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579
제581화
디싱에게 속았다.
설마 580시간밖에 흐르지 않았을 줄이야….
따지고 보면 이것도 많이 흐른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무의식에서 디싱이 보였던 행동 때문에 상대적으로 별로 지난 것 같지 않게 느껴졌다.
그는 몇 개월은… 아니, 몇 년은 훌쩍 지난 것처럼 행동했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한 달도 채 흐르지 않았다니….
“하….”
그저 황당하기만 했다.
무슨 장난을 쳐도 이런 장난을 치는 건지.
덕분에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 했… 아.
설마 이거 때문이었나?
인사 나누는 게 민망해서 서둘러 보내버리려고?
거 양반 이상한 데서 쑥스러움을 느끼고 그러네.
저번엔 고맙다면서 말도 잘하더니만.
속으로 당황스러운 불만을 투덜거릴 때였다.
『…기다렸다. 관리인.』
아바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렸다?
서로 반길 사이도 아닌데 저런 말을 하는 것은 궁금하기 때문이리라.
무의식에서 디싱이 나타났을 때 바깥에 있던 무기가 그의 마나를 느꼈다고 했었다.
아바돈 또한 그의 마나를 느낀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아바돈이 질문을 던져온다.
목소리에서는 궁금한 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역시나.
예상한 대로 디싱의 마나를 느꼈나 보다.
『관리인에게서 왜 그자의 마나가 느껴진 거지?』
“왜냐고? 뻔한 걸 묻네.”
『뻔하다?』
“그래. 같이 있었기 때문인 게 당연하잖아.”
『……!』
아바돈이 눈을 부릅떴다.
전대 세계수 관리인과 같이 있었다.
그 사실이 퍽 충격적인 듯했다.
하긴.
이미 죽은 존재와 같이 있었다고 하는데 충격받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다.
도희는 나한테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병원에서 검사까지 받게 하지 않았던가.
뭐. 날 걱정하는 마음에 그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받게 했겠지만.
『여가 죽인 그자와 함께 있었다고…?』
“그렇대도. 아. 혹시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나 제정신이야. 원하면 병원에서 검진표 떼와 줄 수도 있어.”
『…….』
아바돈이 눈을 찌푸린다.
헛소리 늘어놓지 마라.
그렇게 따지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어 놈은 그 눈빛으로 내 몸을 살폈다.
디싱과 만나고 돌아온 내게 무슨 변화가 있는지 파악하고 싶은 듯했다.
이참에 나도 상황을 파악할 겸 놈과 주변을 살폈다.
나와 아바돈은 여전히 세계수의 뿌리에 의해서 한데 묶여 있었다.
또 각자의 손이 서로의 가슴을 찌른 상태였다.
내가 놈의 심장을 파괴하고자 따스한 손길을 올려놓았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아바돈은 정말로 날 권속으로 삼으려고 시도하고 있었나 보다.
아니….
그게 통하겠냐고.
황당함을 느끼고 있는데, 새싹이가 의외의 말을 전해왔다.
[세계수가 나뭇가지를 긁적입니다.] [사실 마냥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고 털어놓습니다.]어라?
여유롭지 않았다고?
[세계수가 무저갱의 특성 때문에 위험했다고 전합니다.] [무저갱은 사람의 정신을 무너뜨려 생각과 신념을 변질시킨다고 설명합니다.] [그 방법은 관리인도 예상하듯이….]과거를 보여주는 거였겠지?
아프고, 슬프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사람이 그런 과거를 계속 마주하다 보면 정신이 붕괴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이해했어.
아바돈이 자신만만했던 이유가 있었네.
그런데, 그런 방식이라면 별문제 없었을 것 같은데?
[세계수가 나뭇가지를 갸웃거립니다.] [관리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의문을 가집니다.]무의식에서 디싱이 그러더라고.
난 정신이 붕괴할 정도로 후회하는 기억이 없다고.
그땐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알 것 같아.
아무래도 그는 무저갱의 특성에도 정신이 붕괴하지 않는 나를 봤던 모양이야.
오랜 시간이 걸려서 언젠가 깨달음을 얻어 돌아오는 나를.
[세계수가 관리인을 당황스럽게 바라봅니다.] [정말로 후회하는 기억이 없냐고 질문합니다.]에이, 설마.
