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578
제580화
톡.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눈앞에 있던 아버지는 사라지고 태천이가 나타났다.
어렸을 때의 태천이었다.
여전히 잘생겼군.
아니. 잘생긴 놈의 어렸을 때니까 ‘여전히’라는 표현은 틀린 건가.
“그만하지 그래?”
태천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그만하라는 걸까 궁금했는데, 곧 내 손을 보고 알게 됐다.
한재임의 멱살을 붙들고 있었다.
아. 이건 그때였다.
한재임이 도희와 실수로 부딪쳐서 울렸을 때.
있는 힘껏 한재임의 배에 드롭킥을 날렸었지, 아마.
“그만하라고?”
“어.”
“내가 왜?”
“재임이 때리는 것보다, 울고 있는 네 동생을 먼저 챙기는 게 맞지 않아?”
“…….”
그 말에 도희를 바라본다.
도희는 무릎을 모은 채 앉아서는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울음은 이미 그쳤지만, 여운이 남았는지 훌쩍거렸다.
태천이의 말이 옳았다.
과거의 내가 도희에게 묻는다.
“…괜찮아?”
“응.”
“얘 어떻게 할까?”
“응…!”
“…알았어.”
한재임의 멱살을 풀었다.
일단락 난 분위기에 안도한 건지 녀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안심을 왜 해?
퍼억!
그러니까 과거의 내가 얼굴을 후려치지.
“이 새끼가…!”
한재임은 쓰러지지 않았다.
더는 참지 않겠다는 듯이 내 멱살을 붙잡으려고 했다.
물론, 태천이가 끼어든 탓에 그럴 수는 없었다.
툭….
태천이 나와 한재임을 동시에 밀쳤다.
그때 일은 내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타인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난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 상상했었다.
태천이를 어떻게 패줘야 할지.
“……?”
멈추고 말았지만.
머릿속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이기는 상상도 지는 상상도.
그런 적은 처음이었기에, 내게 태천이는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었다.
“너… 인간 아니지?”
“……푸핫! 뭐야, 그건? 그럼 나 뭔데?”
“…….”
“재임아. 얘 생각보다 재미있는데.”
“하나도 재미없거든.”
“삐졌어?”
“닥쳐!”
“푸흐흐.”
태천이 짧게 웃는다.
태양을 머금은 듯한 화사한 웃음이었다.
이어 태천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소년의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큰 손을 보고서 상상이 떠올랐다.
이길 수도 질 수도 없을 때….
그럴 땐,
“백도운이다.”
친구가 되면 되는 것이었다.
마침 ‘옳은 길’을 제시해줄 것도 같았고.
톡, 톡.
그 순간, 또다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린 아까부터 왜 자꾸 들려오는 거야?
의문을 표하는 동안 시야가 변하고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이것도 인연인데 정식으로 인사나 해, 우리.”
재이였다.
그녀는 내게 오른손을 내민 상태였다.
망치질로 인해 굳은살이 잔뜩 배긴, 참 예쁜 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로군.
크라우드를 돌려보내고, 그녀가 나를 서지혁으로 착각한 이후의 순간이다.
“난 재이네 대장간의 유재이.”
“난 여동생 등골 브레이커-”
“아이, 미안하다니까!”
“…헌터. 2년 만에 복귀하는 헌터, 백도운.”
재이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삶이 묻어난 손은 따듯했다.
톡.
예의 그 소리가 또 울렸다.
아니. 재이는 왜 이렇게 짧은 건데?
더 길어도 되잖아!
“형.”
나를 덤덤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재식이 목 앞에 한 손 검이 들이밀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무주 개미굴 때 인질로 붙잡혔을 때의 일이었다.
성립할 수 없는 인질극 말이다.
“괜찮겠냐?”
“…나도 헌터예요.”
재식이 결연하게 대답했다.
죽음을 받아들인 듯한 얼굴이었다.
퍽 마음에 들었었지….
톡.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트였다.
한라산의 백록담이 펼쳐진 탓이었다.
백록담엔 아는 놈이 빠져 있었다.
바로,
“제가 돌아왔습니다! 기억해주십시오! 제 이름은-”
지상욱이었다.
후우….
얘도 참 징글징글하네.
나타나도 또 이런 기억으로 나타나고 그러냐.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제 이름…, 앗? 도운 형님?”
“네가 왜 여기 있냐?”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을 과거의 내가 던졌다.
비단 지상욱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나타난 이유가 무엇일까…?
