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573
제575화
『과연 위그드라실이로군….』
조용히 있던 아바돈이 이내 중얼거린다.
다시 열린 놈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순수한 감탄이었다.
슥….
내게서 고개를 돌려 새싹이를 바라본다.
정확히는 세계수를 본 것이었다.
새싹이를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를 전대 세계수, 위그드라실을.
『죽을 때 죽더라도 그냥 당하지 않았군. 아니….』
“…….”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계획하고 일부러 여에게 죽어준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드는데?』
“그래. 맞아.”
『후, 후후후…!』
아바돈이 웃음을 흘린다.
과거를 곱씹는 듯한 모습이 좀 불쾌했다.
전대 세계수를 죽였던 과거.
그 기억이 놈에겐 그저 추억(追憶)이었기 때문이다.
뭐….
오늘 새로운 기억을 남겨주면 될 일이다.
추억으로 곱씹을 수는 없겠지만.
“자. 그럼 이만 시작해볼까? 결과가 정해진 싸움을.”
『결과가 정해졌다고?』
아바돈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놈의 반응에 오히려 내가 의문을 느꼈다.
나와 새싹이를 해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을 이해했을 텐데?
지금 놈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정해진 결과가 더디게 오도록 버티는 것뿐이었다.
아바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생각을 부정하겠다는 듯이.
『시간이 고정됐다면 모를까. 결과는 정해지지 않았다. 관리인. 전혀 정해지지 않았지.』
“얼씨구….”
『세계수와 관리인을 죽일 수 없다고 한들 여가 무조건 패배하게 되는 것은 아니거든.』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거든.』
“그것참 궁금하네.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기대에 부응하여, 보여주도록 하지…!』
그리 대답하면서 아바돈은 각성을 썼다.
세계수 그 자체로 변한 내 몸처럼 들끓는 어둠 그 자체가 된 것이다.
당연하게도 놈은 전신 각성을 썼다.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목과 다리를 제외하면 약점이 없었던 블랙 드래곤이 떠오른다.
그런 상처도 보이지 않는 아바돈에겐 마땅히 약점이 없으리라.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새싹이가 여전히 관찰 중인 것도 그래서일 테지.
없는 약점을 만들어내서라도 내게 말해주고 싶을 테니까.
바로 그때였다.
아바돈이 고개를 쳐들어 빛의 성역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니.
정확히는 빛의 성역 한가운데에 있는 도희를 본 거다.
“이 개새끼가….”
입에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부정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회전하는 내 머리가 아바돈의 악의(惡意)를 바로 알아봤다.
세계수와 관리인을 죽이지 못하는 상황.
그런 상황이라고 순순히 죽어줄 리 없는 아바돈이 할 일은 하나였다.
바로 내 주변인들을 해치는 것이었다.
그것도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꿈도 꾸지 마. 아바돈.”
『꿈을 꾸고 말고는 여의 자유일 텐데?』
“…….”
『…….』
나와 아바돈의 시선이 교차했다.
찰나에 가까운 순간이었다.
그 순간이 지나고, 나와 놈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하늘로 솟구쳤다.
지키기 위하여,
죽이기 위하여.
***
최 클라우디아 수녀는 멀거니 서 있었다.
보육원의 대문 바로 앞이었다.
이대로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바깥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뒤에서 남자의 긴장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름이 어둑어둑한 게, 비라도 올 것 같군요.”
“비요…? 갑자기?”
“음. 아닙니까? 한국은 이제부터 장마철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대답하면서 남자는 최 클라우디아 수녀 옆에 섰다.
이어 구름이 잔뜩 껴서 흐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늘을 보는 남자의 눈이 계속해서 그녀의 두 발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 남자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까지도….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예…?”
“여기에서 나갈 생각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하, 하하. 그렇군요….”
남자가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본심을 꿰뚫린 것이 민망했다.
그 말마따나 남자는 그녀가 보육원에서 나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최 클라우디아 수녀가 누구인가?