없으면 사람이게?
당연히 있지.
사고 치려다가 들킨 거.
사고 치다가 들킨 거.
사고 치고 들킨 거.
[…….] [……….] [세계수가 나뭇가지를 절레절레 가로젓습니다.] [도희에게 진심을 담아 동정을 보냅니다.]갑자기 도희를 왜 동정하는 건데?
들킨 건 나라니까?
날 동정해야지.
[세계수가 관리인을 게슴츠레 바라봅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따스한 손길이나 확인하라고 전합니다.]쓸데없는 소리라니.
진심이었는데….
꿍얼거리면서도 일단 새싹이가 하라는 대로 했다.
진심을 설득하는 것보단 그게 더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580시간 동안 쉬지 않고 따스한 손길을 쓴 내 검지는 아바돈의 가슴이 움푹 파이게 했다.
겨우 검지 끝부분 정도?
길이로 따지고 보면 1cm도 되지 않았지만, 그 ‘움푹 파이게 했다’라는 사실이 중요한 거였다.
[세계수가 약점을 찾았습니다.] [아바돈의 약점은 ‘가슴’이라고 설명합니다.]새싹이가 메시지를 보내온다.
예상한 대로 저 움푹 팬 곳은 약점이 되었다.
따스한 손길로 더 큰 데미지를 줄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그때,
『대체 그자와 만나 뭘 한 거냐?』
아바돈이 의문을 던져왔다.
내 몸을 살펴보았는데도 달라진 점을 찾지 못한 탓이었다.
아직 완성한 각성을 쓰지 않았으니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어깨를 으쓱 올리며 대꾸했다.
“별거 아냐.”
『…….』
아바돈은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별거 아니라는 말을 믿을 수 없는 듯했다.
하긴.
나 같아도 못 믿겠다.
과거에 죽은 존재가 찾아와서는 별거 아닌 일만 하고 돌아갔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말을 정정했다.
“맞아. 사실 별거하고 갔어.”
『…….』
“완성할 수 있게 도와주고 갔거든.”
『완성? 뭘 말이냐?』
“이거.”
대답하면서 온몸에 마나를 불어넣는다.
전신 각성을 쓰고 있던 몸에 세계수의 마나가 새롭게 흘러 퍼졌다.
그러자 몸이 변했다.
나뭇가지들이 얽히고설킨 듯했던 형태와 피부가 원래 인간의 것으로 되돌아온다.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전신에 푸른빛의 나무껍질 무늬가 그려졌다.
세계수의 나무껍질을 쓴 것처럼.
그 광경을 보자마자,
『이런, 말도 안 되는…!』
아바돈이 경악을 터뜨린다.
말문이 막혀서 끝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아마 놈의 머릿속에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힘을 다루던 유일한 존재 ‘디싱 나 토르’의 모습이 말이다.
『…….』
아바돈이 조용히 나를 바라본다.
처음인 것 같다.
각성의 완성.
그것을 확인하고서야 처음으로 놈의 얼굴에 여유가 사라진 거다.
깨달은 것이겠지.
이젠 정말로 내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1초, 2초, 3초.
나와 아바돈 사이에 조용히 침묵이 흐른다.
그러다가,
『‘공허(空虛)의 허기(虛飢)’…!』
아바돈이 마법을 썼다.
사위에서 들끓는 어둠으로 만들어진 구(球)가 쏟아졌다.
더 늦지 않게 나를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쾅, 쾅!
공허의 허기가 수없이 내 몸을 후려치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명제 마법에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각성을 완성한 후 내 방어력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아바돈의 마법을 방어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놈을 바라볼 뿐.
그 상태로,
“세계수 소환.”
새싹이를 소환했다.
[세계수가 두 이파리를 치켜듭니다.]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순간이라고 외칩니다!]새싹이가 평소처럼 내 정수리에 소환됐을 때였다.
쩍, 쩌적!
물체에 금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물체는 바로 아바돈의 움푹 파였던 가슴이었다.
약점 판정을 받은 데다가 완성한 각성을 쓰고 새싹이까지 소환하지 않았나.
따스한 손길의 위력이 조금 전과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그러나 아바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현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했다.
“놀라기는. 자, 이제 정말로 끝을 내자. 아바돈.”
