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689)
689화. 살얼음판
“.. 어디 스튜디오인데?”
딱히 이상하게 여길 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할머니 입장에서 손녀의 촬영장소를 묻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으니까.
별다른 의도가 없어도.
“한영 스튜디오예요.”
그래서였다.
시은이 입에서 바로 대답이 나온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시은이에게 있어서 윤인주는 좋은 할머니였다.
다른 걸 전부 제쳐두고 생각해도, 윤인주는 시은이에게만큼은 그 누구보다 잘 대해줬으니까.
그 외의 모습들을 시은이는 알지 못했다.
“흐응, 그렇구나. 한영 스튜디오…”
그렇다고 시은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엄마와 할머니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항상 그게 궁금했다.
‘엄마.’
‘응, 시은아.’
‘엄마는 왜 할머니랑 사이가 안 좋아?’
그럴 때마다 엄마는 당황한 얼굴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에이, 안 좋은 거 아니야. 그냥 가끔 봐서 서먹서먹한 거지.’
‘그게 안 좋은 거잖아.’
‘…’
더 이상했다.
애틋한 사이라면 가끔 봤을 때 더 반가워하기 마련인데.
엄마와 할머니는 그 반대였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한 번은 더 대화가 이어진 적이 있었다.
엄마는 말했다.
‘사이가 나쁜 건 아니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엄마랑 할머니 생각이 조금 다른 거뿐이거든.’
‘생각이?’
‘응. 할머니가 바라는 엄마의 모습이랑, 엄마가 되고 싶은 엄마의 모습이 조금 다르다고 해야 하나..?’
왠지 모를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엄마는 덧붙였다.
‘.. 그걸 조금 늦게 깨달았고.’
‘왜 엄마가 할머니가 바라는 모습이 돼야 해?’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그게 사이가 나빠질 이유라는 것부터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인데.
그런 시은이를 향해 신세연은 말했다.
‘맞아. 그래서 엄마는 엄마로 살 거야. 할머니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 시은이 엄마 신세연으로.’
‘그럼 할머니랑 사이는?’
‘언젠가는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해. 아니, 올 거야.”
머리를 쓰다듬으며 신세연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할머니 미워하지도 말구. 할머니도 엄마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는 거니까.’
‘.. 응.’
그 뒤로는 물어보지 않았다.
엄마에게 들을 수 있는 답은 전부 들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였다.
지금 할머니에게 똑같은 질문을 할 생각이 든 건.
“할머니.”
“응.”
“왜 할머니는 엄마랑 사이가 안 좋아요?”
할머니의 대답도 듣고 싶었다.
만약 엄마가 한 말을 종합해서 타협의 여지를 찾아낸다면 화해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엄마니까.’
생각해 봤다. 어떤 이유로든 엄마와 거리가 멀어진다면 기분이 어떨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엄마와 할머니가 그런 사이라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괴로웠다.
들려오는 할머니의 답.
“엄마가 할머니 말을 듣지 않아서란다.”
왜일까.
그 한 마디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엄마와 할머니가 화해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틀어막히는 기분이라 해야 하나.
그런 마음도 모르고 할머니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전에 할머니가 했던 말 기억하니?”
“.. 어떤 말이요?”
“엄마가 할머니한테 삐진 게 있는 거 같다고. 그게 도통 풀릴 기색이 안 보이니 할머니가 얼마나 답답하겠니.”
점점 답답해지는 건 시은이 마음이었다.
“올바른 길이 떡하니 앞에 놓여있는데, 그대로 가기만 하면 되는데 삐딱선을 타니..”
엄마는 얘기했다.
사이가 나쁜 이유는 서로의 생각이 달라서라고, 언젠가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그러나 할머니는 달랐다.
‘엄마가 말을 듣지 않아서.’
그게 이유였다.
그렇다면 엄마와 할머니가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엄마가 말을 듣는 것.
아니, 그게 진정한 화해라고 할 수는 있는 걸까.
“뭐, 아무튼! 엄마가 정신을 차리면 사이도 자연스럽게 좋아질 거란다! 우리 시은이랑 할머니 사이처럼!”
