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857)
857화. 부산 싸나이
대단한 스피드다.
한참 전에 시작한 내가 긴장해야 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수첩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냥 노가다잖아요.’
웃음이 나왔다.
그 노가다를 누구보다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나저나 뭘 그리는 걸까.
수첩 컷 만화 특성상 많은 장면을 담는 건 어려웠다.
왜냐고?
원리 자체가 반복되는 그림을 통해서 장면이 이어지게 만드는 거니까.
‘처음에 너무 어려운 걸 그려도 곤란하지.’
그 말은 매 페이지에 어려운 걸 그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최대한 간단하게 그릴 필요가 있었다.
이를테면……
‘졸라맨.’
그렇다.
3초면 그릴 수 있는 졸라맨을 채택하는 게 컷 만화에는 최적이었다.
학창 시절의 나 역시 그랬다.
그때 내가 그린 건 졸라맨 두 명의 난투극이었다.
설정은 간단하다.
서로를 죽여야 한다는 숙명을 가진 두 졸라맨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혈전을 펼치는 거다.
졸라맨의 이름은 팬과 맥이었다.
‘총도 쏘고, 폭탄도 던지고, 바주카포도 쏘고.’
장소는 내 교과서 속이었다.
두 졸라맨은 실력이 비슷한 살수여서 나는 그 시리즈를 꽤나 장편으로 연재했다.
인기도 엄청 많았다.
쉬는 시간만 되면 친구들이 내 교과서를 가져가서 돌려 볼 정도였으니까.
결과는 어떻게 됐냐고?
‘둘 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
최강의 살수인 팬과 맥보다 강한 인물이 있었다.
그건 바로 수학 선생님이었다.
수업 시간마다 몰래 만화를 그렸다는 게 발각됐고, 교과서를 빼앗긴 나는 새로운 교과서를 부여받았다.
나는 의지를 잃었다.
모든 걸 쏟아부은 팬과 맥이 한순간에 사라졌으니까.
마치 유성초 스나이퍼 시절에 나무젓가락총을 전부 뺏기고 삶의 의지를 잃었을 때와 비슷했다.
‘아, 담탱이 진짜……’
‘퀄리티 보면 그냥 봐 줄 만도 한데.. 하필이면 수학한테 걸리냐.’
‘다시 그려주면 안 되냐?’
아쉬움이 담긴 친구들의 말에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그릴 자신이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그린다고 해도, 과거의 나를 이길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때는 생각했다.
팬과 맥을 다시 그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사각. 사각.
그런데 아니었다.
내 손끝에서 팬과 맥이 다시 부활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또 수첩 속에서 사생결단을 벌이는 건 아니었다.
이제 그 시절의 팬과 맥은 없다.
‘너무 잔인해.’
학창 시절에 그린 팬과 맥의 혈투는 잔인했다.
창칼로 마구 난자하고, 팔 한쪽이 날아가고, 피 분수가 터지는.. 말 그대로 혈투였다.
완성하면 연두에게 줄 생각으로 그리기 시작한 만화다.
폭력적인 장면은 금지였다.
대신에 나는 팬과 맥을 절친이자 사랑꾼으로 변신시켰다.
웬 사랑꾼이냐고?
만화 속에는 팬과 맥 말고도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역시 졸라맨이긴 하지만 세계관 최고의 미녀이자 천사 같은 마음씨를 가진 공주님이었다.
이쯤 묘사했으면 눈치를 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공주님은 바로 연두였다.
‘그 구도로 펼쳐지는 이야기지.’
팬과 맥은 연두 공주님을 흠모한다.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공주에게 다가가고 끝내는 사랑을 고백한다.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고, 소시지도 선물하고, 오다 주웠다는 멘트와 함께 꽃다발을 건네기도 한다.
핵심은 마음을 전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데 있었다.
‘똑같으면 재미없으니까.’
왜 그렇지 않은가.
드라마만 생각해도 메인남주와 서브남주 성격이 같다면 보는 재미가 없다.
그래서였다.
팬과 맥의 캐릭터성을 다르게 잡은 건.
차이를 꼽자면 메인남주와 서브남주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거다.
둘 다 메인남주다.
따로 내가 더 아끼는 남주도 없다.
‘결말은 나도 모르고.’
실제로 다 그리고 나면 결말을 비워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연두한테 보여주는 거다.
연두가 둘 중 누군가의 손을 잡는다면 결말이 탄생하겠지.
둘 다 선택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 또한 하나의 결말일 테고.
아, 참.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이건 판타지였다.
순전히 재미를 위해 그리는 그림이라는 거다.