『관리인…!』
아바돈이 나를 노려본다.
노려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콰득! 콰드득!
지금 이 순간에도 내 검지는 아바돈의 심장에 구멍을 내기 위해 가슴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으니까.
그 순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바돈이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문득 해골과 원이 떠올랐다.
크라우드의 주인 아니랄까 봐….
어째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는 꼴이 똑같아 보였다.
설마 이렇게 무너지는 건가?
『여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알게 뭐람?
어차피 정신 똑바로 박히지 않은 놈의 행보가 아닌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디싱 나 토르도 죽인 여다! 세계수도 죽인 여란 말이다…!』
아바돈은 과거의 영광을 떠들어댔다.
마족이라고 해봐야 현재를 부정하며 과거의 영광을 지껄여대는 건 인간이랑 똑같군.
그럴 때가 아닌데.
저러고 있는 순간에도,
콰득!
내 검지는 가슴을 찔러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두 마디 정도 들어갔나….
아바돈의 덩치가 워낙 큰 탓에 피부만 조금 뚫어낸 거였다.
이대로는 아직 치명상에 가까운 손해를 입힐 수 없을 터였다.
그렇게 판단했을 때였다.
『…….』
갑자기 아바돈이 조용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본다.
과연….
성서에 기록이 남았을 정도로 오래된 존재다웠다.
스스로 ‘여’라고 부르는 군주(君主)답게 놈은 무너지지 않고 감정을 추슬렀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 주어서 고마웠다.
과거의 영광을 떠들어대면서 여지없이 무너져내린다?
그런 놈에게 죽은 전대 세계수 페어는 바보와 머저리가 될 뿐이지 않나.
물론,
『후후….』
아바돈은 마족이었다.
감정을 추스르고 웃는 놈에게서는 강렬한 ‘악의(惡意)’가 느껴졌다.
그 악의에 내 머리가 반응했다.
부정적인 사고의 톱니바퀴가 굴러가면서 놈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단번에 알아냈다.
“이 미친놈이….”
『너무하는군. 여는 그저 관리인이 소중한 이들을 볼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다만.』
“놀고 있네. 네가 그걸 왜 신경 써?”
『우리 사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지랄.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580시간을 함께한 사이지. 밤낮을 구분하지 않고…!』
아바돈이 대답하며 손을 뻗는다.
그러자 시야가 변했다.
계속해서 나를 공격하던 공허의 허기가 사라지고 잿빛의 대지가 펼쳐졌다.
무저갱에서 미완의 게이트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잿빛의 대지, 그러니까 미완의 게이트가 무너져내렸다.
『함께 만나러 가자, 관리인! 여가 죽기 전에…!』
아바돈이 소리쳤다.
어쩐지 그 모습이 퍽 즐거워 보였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죽을 거면 곱게 죽을 것이지!
***
칠갑산은 조용했다.
도희와 이태천을 포함한 백운천 길드원들,
배수현과 최희석을 비롯한 정부와 협회 소속 헌터들 등등.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데도 대화가 전혀 오고 가지 않았다.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만 이따금 들려올 뿐이었다.
그때였다.
“……!”
홱!
이태천이 고개를 돌려 칠갑산 게이트를 바라봤다.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다.
“왜 그래요?”
“…….”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본 도희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태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오라버니?”
“…돌아온 것 같아.”
“……!”
태천은 도희가 재차 묻자 대답했다.
돌아온 것 같아.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도희는 바로 알아들었다.
벌떡.
도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칠갑산 게이트를 바라봤다.
그 순간,
“아…!”
그녀는 보았다.
초록의 새싹이 칠갑산 게이트에 삐져나와 있는 모습을.
도희를 비롯해 세계수를 발견한 이들은 곧 도운이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
기다려도 도운은 게이트를 빠져나오지 않았다.
아니.
나오기는커녕 삐져 나왔던 세계수가 다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왜 나오지 않는 거지?
사람들이 그런 의문을 느낄 때였다.
세계수가 다시 게이트를 나왔다.
-가, 도로 들어갔다.
그것을 한두 번도 아니고 널뛰기하듯이 계속 반복했다.
조용히 지켜보던 한재임이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저건 또 뭐 하는 짓거리야?”
그 의문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현재 펼쳐지는 현상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