십여 년 전에 뇌제 한진환과도 겨룬 적이 있었던 비공식 A+급 마녀였다.
그때 저지른 범죄들로 인해 이곳 보육원에서 나갈 수 없는 신세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보육원 밖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는 것은 세계 헌터 협회와 교황청이 동시에 발칵 뒤집힐 대사건이었다.
남자가 문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고 잔뜩 긴장하고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비단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보육원의 수녀들과 남자와 함께 배치된 부하들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
최 클라우디아 수녀는 먼 곳을 주시했다.
여러 갈래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그리 생각한 남자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혹시, 걱정스러운 일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아주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사실 예전에 비슷한 대화를 나눴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최 클라우디아 수녀는 “미래를 안다는 건 위험한 일이에요.”라고 대답했었기에, 질문을 던질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묻지 않는 게 옳았으나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 보였던 탓에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답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고 있는 남자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송구한 마음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말씀하기 곤란하신가 보군요. 괜한 질문을 드려 죄송-”
“우리 세상으로 아바돈이 넘어왔어요.”
“네…?”
예상외의 대답에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반문했다.
우리 세상으로 뭐가 넘어왔다고?
최 클라우디아 수녀는 대답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남자에게 말을 이었다.
“지금 도운이가 놈과 한창 싸우고 있죠.”
“…….”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요.”
“잠시만요. 그러니까, 그, 마족 아바돈이 넘어왔다는 겁니까? 바로 지금?”
“네.”
“아니….”
남자는 말문이 막혔다.
이 중요한 사실을 왜 지금 말해주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리 언질을 주시지요. 그랬더라면-”
“대비했겠죠.”
“그렇습니다. 잘 아시면서 대체 왜…! 아니. 이런 걸 따질 때가 아니군요. 지금이라도 교황청과 세계 헌터 협회에 알리겠습니다.”
“그만둬요.”
남자는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최 클라우디아 수녀는 그런 남자를 말렸다.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면서.
“다 죽을 테니까.”
“……!”
우뚝.
남자의 손가락이 멈췄다.
미래를 아는 것만으로도 위험하다고 말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단정(斷定)했으니,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자가 질문했다.
“방금 다 죽는다고 하셨습니까?”
“당연하지 않나요?”
“당연하다고요?”
“아바돈은 블랙 드래곤보다 강해요. 이 세상의 일류 헌터들을 말 한마디로 무릎 꿇게 했던 그 블랙 드래곤보다.”
“…….”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도 블랙 드래곤 토벌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고 있었다.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사건으로 여러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져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당시 토벌대원 대부분은 블랙 드래곤의 ‘데메르고(dēmergō)’라는 마법에 의해 검은 구슬로 변했었다.
미래를 보는 그녀가 그 이야기를 꺼낸 것으로 보아 아바돈도 비슷한 마법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옳았다.
“…말씀하시려는 바를 이해했습니다.”
“그래요.”
“하지만-”
“다른 S급 헌터들도 방해가 될 뿐이에요.”
“…….”
남자는 조금 허탈해졌다.
예전에 대화할 때도 느꼈던 감정이었다.
자기가 할 말을 알고 먼저 대답하니, 그녀와 대화할 땐 곧잘 허무해지곤 했다.
“블랙 드래곤은 순수하게 강한 존재였어요. 그래서 격이 떨어지는 이들도 싸울 수는 있었죠.”
“……?”
“하지만 아바돈은 달라요. 그것의 힘 그 자체인 들끓는 어둠은 보고만 있어도 사람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죠.”
“아….”
남자 또한 알고 있는 정보였다.
크라우드가 헤미스파이리움으로 뿜어낸 들끓는 어둠은 사람들의 눈에서 새카만 눈물을 흘리게 했다.
머릿속에서 분노와 절망과 좌절과 고독과 혐오를 표출하도록 강요했다.
앨릭스 협회장도 그것을 보고 과거의 후회에 잠식될 뻔했다고 순순히 인정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아마도….
“S급 헌터들도 그 어둠을 보고서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겁니까?”
