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499
제501화
“…….”
“…….
“…….
조용한 침묵이 흐른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협곡 너머의 거인이 된 스미르노프도,
하늘의 크라우드도, 멍한 눈을 뜬 채로 두 팔을 들어 올린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음….
이렇게 있다간 도희한테 한 소리 들을지도 모르겠는걸?
그렇다면 먼저 선수를 쳐야겠지.
“너 뭐하냐?”
해골에게 따져 묻는다.
내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은 걸까?
새카만 놈의 얼굴이 와락 찌그러졌다.
피부도 없는 검은 해골인 주제에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그대로 드러난다는 게 좀 웃겼다.
해골이 떠듬떠듬 대답했다.
“그 말은… 내가, 해야 할 말인 것 같다만…?”
자기가 할 말인 것 같다고?
뭐래, 이 멍청한 놈이.
“너 눈 없냐? 아. 눈알이 없긴 하지. 그래서 못 보는 건가?”
“대체 내가 무얼 못 본다는 것이냐?”
해골의 질문이 웃겼다.
자기가 지금 뭘 못 보고 있는지 정말로 모르나 보다.
쯧쯧….
착한 내가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수밖에.
톡.
검지로 새싹이의 이파리를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 이곳엔 우리가 있어.”
활짝!
새싹이는 방금 내가 그랬던 것처럼 두 이파리를 펼쳤다.
귀여운 새싹이에게서 고개를 돌려 도희와 태천이를 보며 말했다.
“내가 진심으로 등을 맡길 수 있는 녀석들도 있고.”
겸사겸사 두 사람의 등 뒤에 서 있던 백운천도 함께 가리켰다.
깡!
태천이가 오른 주먹으로 알루키노르의 비늘로 만든 방패를 때렸다.
그 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안 백운천 녀석들은 어느새 꺼내든 무기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스톨로 카풀루스.
새싹이의 나뭇가지로 만든 무기들이 저마다 푸른 빛을 뿜어냈다.
“영감님 제자들.”
엄지로 리롄제와 그의 제자들을 가리킨다.
끌끌 웃는 리롄제 대신 리우이호가 오른발로 바닥을 힘주어 찼다.
조금 전 백운천이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은 동시에 하나의 행동을 취했다.
자신들의 몸에서 마나를 맹렬하게 뿜어낸 것인데, 그 투명하고 맑은 마나가 거대한 결계처럼 펼쳐졌다.
이어 밀러 학파를 바라봤다.
“밀러 학파.”
바네사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캐스팅을 시작했다.
블랙 드래곤의 데메르고 마법에 당했던 그들은 이 순간만큼은 알레딩 밀러가 선별해 데려온 학생들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조리 더블 캐스팅을 하고 있었던 거다.
특히, 정신적으로 무너진 모습을 보였던 바네사가 열정적으로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베르동 협곡 게이트에서 느꼈던 치욕을 씻어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교황청.”
지목받은 사제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십자 성호를 긋고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의 효과는 5초도 되지 않아서 나타났는데, 바로 그들의 몸에서부터 흰 빛줄기들이 쏘아져 올라간 것이었다.
빛줄기들은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은 들끓는 어둠을 몰아냈다.
직접 닿은 부분만 조금 몰아낸 것에 불과했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였다.
밀러조차 그위친의 숲에서 저 들끓는 어둠을 몰아내지 못해 뒤덮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위친과 스미르노프까지.”
마지막으로 크라우드가 보게 될 거로 예상하지 못했을 두 사람을 가리켰다.
둘은 내가 가리킬 때마다 어떤 행동을 취했던 앞선 사람들과 달리 가만히 서 있었다.
그위친은 밀러가 간신히 소환한 것이었기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있는 탓이고, 스미르노프는 내 지목에 따라 행동을 취하는 것이 싫어서였다.
뭐, 저 둘이라면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압박이 되니까 상관은 없었다.
“우리 모두를 정말 너희 둘이서 상대할 수 있겠냐?”
“……”
내 물음에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해골과 원은 입을 다문 채로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는 속담을 따라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대충 봐도 느껴졌다.
좋아.
결단을 내릴 수 있게 좀 도와줘 볼까.
“그리고 미리 말해주자면, 우린 한 놈만 팰 거야.”
“뭐?”
“너희 둘 중에 한 놈만 죽어라 팰 거라고.”
톡, 톡.
