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128
제129화
조용했던 회장은 생각보다 빨리 소란스러워졌다.
방송국 카메라들이 철수해 체면을 신경 쓰지 않게 되자 사람들은 제대로 즐기기 시작했다.
먹고 마시고,
마시고 먹고.
다들 왁자지껄 떠들며 분위기에 취해 갔다.
나와 태천이도 열심히 즐겼다.
온 마음을 다해 테이블 위에 빈 그릇의 산을 쌓았다.
산을 쌓는 일은 방해자들이 올 때까지 진행됐다.
한재임이 작은 목소리로 도희를 불렀다.
“…도희야.”
“네. 봤어요.”
용건을 말하지 않았지만 왜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릴 포함해 회장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모였기 때문이다.
알레딩 밀러.
그녀가 도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막심 스미르노프도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이유는 역시 태천이일 것이다.
공항에서 이곳으로 올 때까지 함께 했으면서 또 찾아오다니….
그렇게 할 얘기가 많은 걸까.
나는 리롄제의 시선에 몸 둘 바를 몰라 게임이나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백도운.”
한재임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바라보자 손을 빠르게 위쪽으로 휘젓는다.
일어나란 손짓이다.
“눈치 챙겨.”
“아니, 안 그래도 돼요. 그렇죠?”
“그럼. 너나 도운이가 비켜줄 필요 없어. 같이 있고 싶지도 않고. 저거 빤히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안 해.”
어라?
리롄제도 그랬는데….
아니, ‘그랬는데’라는 말은 틀렸다.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었으니까.
밀러나 스미르노프처럼 내 쪽으로 오진 않았지만, 시선만큼은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안 돼.”
한재임은 비켜줄 필요가 없다는 말에 감동한 듯했다.
그렇다고 생각이 바뀌진 않았다.
단호한 거 보소.
“차에선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하고 싶은 얘기를 못 한 걸 수도 있어.”
어?
그럴듯한데?
리롄제도 그래서 날 빤히 쳐다보기만 한 걸지도….
아니, 새싹이가 도망치라고 경고한 걸 보면 그건 또 아닌가.
“백도운.”
“후우. 알았어, 인마. 그만 보채.”
할 얘기가 있다면 비켜줘야겠지.
나와 한재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희와 태천이 미안한 듯 말했다.
“오라버니, 정말 안 비켜줘도 되는데요….”
“그래. 그냥 앉아 있어. 쟤네 보고 서 있으라고 하면 되잖아.”
“마스터, 제발 되지도 않는 소리 좀 하지 마십시오.”
한재임이 태천의 말을 뭉갰다.
그래, 이점에 있어선 한재임 말이 맞다.
이런 만찬장에서 밀러와 스미르노프를 서 있게 하는 건 여러모로 좋은 모습이 아니다.
“근처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불러. 뭐, 별일 없겠지만.”
“알았어요….”
“미안해.”
“괜찮아.”
그런 후 나와 한재임은 바로 테이블을 떠났다.
곧 밀러와 스미르노프가 테이블에 앉았다.
밀러는 한재임이 앉았던 자리, 스미르노프는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
“…….”
함께 일어났다고 해서.
함께 테이블을 떠났다고 해서.
한재임과 단둘이 있을 생각은 없었다.
녀석도 마찬가지다.
손을 뻗어 한 테이블을 가리킨다.
“난 이쪽.”
“그래. 난 저쪽으로 가마. 다신 보지 말자.”
“제발 그러고 싶다.”
그리 말하고는 한재임은 가리켰던 테이블로 걸어갔다.
제법 친한 사이였는지 보자마자 그들은 웃거나 어깨를 두드려댔다.
흠. 또 혼자가 됐군.
예전처럼.
[세계수 어린나무는 관리인이 혼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린나무는 자신이 함께 있다고 말합니다.]하하, 그래.
나한테는 새싹이 네가 있었지.
나는 새싹이를 어루만지며 만찬장을 빠져나갔다.
***
우연후는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S급 헌터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하고 있어서였다.
밀러와 스미르노프는 각각 백도희와 이태천을 만나고 싶다는 인터뷰를 남겼으니 이해가 갔다.
그가 의문을 느낀 건 리롄제 때문이었다.
리롄제가 백도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운 씨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그런 생각이 들 때쯤 S급 헌터 2명이 일어났다.
바라보던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몇 초 후, 도운이 한재임과 일어나 테이블을 떠났다.