늘 예뻐하던 할머니가 멀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드림 큐!’의 일러스트 작화에 착수한 스튜디오 초록.
사각. 사각.
예상은 했지만 시작이 쉽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일러스트를 그리기 이전에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하는 건 2D 일러스트 그림체 파악이었다.
유독 애를 먹는 팀원이 있었다.
바로 서도연이었다.
“하아..”
기복이 없는 게 최대 강점인 그녀였다.
홍원대에서 수석을 한 것부터 그 부분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의문이 들 터였다.
왜 서도연이 가장 힘들어하고 있는 건지.
‘간단해.’
그 안정성이 독이 되는 과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미 서도연은 ‘좋은 그림’에 대한 기준이 그 누구보다 굳게 확립되어 있었다.
고정된 이미지로.
쉽게 말하면 정해진 틀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 틀을 깨야 되고.’
2D 일러스트는 일반적인 상식에 반하는 요소가 많았다.
틀을 깨야 한다는 의미다.
서도연과 달리, 선우영과 한경우는 틀을 쉽게 깰 수 있는 팀원들이었다.
애초에 밥 먹듯이 틀을 깨는 친구들이다 보니.
“흐흐, 유나짱…”
심지어 한경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림을 그린다.
이 정도면 광기였다.
결과물을 보면 괜히 과몰입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할 말이 없긴 하지만.
우영이도 마찬가지였다.
‘걱정했는데.’
처음에 탐탁지 않아 했던 것도 그렇고, 새로운 그림체에 적응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바로 적응한 건 아니었다.
처음에 내 얘기를 듣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지.
‘아니, 형. 그렇게 그리면 인체 비율이 안 맞잖아요.’
‘뭐라고요? 아무리 캐릭터라도 사람을 그리는 건데 어떻게 코를 안 그려요? 숨은 어떻게 쉬라고.’
‘아니……’
끝없는 반박.
말없이 나는 몇 개의 일러스트를 보여줬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하나하나 훑어보던 우영이는 입을 뗐다.
‘그러니까.. 이게 잘 그린 일러스트라는 거죠?’
‘맞아.’
반응에서 보다시피 큰 차이가 있었다.
흔히 미술학도가 추구하는 미(美)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들투성이였으니까.
허나 우영이는 금방 적응해냈다.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 거 같아요.’
그렇다.
유연함이 무기인 한경우와 우영이는 비교적 변화에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서도연은 달랐다.
긴 시간에 걸쳐 굳어진 틀을 깨는 건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저기, 도연님.”
“네.”
“눈을 좀 더 크게 그려야 할 거 같은데요. 캐릭터 설정 보면 똘망똘망한 눈이 특징이라 적혀있기도 하고.”
최표식의 말이었다.
딱히 훈수를 두는 느낌은 아니었다.
작화팀 내에서 업무적으로 가장 합이 잘 맞는 둘이었으니까.
서도연의 입이 벌어졌다.
“.. 이거보다 더 크게요?”
“네.”
멋쩍은 표정으로 최표식은 덧붙였다.
“저도 적응이 쉽지 않긴 한데, 딱히 눈이 크다는 묘사가 없어도 저는 이 정도 크기로 그렸거든요. 캐릭터 일러스트는 이런 그림체를 추구하는 거 같아서.”
“아…”
납득한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표식의 말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예시가 있으니까.
‘알 거 같아.’
대충 감이 왔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손이 거부하는 느낌이겠지.
그릴 때마다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들 테고.
오래전부터 블로그를 통해 그녀의 그림을 봐 온지라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스윽.
서도연은 다시 처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찾아온 휴식 시간.
커피를 들고 스튜디오를 나선 그녀를 따라간 나는 말했다.
“쉽지 않죠?”
흠칫 놀란 서도연이 고개를 돌렸다.
“아, 초록님.”
그녀는 힘없는 미소를 띠며 얘기했다.
“조금 답답하긴 하네요.”
“어떤 점이요?”
“저 자신이요. 우영이, 아니 우영님이랑 경우님, 그리고 표식님도 금방 적응해서 그리고 있는데.. 저만 뒤처지고 있는 거 같아서요.”