실제와는 조금도 연관성이 없었다.
연두를 흠모하는 팬과 맥이 실존한다면, 가장 먼저 나라는 벽부터 넘어야 할 테니까.
어쨌거나 나도 그림에 박차를 가했다.
사각. 사각.
빠르게 진행되는 진도.
미리 짜 놓고 그리는 게 아니기에 더 재미있었다.
몰입이 됐다.
팬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면, 질세라 맥이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간다.
그야말로 장군 멍군이다.
“흐흐.”
학창시절 즐거움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뿌듯한 표정으로 수첩을 바라보다가 나는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절로 입이 벌어진다.
‘대단한 집중력이네.’
아까 그 자세에서 조금도 변동이 없었다.
실소와 함께 입을 뗐다.
“우영아.”
그제야 녀석이 반응한다.
“네.”
“얼마나 그렸어?”
“꽤요. 절반은 채운 거 같은데.”
스피드도 장난이 아니었다.
내가 좀 더 앞서는 거 같긴 하지만 대충 비슷하게 완성할 거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중간 점검 한 번 할까?”
중간 점검 시간이었다.
***
원리는 간단해 보이지만 이것도 몇 가지 팁이 있었다.
아까 말한 졸라맨도 그렇고.
소재를 정하는 게 절반 이상일 정도로, 의외로 전수할 팁이 많은 형식이었다.
그 꿀팁을 전수해 줄 생각이었는데 우영이는 말했다.
‘아뇨. 한 번 보면 알죠. 바보도 아니고.’
항상 그랬다.
우영이는 스스로 해결책을 찾는 타입이었다.
궁금했다.
이번에도 해답을 찾았을지, 만약 찾았다면 어떤 방식으로 해답을 향해 나아갔을지.
“근데 생각보다 재밌어하는 거 같은데?”
“재밌어요.”
쿨하게 인정한다.
“뭔가 불량식품 같은 맛이라 해야 하나.”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될 비유를 덧붙이긴 했지만.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맛있잖아, 불량식품.”
“그쵸.”
“내 건 차카니로 할게.”
차카니는 내가 제일 좋아했던 불량식품이었다.
우영이는 바로 받아쳤다.
“저는 콜라볼로 할게요.”
“하하, 그래.”
콜라볼.
백 원에 무려 수십 개를 먹을 수 있었던 가성비 좋은 녀석이다.
소리 내어 웃으며 물었다.
“어디 콜라볼 좀 먹어볼까?”
녀석이 수첩을 건넸다.
늘 그렇듯 그림을 보여주는 데에 있어서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는 우영이였다.
수첩을 건네받은 나는 첫 장을 바라봤다.
“엥?”
나는 눈을 깜빡였다.
첫 페이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 페이지부터 시작하나 하고 넘기려는데, 미처 보지 못한 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콩알보다 작은 점이었다.
‘설마 이게 스타트?’
의문 속에서 나는 수첩을 엄지와 검지로 잡았다.
어차피 이 만화를 보는 방식은 정해져 있었다.
빠른 속도로 휘리릭 수첩을 넘기며, 눈앞에 펼쳐지는 만화를 감상하는 거다.
기대감 속에 나는 수첩을 넘기기 시작했다.
스르륵.
바로 알 수 있었다.
첫 페이지에 찍혀있던 점 하나가 실수로 찍은 게 아니라는 걸.
절로 입이 벌어졌다.
“오오오!”
시작은 점이었다.
파밧-
그 점이 팽창하기 시작한다.
마치 작은 점 안에 갇혀있던 물질과 에너지가 팽창하는, 소위 말하는 빅뱅 같았다.
비주얼적으로 전해지는 쾌감이 상당했다.
‘그리고 효율적이야.’
점 하나에서 시작한다는 건 그만큼 초반부를 그리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벌써 절반 이상을 그린 상태였으니까.
후반부로 갈수록 시간이 많이 소요되긴 하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완벽히 파악했어.’
원리는 완벽하게 파악하고 채택한 소재라는 게 느껴졌다.
리스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에 있어서 우영이의 이해력은 무척 뛰어났다.
작화팀 업무에 있어서도 누구보다 빨리 프로젝트에 적응하는 것도 그런 유연함 덕분이겠지.
눈 깜빡할 새에 끝나버리긴 했지만 재미있었다.
“장난 아닌데? 뭘 뜻하는 거야?”
“별거 아니에요.”
우영이는 툭 내뱉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뭐, 그런 거죠.”
단순하지만 명확한 소재였다.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우리 작화팀의 미래인가?”