“음? 아. 자리를 비켜주시려나 본데.”
“어, 그럼 이곳으로 부를까?”
“좋지.”
동생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오주한을 바라봤다.
오주한은 만찬장에 어울리는 고급 예복을 입고 있었다.
동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은 복면도 쓰고 있었다.
“나도 상관없어.”
“만장일치군.”
우연후가 일어나고자 의자를 뒤로 뺐다.
하지만 그보다 우채연이 더 빨랐다.
그녀는 손을 뻗어 우연후의 손목을 붙잡고 일어났다.
“앉아 있어, 오빠. 내가 데리고 올게.”
“아니. 내가 가. 도운 씨랑 할 얘기도 있고.”
“내가 간다니까.”
“……?”
얘가 왜 이래?
고개를 갸웃거리며 동생을 바라본다.
우채연은 빙긋 미소를 지은 채 오빠를 바라봤다.
미소를 본 우연후는 오싹함을 느꼈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내가 가. 오빠.”
“…그래. 알았다.”
우연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생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그녀와 17년을 함께 산 오빠로서 지금 동생의 의견에 따르지 않으면 한동안 그녀에게 시달리게 된다는 경고를 울려댔기 때문이다.
“고마워! 역시 오빠야!”
라고, 고마워하면서도 우채연은 여전히 입으로만 웃었다.
“…….”
우연후는 사뿐사뿐 떠나가는 우채연을 바라봤다.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오주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만찬회인데, 복면은 좀 벗지 그러냐.”
“동생한테 뺨 맞고 친구한테 화풀이 금지요.”
“…….”
“동생 빼앗긴 것 같은 처량한 오빠 표정도 금지. 친구로서 한 대 후려칠뻔했어.”
“…너무하네.”
“이거나 좀 먹어.”
오주한은 생선 스테이크를 건넸다.
우연후는 몇 초간 바라보다가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먹을 것을 앞에 둔 사람답게 행동하기로 한 것이다.
“오. 괜찮네. 이거 무슨 생선이지?”
“몰루? 이태천이 이걸 거덜 내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
“거덜 낸다고?”
“저기.”
오주한이 검지를 뻗어 이태천을 가리켰다.
이태천은 그 말마따나 생선 스테이크를 거덜 낼 생각인 듯 먹어 치우고 있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스미르노프를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옆에서 활발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여자와 비교하면 부러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생선 좋아하나 보네.”
우연후는 중얼거리며 생선 스테이크를 또 한 젓가락 먹었다.
***
복도는 회장과는 달리 고요했다.
을씨년스러움마저 느껴질 정도다.
굉장히 밝은 데도 고요하다는 이유로 그런 느낌을 느끼는 건 아마 옛날 생각이 나서일 거다.
내가 애초에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구만.”
복도를 혼자 걷는 동안 자연스레 한탄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혼자가 되는 건, 보육원 시절부터 흔한 일이었다.
보육원 녀석들은 도희와 태천이를 좋아했다.
예쁘고 잘생긴 누나 형이 잘 대해주니 싫어할 수가 있을까.
한재임도 그런 아이 중 하나….
아니, 겨우 아이 중 하나가 아니다.
가장 시간을 많이 빼앗았던, 또 현재 진행 중인 악의 수괴라고도 볼 수 있었다.
반대로 한재임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내가 악의 수괴였겠지만.
우웅.
화면을 두드리던 오른손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또 김재식과 지상욱이 메시지를 보냈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화면에 떠오른 발신자는 유재이였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통화 괜찮아?
“어. 지금은 괜찮아.”
다들 먹고 마시기 바쁘다.
나는 환영단이면서도 경호 업무를 맡고 있었지만, 잠깐 빠진다고 해서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회장 안에는 나보다 강한 인간들이 득시글하니까.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알아서들 처리하겠지.
특히 태천이가 발 벗고 나설 거다.
휩쓸려서 도희랑 한재임도 나설 거고.
– TV 잘 봤어. 잘생겼던데.
“갑자기 웬 칭찬?”
– 당신 말고. 당신 친구.
“아….”
그럼 그렇지.
나한테 잘생겼다고 말할 리가 있나.
뭐, 태천이 잘생기긴 했다.
세계적인 미남으로 꼽히는 스미르노프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로.
내겐 태천이 얼굴이 더 낫다.
“그런 농담이나 하려고 전화한 건 아닐 테고.”