들끓는 어둠은 마주한 사람에게 좋지 못한 과거들을 떠올리게 한다.
무저갱이 과거를 그려내는 것도 분명 그러기 위함일 터였다.
아픈 과거.
슬픈 기억.
그것을 잠식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지금 떠오른 과거들은 내게 있어 좋지 못한 기억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기억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도희와 태천이, 재이와 한재임, 그리고 김재식과 지상욱까지….
전부 내 사람들에 관련한 기억들이었다.
싫어하려야 싫어할 수가 없었다.
톡, 톡….
그때였다.
또다시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지금까지와 달리 한두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톡톡 톡톡톡…!
새떼가 지저귀듯 계속해서 울려댔다.
그러면서,
“……!”
시야가 밝아졌다.
공허한 공간이 사라지고 푸른 숲이 펼쳐졌다.
이 공간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현재 내 스마트폰 화면에 떠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바로,
『축하한다, 후배.』
새싹이가 있는 성역이었다.
숲이 울창한 이곳에서 디싱 나 토르가 저번처럼 바위를 의자 삼아 앉아 있었다.
저 꼴을 보아하니….
역시 이곳은 디싱의 의식이 끼어든 나의 무의식이었다.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군.』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왜 당신이 나오는 건데?”
『설명해주기에 앞서, 어디까지 기억이 나지?』
“기억?”
『이를테면, 우리가 저번에 만났을 때 후배가 뽑은 잡초의 수라던가.』
“미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음. 제정신이군.』
“…….”
저 판단 방법은 뭐지.
굉장히 기분이 나쁜걸.
『즉, 지금이었던 거다. 후배가 깨달음을 얻고 각성을 완성하는 순간이.』
“……!”
『난 그것이 빨리 완성되도록 조금 거들어준 것이고.』
“당신이 거들어줬다고? 어떻게?”
『추억 여행은 잘 했나?』
“아….”
과연.
좋은 과거만 떠오른 이유는 디싱이 도와줬기 때문인 모양이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후배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돕기 위해서였다.』
디싱이 선뜻 말했다.
과연 드래곤 로드.
통찰로 속마음을 읽었나 보다.
“깨달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 후배는 정신이 붕괴할 정도로 후회하는 기억이 없거든. 그러니까 결국 깨달음을 얻게 됐던 것일 테지만….』
“흐음….”
숨을 짧게 내쉬었다.
솔직히 뭔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당황스럽다.
내가 무슨 깨달음을 얻었는지도 모르겠고.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혹시 기억하나? ‘간단한 이벤트’에서 마지막으로 나왔던 대미(大尾)를.』
“기억해.”
잊기 쉬운 기억은 아니었다.
전신 각성을 쓴 나의 모습이었으니까.
별로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붙들자마자 쓰러져서 황당했었지….
디싱이 질문을 던졌다.
『그때 그것이 왜 쓰러졌다고 생각하나?』
“그야 당연히…!”
대답하려던 입이 멈췄다.
답을 아는 사람처럼 대답하려는 자신이 문득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는 저 질문의 답을 알지 못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디싱에게 직접 묻기까지 하지 않았나.
그랬었던 내가 방금 디싱에게 질문을 받자마자 대답하려고 한 것이다.
“…….”
『…….』
“…뿌리가 없어서.”
대답을 기다리는 디싱에게 천천히 말했다.
이어 그 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덧붙였다.
“그리고 그 뿌리는 아마 인연(因緣)이겠지.”
『후….』
대답을 듣자마자 디싱이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에 내 대답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그 말대로다. 후배는 지금까지 그저 뜬구름이었지.』
“…….”
『세계수가 될 뻔했던 것도 그래서였고. 언제든 다 놓아버리고 떠날 수 있는 인간이었으니까.』
“…그걸 깨닫게 해주려고, 무저갱을 이용해 내게 인연들을 하나하나 보여준 거다?”
『그런 셈이지.』
“아니. 그런 거면 그냥 말해줬어도 되는 거잖아?”
『이미 말했을 텐데? 남이 가르쳐줘봐야 실감하지 못할 거라고.』
“…….”
실감하지 못했을 거다…?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납득이 되지는 않았다.
내가 방금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내 앞에 떠오른 이들을 보고 ‘내 사람들’이라고 말했을 뿐이지 않나.
그런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가 있는 걸까?
『원래 그런 것이다. 후배.』
“뭐?”
『깨달음…. 그렇게 말하면 흔히 거창한 것을 생각하고들 하지.』
“…….”