“그건 당연한 거고요.”
완성하고 보면 쾌감이 배가 될 거 같았다.
점점 규모가 커지고 화려해지는 게 우영이 만화의 묘미이니 말이다.
한 번 더 휘리릭 보고 나니 우영이가 말했다.
“주세요.”
“응?”
“저도 먹어야죠, 차카니.”
우영이의 말에 웃으며 차카니를 건넸다.
“내 거는 스토리가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이 엄지와 검지로 수첩을 잡았다.
휘리릭 넘어가는 수첩.
내 눈에 들어왔다. 살짝 올라가는 우영이의 입꼬리가.
“그러니까 얘가 땅콩인 거죠? 이 긴머리 졸라맨.”
긴머리 졸라맨이 연두라니.
조금 연두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사실이었다.
“맞아.”
“옆에 있는 애들은요?”
“가상 인물. 팬이랑 맥인데 연두를 좋아하는 애들이지.”
다시 한번 만화를 본 우영이는 말했다.
“재밌네요.”
극찬이었다.
뿌듯한 얼굴로 나는 물었다.
“진짜? 연두가 좋아할 거 같아?”
“아마도요.”
“좋아.”
의지가 불타오른다.
나는 다시금 손에 펜을 쥐었다.
“.. 오늘 안에 완성한다.”
어서 나도 만화의 결말을 보고 싶었다.
나도 모르는 결말을.
***
한편 그 시각.
연두는 교장실에 있었다.
홀짝.
차 마시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교장 강덕호.
허전했던 그의 공간은 이제 선화초등학교 아이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똑. 똑.
이제는 문 두드리는 소리만으로 설렘을 느끼는 그였다.
문을 열면 항상 연두가 있었다.
빼꼼 고개를 내밀고 들어가도 되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연두가.
“안녕하세여..”
초기와 달라진 점이 있었다.
연시레가 전부였던 학기 초와 달리 이제는 드나드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늘 친구들을 데려오는 연두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지우야.’
‘응.’
‘내일 쉬는 시간에 교장실 놀러가자..!’
지우의 포섭은 동아리실에서 이루어졌다.
지우는 거의 기겁하다시피 했다.
‘교, 교장실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우에게 교장 선생님은 너무 먼 존재였으니까.
늘 반갑게 인사해주시기는 했지만, 교장실에 놀러 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지우뿐만이 아니었다.
강덕호의 노력과 별개로 교장 선생님이라는 지위 자체에서 오는 거리감이 있었다.
‘호, 혼날 거야……’
‘아니야!’
그런 지우에게 연두는 말했다.
‘교장 선생님은 지우가 놀러 가면 좋아하셔!’
‘조, 좋아하신다구?’
‘응. 맛있는 차도 타 주고.. 신기한 이야기도 엄청 많이 해주고……’
연두가 교장실을 자주 찾는 이유 중 하나였다.
강덕호는 여러 분야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러고선 말했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해줄게!’
그럴 때마다 재밌게 듣던 아이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떠오르곤 했다.
사실 그건 강덕호의 전략이었다.
다음에도 오게 만들려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아이들이 발길을 끊을 일은 없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같이 가자..’
‘그, 그래도……’
결국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벌써 한참 전이었다.
이제는 지우도 교장실을 찾는 정규 멤버로 한 자리를 확실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어서 오렴!”
기다렸다는 듯이 강덕호는 아이들을 맞이했다.
오늘은 총 다섯 명이었다.
연시레, 월이, 그리고 지우까지.
“오늘은 레몬티란다.”
“와아!”
레몬티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차 중 하나였다.
홀짝홀짝.
차를 마시는 아이들을 보며 강덕호가 입을 뗐다.
“오늘은 별일 없었니?”
그 물음에 한 아이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바로 연두였다.
뭘 말하려는 건지 벌써부터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 선생님.”
“응.”
“부산 가 보셨어여..?”
강덕호의 눈썹이 꿈틀했다.
“부산?”
“네.”
배시시 웃으며 연두는 얘기했다.
“아빠랑 같이.. 부산에 가기로 했어요..”
연두는 자그맣게 덧붙였다.
“국밥이 훨씬 더 맛있는 부산……”
그때였다.
아이들의 귀에 꽂히듯 한 글자가 들려온 건.
“마.”
“.. 으응?”
“국밥 조오치. 또 부산 하면 밀면 아이가!”
주원과는 달랐다.
귀에 착착 달라붙는 로컬의 향기를 풍기는 찰진 사투리.
그렇다.
강덕호는 부산 사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