역시 그랬구나.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뗐다.
“그래요?”
“네?”
“저는 다르게 생각하는데.”
의아함에 눈을 깜빡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연님이 제일 단단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단단하다구요?”
“네. 그림에 대한 스스로의 기준이 제일 엄격해서 변화에 적응하는 시간이 비교적 느린 거죠.”
실제로 마음속으로 하는 생각이라 그런지 말이 술술 나왔다.
“그런 만큼 적응하기만 한다면 이번 프로젝트의 에이스는 도연님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아, 그렇다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부담 갖지는 말구요.”
팀이니까요.
짤막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런 내 말에 서도연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떠올랐다.
“.. 감사해요, 초록님.”
***
촬영날이 다가왔다.
고대하던 촬영날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선동이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딘가 울적한 기분.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돌아가야 하잖아.’
촬영이 끝나면 돌아가야 한다.
애써 부정하고 있었지만 더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바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도, 길어봐야 며칠 안에는 집으로 돌아가겠지.
어제 슬쩍 할머니한테 얘기해봤다.
‘할머니.’
‘왜.’
‘방학 끝날 때까지만 여기 있다 가면 안 돼요?’
실은 알고 있었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이놈의 새끼가 누구를 더 고생시키려고!’
그 뒤로 선동이는 쭉 처진 상태였다.
멋지게 촬영을 끝내려면 힘을 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힘이 나지 않았다.
옷을 입고 터덜터덜 걸어 나온 선동이를 본 연두가 말했다.
“선동이오빠, 아파여..?”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선동이가 대답했다.
“.. 아니, 괜찮아.”
걱정스러운 연두의 표정.
그럴 만도 했다.
늘 밝고 에너지 넘치던 선동이오빠의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결국 한 번 더 물었다.
“진짜.. 진짜 괜찮아여..?”
“괜찮다니까.”
다소 예민한 반응.
그 뒤에는 중얼거리듯 한 마디가 이어졌다.
“잊어버릴 거잖아.”
“.. 으응?”
“내가 집에 돌아가면, 너도 날 잊어버릴 거잖아.”
그렇게 말한 선동이는 연두를 뒤로하고 돌아섰다.
큰일이었다.
이미 비운의 남주인공에 빙의한 선동이였다.
“…?”
연두의 얼굴에는 물음표가 떠오를 뿐이었다.
뒤늦게 준비를 마치고 걸어 나온 주원은 보지 못한 장면이었다.
주원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가 볼까?”
바로 출발했다.
차를 타고 스튜디오로 향하는 내내 선동이는 말이 없었다.
“선동이 어디 아프니?”
결국 주원도 연두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어디 아프냐는 말.
“.. 아니요.”
대답과 달리 아픈 곳이 존재했다.
마음이 아팠다.
집에 돌아가면 또 따분한 시골에서의 생활이 반복될 걸 알았으니까.
선동이에게 서울은 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상태도 마냥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그래. 어디 아픈 곳 있으면 참지 말고 말하고. 촬영은 오늘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거니까.”
순간 생각했다.
꾀병을 부려 촬영날짜를 미뤄볼까 하고.
허나 단념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고, 조금 미룬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거 같지도 않았으니까.
바꿀 수 있는 건 없었다.
“괜찮아요.”
금방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건물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줄리와 레나, 그리고 노엘도.
스르륵.
휠체어를 타고 오는 노엘.
이 녀석이랑도 오늘이 마지막이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일어나서 인사하려던 선동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또 그 웃음이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 나쁜 웃음.
“Hallo, guten Morgen.”
게다가 알 수 없는 독일어까지.
선동이가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까지 무시하는 거냐고.’
노엘도 알고 있을 터였다.
오늘이 지나면 한동안 볼 일은 없을 거라는 걸.
평소라면 큰소리 한 번 치고 넘겼을 일이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감정적이 된 선동이였다.
결국 입 밖에 해서는 안 될 말이 나갔다.
“적당히 무시하라고. 내가 입은 옷이 너보다 훨씬 잘 팔린 건 알고 그러는 거냐?”
삽시간에 공기가 얼어붙게 만드는 한 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