『물론 그런 경우도 있기는 하지. 하지만, 대개 깨달음은 별 것 아닌 것에서 얻는 법이다. 지금의 관리인처럼.』
“흐음….”
『그래도 납득이 안 되나?』
“솔직히 그렇긴 해.”
슥….
디싱이 두 팔을 벌렸다.
『그렇다면 주변을 돌아봐라.』
“주변을…?”
『이 또한 말했을 터다. 이곳에서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현실을 반영한다고.』
“……!”
『그건 이 장소 또한 포함이었다.』
“아….”
디싱의 말에 푸른 숲을 돌아봤다.
스스로 말해놓고선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이 나의 ‘무의식’이라는 것을.
『이제 좀 실감이 되나?』
“뭐,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후후…. 정말 손이 많이 가는 후배로군.』
디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말과 행동과 달리 그의 얼굴에서는 흡족한 마음이 느껴졌다.
후배를 끔찍이 여기는 선배.
그 포지션에 앉아 있는 자신이 만족스러운 듯했다.
솔직히 아니꼬운 모습이었다.
『슬슬 헤어질 시간이다. 후배.』
그는 예전에 했던 말과 똑같이 말했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을 것 같다는 생각이.
“…선배. 질문이 있는데.”
『뭐지?』
“저번에 깨어나니까 한 달이 지났더라고.”
『아.』
“이번에도 그런 건 아니겠지?”
『…….』
슥.
디싱이 시선을 피한다.
시간이 흘렀을 거라는 뜻이었다.
이 양반이 정말?
“얼마나 지났는데? 이번에도 한 달이야?”
『한 달은 아니다.』
“오. 그럼? 3주? 2주?”
희망차게 질문했다.
하긴.
이번엔 저번과 달리 ‘간단한 이벤트’를 하지도 않았잖은가.
더 빨리 끝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런데,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미소만 지은 채로 침묵을 지켰다.
그때 깨달았다.
디싱의 “한 달은 아니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그건 한 달 이하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이봐, 선배.”
『…….』
“대답 좀 해주면 안 될까? 지금 후배가 굉장히 불안한데 말이지.”
『…기억나지 않나?』
“뭐가?”
『후배가 각성을 완성하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
기억한다.
짧게 1년에서 길게 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아니….
한 달이 지났을까 봐 걱정했는데, 단위가 달라지면 어떡해?
설마, 깨어나고 보니 5년이 흘러 있는 건 아니겠지?
『그 정도로 흐르지는 않았다.』
“정말로?”
『정말로. 그걸 위해서 후배가 깨달음을 얻는 것을 돕지 않았나.』
“아. 과연….”
진심으로 불행 중 다행이었다.
방금 디싱이 한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이런 뜻이 되었다.
그가 깨달음을 얻는데 도와주지 않았을 경우 정말로 5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라는 말이….
꼴깍.
침을 한 번 삼킨 후 다시 물었다.
“이제 그만 말해 줘.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야?”
『걱정하지 마라. 그리 오래 지나지는 않았으니.』
“그러니까 얼마나 흘렀냐고.”
『음. 다시 만나서 정말로 반가웠다. 후배.』
“이봐, 선배? 왜 자꾸 말을 돌리는 걸까?”
『아마 앞으로 우리가 만날 일은 없겠지. 하지만 아쉬워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에 불과하니….』
“…….”
놀고 있네, 진짜.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자기 혼자 멋들어진 말로 인사하면 다야?
『자! 그럼 이만 세상을 구하러 가라. 후배. 아니, 세계수 관리인!』
“기다려, 이 양반아! 말은 해주고-”
뚝.
소리치는 가운데 세상이 변했다.
그 때문에 내 외침은,
“-가라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공허하게 울렸다.
그때, 푸르스름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우리 새싹이였다.
오, 오오….
새싹아.
나 질문이 있어.
진실하게 가르쳐줘야 해.
[세계수가 무의식에서 깨어나자마자 무슨 질문이냐며 되묻습니다.] [혹시 아바돈에 관련한 것이라면-]아니, 그것 말고.
아바돈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야.
[세계수가 나뭇가지를 갸웃거립니다.]지금 시간 얼마나 지났어?
[세계수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합니다.] [정확히 580시간 흘렀다고 가르쳐줍니다.]580시간?
뭐야, 그럼 한 달도 안 지난 거잖아?
그런데 왜 디싱이 그런 반응을….
“아, 설마….”
나 속인 거야?
이 양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