“그위친은 오롯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는 숲에서 나올 수 없죠….”
“안타깝게도요.”
나올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알레딩 밀러가 소환하면 되니까.
다만, 그 문제는 그건 밀러가 어둠을 보고서도 정신을 멀쩡하게 유지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남자는 침울한 목소리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세계수 관리인인 백도운만이 정신을 멀쩡하게 유지할 수 있는 겁니까…?”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이 더 있어요.”
“두 사람? 그게 누구누굽니까?”
“도희와 태천이요.”
“……?”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태천은 S급 헌터인 데다가 세상에서 백도운 다음으로 강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그 이름이 거론됐을 때 수긍할 만도 했다.
하지만 ‘도희’라는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S급 헌터들도 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데, 그녀가 어떻게 멀쩡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의문에 최 클라우디아 수녀가 대답했다.
입으로 직접 묻지 않았는데도.
“도희가 빛의 마나 소유자라서 그래요. 세계수처럼 소멸시키진 못해도 몰아낼 수는 있으니까.”
“잠깐만요. 그럼 이자벨 성녀님을 모시고 오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녀로는 무리예요.”
“무리라고요? 어째서입니까…?”
남자의 목소리에 불만이 담겼다.
교황청 소속이었기 때문에 이자벨 성녀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용납할 수 없었던 거다.
그런 남자에게 최 클라우디아 수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설명했다.
“아바돈과 싸우려면 최소한 S급 헌터는 돼야 해요. 하지만 이자벨 성녀는 S급 헌터가 아니죠.”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얀 성녀’도 S급 헌터가 아닌….”
“…….”
“아니. 설마, 그녀가…?”
남자는 질문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최 클라우디아의 말대로라면 남매 모두 S급 헌터라는 소리였고, 심지어 두 사람의 절친까지 S급 헌터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거 알아요?”
“무엇을, 말입니까…?”
“백운천이 세 사람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지은 거라는 거.”
“아,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말씀하시는 건지…?”
“음…. 도운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개(感慨)가 무량(無量)해서?”
“……?”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 클라우디아 수녀는 남자를 이해시켜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다시 먼 곳을 주시할 뿐이었다.
“3년 만이네요.”
“예…?”
“본래 백운천으로 돌아오기까지요. 후후….”
최 클라우디아 수녀가 웃었다.
***
“…….”
도희가 도운을 올려다본다.
어쩐지 그녀의 얼굴엔 불만이 서려 있었다.
데구르르.
이어 도희는 눈동자를 굴려 앞에 서 있는 도운 너머를 보았다.
도운의 등 뒤에는 태천이 방패를 든 채로 서 있었다.
아바돈이 내뻗은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을 막은 채로.
“…이렇게 지켜주지 않아도 됐는데요.”
도희가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이 정도는 혼자서도 막을 수 있었어요.”
“그래. 그랬겠지.”
“그러니까, 앞으로는 둘 다 이러지 마요. 이걸 기회로 아바돈을 공격했어야죠.”
“하, 하, 하.”
도운은 짧게 끊어서 웃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전혀 웃기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했지만.
슥….
도운이 손을 들어 올려 도희의 뺨을 문질렀다.
그러면서 아바돈을 노려보고 있는 태천을 불렀다.
“태천아.”
“응.”
“도희가 이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혼나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 전적으로 동감이야.”
꽉.
도운은 도희의 뺨을 꼬집었다.
“아! 아파! 아파요! 갑자기 뭐 하는 거야!”
“동생을 미끼 삼으라고 지껄인 입이 이거야? 응?”
“아니. 거긴 입이 아니라 볼인데요…!”
“어쭈.”
쭈욱!
도운은 더 세게 잡아당긴다.
그때, 도운의 마나가 도희의 뺨을 타고 온몸으로 흘렀다.
“그만해, 아프다니까!”
도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도운은 손을 뗐다.
물론, 도희의 “그만해”라는 소리를 따라준 것은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이 끝나서 뗐을 뿐.
『…….』
아바돈은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고까운 마음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