬 돌아가자.”
오늘은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할머니 댁에 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빨리 출발해야 했으니까.
“누릉이는요..?”
“누렁이는 나중에 또 보러 오면 되지.”
“네!”
연두가 씩씩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런데 일어선 연두가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아빠아..”
“응.”
“아빠 뒤에.. 사람 이써요.”
그 말에 내가 고개를 돌렸다.
“.. 지혜 씨?”
손에 사료 봉투를 든 여자, 그녀는 놀랍게도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