검지를 뻗어 해골과 원을 번갈아 가리켰다.
이러고 있으니 어쩐지 척척박사님을 찾고 싶어지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고민도 하지 않고 믿고 따르던 수족을 냉큼 버렸던 놈들이다.
서로라고 해서 뭐 다를까?
저놈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동료를 버릴 수 있는 놈들일 테다.
톡, 톡, 톡….
“…….”
“…….”
내 협박이 통한 걸까?
해골과 원의 분위기가 변했다.
방금까진 하늘에서 오만한 태도로 아래쪽만 주시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옆에 있는 동료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네놈들이라면 그렇게 옹졸한 모습을 보여줄 줄 알았다.
서로 간의 신뢰가 없고 위험을 무릅쓰려는 의지도 없으니까.
이대로 기다리면, 분명 저놈들은 뽑아 든 칼을 도로 집어넣고 도망칠 것이다.
[세계수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관리인을 걱정합니다.]…아.
문제는 이대로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거군.
리롄제의 오른팔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그위친의 소환마저 풀린다면, 저놈들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러기 전에 결단을 빨리 내릴 수 있게 한 번 더 도와줘야겠다.
“아, 맞다. 너희한테 고맙다고 인사한다는 걸 깜빡했네.”
“고맙다고?”
“그래. 덕분에 좋은 거 만들 수 있었거든.”
“……?”
해골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걸 보고 얼마나 좋아할지 생각하니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걸?
인벤토리에서 헤미스 캐논을 꺼냈다.
저장고 역할을 하는 전대 세계수의 굵은 나뭇가지는 꺼내지 않았는데, 정말로 사용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바라는 건 놈들이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 그것은…!”
해골이 경악에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벌어졌다간 턱뼈가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역시 헤미스파이리움을 개조해 만들었다는 걸 바로 알아보네.
하긴….
저놈들이 저렇게 설칠 수 있는 핵심 장비였으니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그걸 개조했다고…. 어떻게-”
“해골!”
원이 호통치듯 해골을 불렀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 노림수대로 됐다는 걸.
이제 저놈들은 도망칠 것이다.
해골의 시선이 닿자 원이 바로 말했다.
“계획을 바꿀 것이다.”
“…돌아가잔 뜻인가?”
“그래.”
그것 보라지.
“이렇게? 아무도 죽이지 못한 채로?”
“전부 대계(大計)를 위해서다.”
“…….”
해골이 못마땅하다는 듯 원을 바라봤다.
사실 나도 그랬다.
큰 계획은 무슨?
그냥 개죽음당하기 싫어서 도망치는 것인 주제에.
하여간….
“말만 번지르르하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내 작은 목소리에 담긴 경멸을 알아차린 걸까.
해골이 분한 듯이 나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원이 한발 빠르게 먼저 말했다.
“돌아가자, 해골.”
“하나-”
“난 혼자서라도 돌아갈 것이다.”
“…….”
역시 자기 자신만 아는 놈다웠다.
해골이 어떻게 되든 혼자서라도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다니….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무는 해골이 참 처량해 보이는걸?
물론 동정심이 들지는 않았다.
가소로운 마음에 비웃음은 피식피식 새어 나왔지만.
비웃는 소리를 들었는지 해골이 나를 노려봤다.
지가 노려보면 어쩔 건데?
그런 마음을 한가득 담아 히죽 웃어주었다.
“…빌어먹을!”
해골이 거칠게 욕을 내뱉는다.
원의 뜻에 따르겠다는 행위였기에 원은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달달달…!
불꽃을 뿜어내던 거대한 륜의 회전 속도가 아까보다 훨씬 더 빨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또다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돌아가는 륜 위에 정좌한 원의 몸이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안 돌아가는 건데….
[세계수가 관리인을 게슴츠레 바라봅니다.]내가 실망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원은 들끓는 어둠으로 쏙 들어갔다.
해골이 바로 원의 뒤를 따랐는데, 들끓는 어둠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내게 말을 남겼다.
“백도운! 네놈은 반드시 내가 죽일 것이다!”
“어, 그래. 파이팅!”
“…….”
주먹을 꼭 쥐어 보이며 해골을 응원했다.
가운뎃손가락이 펼쳐진 주먹이긴 했지만 말이다.
빠드득!
진심을 담은 응원이었건만, 놈은 마음에 들지 않은 지 새카맣게 썩은 듯한 이빨을 세차게 갈았다.