– 농담 아닌데. 당신이랑 같이 있으니까 더 잘생겨 보이더라.
“……무슨 일 있어?”
– 아니. 아무 일도 없어.
뭐지.
진짜 농담하려고 전화한 거?
왜 하필 해도 이런 재미없는 농담을?
나도 내가 태천이에 비하면 못생긴 거 아는데….
자긴 예쁘다고 나 무시하는 건가.
– 왠지 모르겠는데 지금 당신한테 전화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기분?”
– 어. 그러지 않으면 여우한테 빼앗길 것 같았달까?
“…내가 개구리 반찬이야?”
유재이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여우가 왜 나온담.
– 뭐, 됐고.
“됐다니….”
– 전화한 건 당신 친구 때문이기도 해.
유재이는 대수롭지 않은 듯 화제를 전환했다.
그것도 태천이 이야기로.
“태천이는 왜?”
– 방패 말이야. 다 만들었거든.
“벌써?”
솔방울 맡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완성됐다고?
아르카도 금세 만들긴 했지만….
유재이는 아르카를 “이 자체로 무기로써 완벽해”라고 했었다.
그만큼 건드릴 부분이 적었으리라.
– 수정이가 도와줬어.
“어라. 수정 씨도 장비 제작도 할 줄 알아?”
– 응. 처음… 나 일 시작할 때 도와준 적이 있었거든.
“아하.”
유재이는 아버지가 실종된 후 혼자서 컸다.
나처럼 믿을만한 친구가 있었다는 게 참 다행이다.
그런 친구가 없었다면….
나나 유재이는 어떻게 자랐을까.
아마 지금처럼 자라지는 못했을 듯싶다.
– 웬만한 대장장이보다는 나은 편이야. 내가 잘 가르쳤지.
“고생했겠네.”
– 별로. 수정이가 이해가 빨라서 쉬웠어.
“아니, 수정 씨 말이야.”
– 뭐?
“옆에서 당신 돕는 게 쉽지는 않았을 거 같아서.”
– …….
좋아.
한 방 먹였다.
이게 나와 태천이 얼굴을 비교한 대가다.
하하!
– …방패 어떻게 할래?
유재이는 또다시 화제를 바꿨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본론으로 되돌린 것이다.
태천이의 방패 이야기로.
– 찾으러 올 거야? 아니면 배달?
“배달로 부탁해.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는 이쪽 일에 붙어 있어야 할 것 같아.”
– 오케이. 어, 내일 있을 곳 말해줄래?
“아직 일정이 정해지지 않아서 말해줄 수가 없네. 정해지면 문자로 보낼게.”
– 알았어.
“…….”
– …….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음.
[세계수 어린나무는 두근거린다고 전합니다.]갑자기 왜 두근거려….
방주 보육원에서도 그렇고, 새싹이 가끔 주책을 떨 때가 있어?
[어린나무는 이런 두근거림이 좋다고 전합니다.]“…….”
– 안 끊어?
“음. 끊어야지.”
– …….
“흠, 흠. 좋은 밤 보내.”
– 당신도. 술 많이 마시지 말고.
걱정하지 마.
많이 마셔도 안 취하니까.
새싹이 덕분에 술을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몸이 됐거든.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짧게 요약해서 대답했다.
“어. 그럴게.”
– …….
“…….”
또 침묵이 흐른다.
유재이의 숨소리만 수화기에 몇 번 들렸다.
숨소리가 듣기 좋아 가만히 듣고 있는데, 통화가 뚝 끊겼다.
통화가 끊긴 스마트폰 화면에 새싹이가 떠올랐다.
푸르게 빛나는 새싹이는 왠지 날 향해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린나무는 끊긴 통화에 실망을 내비칩니다.]“이런 거로 실망하지 말아 줄래?”
아니, 같은 게 아니다.
새싹이는 지금 웃고 있었다.
태천이처럼 날 놀리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흠, 흠…!”
헛기침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46층.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나는 어느새 회장에서 2층 아래층까지 내려와 있었다.
다시 올라가 봐야 있을 곳도 없다.
이 층에서 시간을 좀 보내고 올라가야겠다.
나는 가까이 있는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은 불이 꺼져 있어 어두웠다.
하지만.
“…….”
사람이 있었다.
미국의 또 다른 S급 헌터.
에디탓 그위친.
그가 유리 창문 앞에 정좌하고 앉아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양반 여긴 언제 왔어?
나 나올 때만 해도 회장에 있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