하지만 별다른 말을 남기지는 않고 들끓는 어둠으로 들어갔다.
화아악….
해골이 사라지자마자 들끓는 어둠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새싹아.
[세계수가 빠르게 주변을 탐색합니다.] [혐오스러운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전합니다.]하여튼 도망치는 건 참 잘하는 놈들이라니까.
광합성 모드를 풀며 말했다.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네요. 확실히 도망갔어요.”
“다행이네요. 휴우….”
역시 우리 도희야.
내 목적을 알고 있던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빛의 성역을 풀었다.
다른 이들도 손에 쥐었던 무기를 집어넣고, 뿜어냈던 마나를 거뒀으며, 캐스팅하던 마법들을 취소했다.
그때, 앨릭스 협회장이 다가와 내게 물었다.
“도운. 크라우드를 왜 그냥 돌려보낸 건가? 자네 말대로 이만큼 사람들이 모였으니 우리가 이길 수 있을 텐데.”
얼씨구?
조금 당황스러운걸.
적을 속이려면 아군을 먼저 속여야 한다지만, 앨릭스 협회장마저 속일 생각은 없었는데.
승산이라….
있기야 했겠지.
하지만 그만큼 피해도 컸을 거다.
살아남는 인간을 손으로 꼽을 수 있었겠지.
“리롄제 영감님의 저 팔은 곧 돌아올 겁니다.”
“음?”
앨릭스 협회장이 리롄제를 돌아본다.
타이밍을 맞춘 듯이 붉은 화염의 팔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방금 딱 8분이 흐른 것이었다.
이어 밀러와 그위친을 가리켰다.
“그위친의 소환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는 상태고요.”
“뭐라고?”
“미스터 백 말이 맞아요. 전투하지 않는다면 30분 정도? 더 가능하지만, 전투라도 시작했다간 5분도 유지하지 못했을 거예요. 정신력을 너무 소모했거든요.”
“아아, 그런 상황이었나….”
앨릭스 협회장은 수긍이 간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문제는 또 있었다.
그걸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가 내 목에 걸린 무기를 보고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도 제대로 싸울 수 없는 상태라고 했었지….”
뭐지?
말마따나 싸울 수 없는 상태기는 한데….
어째서인지 무기를 향한 측은(惻隱)한 마음이 느껴진다.
아, 설마.
혹시 무기가 다쳐서 이러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내 생각이 맞았는지 그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미안하네. 내가 눈치가 없었군.”
“…아니. 뭐, 괜찮습니다.”
사과를 받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스스로 납득해서 사과하는데 굳이 아니라고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
“도운아.”
“왜?”
날 부르는 태천이를 바로 돌아봤다.
태천이는 어째선지 조심스러운 태도로 주변을 살폈다.
왜 이래?
“크라우드 도망간 거 맞지?”
“그렇다고 말했잖아.”
“아줌마가 어떤 미래를 봤다고 미리 말해주지도 않았고.”
“응.”
고개를 바로 끄덕였다.
그날 한국 헌터 협회 옥상에서 아줌마한테 들었던 건 이번 토벌에 관련된 정보가 다였다.
앞으로 벌어질 다른 일들에 관해서는 어떤 얘기도 듣지 못했다.
아마 크라우드가 올 걸 말하지 않은 건 내가 예측했기 때문일 테지.
혹은 데이모스가 도와줄 것을 알았다거나.
태천이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또 질문을 던졌다.
“새싹이는? 뭔가 또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기분이 안 든대?”
“흐음….”
눈을 치켜뜨며 태천이를 바라봤다.
어째 궁금한 건 따로 있는 것 같은데….
[세계수는 나뭇가지를 가로젓습니다.] [현재로선 아무 기분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전합니다.]“응. 아무 기분도 안 든대.”
“그래? 정말로?”
“그래. 정말로.”
“우후후. 그렇단 말이지!”
태천이 해맑게 웃었다.
그 순간, 주변에서 우릴 지켜보던 몇몇 여자들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자연스럽게 몇몇 남자들의 얼굴은 서글퍼졌다.
한재임은 자랑스러워했고.
미친놈.
“…왜 그러는데?”
“왜 그러긴! 뻔하잖아!”
뭐가 뻔해?
그리 묻기 전에, 태천이가 만세를 불렀다.
“이제부터 먹고 마셔야지! 배 터지게! 밤새도록!”
…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