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577
제579화
덥석!
아바돈의 커다란 손이 내 팔을 붙든다.
새싹이의 형상이 여전히 춤을 추고 있는데도 제정신을 차린 거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 놀라지는 않았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지금까지 작정하고 세계수의 춤을 썼을 때 스스로 제정신을 차린 것은 아바돈 뿐이었다.
『관리인…!』
꽈악…!
내 팔을 붙든 놈의 손에 힘이 실렸다.
새싹이의 뿌리를 잡아 뜯을 수 있다고 자신하던 것처럼 전력으로 내 팔을 뜯어내려고 잡아당긴다.
물론,
“용 쓴다.”
당연히 안 됐다.
아바돈은 명제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새싹이의 뿌리를 뜯어내지 못했었다.
같은 이유로 놈은 내 팔도 뜯어낼 수 없었다.
세계수의 뿌리에 포박되어 몸을 가눌 수 없는 이 상태로 내 손가락이 가슴을 뚫고 들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할 뿐….
아바돈이 말했다.
『여가 이대로 당할 것 같나? 방법이 없을 것 같으냔 말이다.』
말할 때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아직 실감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따스한 손길이 놈의 피부조차 뚫지 못했으니까.
뭐. 처음부터 금방 뚫고 들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을 이미 각오한 바였기에, 느긋하게 대답해 주었다.
“있을 수도 있겠지. 해봐.”
『그렇지 않아도 할 생각이다. 공허의-』
“오브스트레포(obstrepō)…!”
아바돈의 마법이 도중에 끊겼다.
도희가 마법 발동에 혼란을 주는 마법 ‘오브스트레포’를 썼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놀랐다.
저 마법이 설마 마족인 아바돈의 마법에도 훼방 놓을 수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마족에게까지 통할 정도라면, 나나 드래곤한테도 통하겠는걸.
나야 애초에 마법을 쓸 줄 몰랐지만.
『여의 마법을….』
아바돈도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서 놀람과 당황이 느껴졌다.
후후. 역시 우리 도희야.
누구 동생인지 참 잘 컸다니까?
그치? 새싹아.
[세계수가 나뭇가지를 가로젓습니다.] [도희의 마법이 아바돈에게 통한 것은 상성(相性)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는 특성이 있기에 아바돈의 힘을 흩트릴 수 있었으며, 그런 이유로 관리인이나 드래곤한테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어 세계수는 그림자 마법을 다루던 블랙 드래곤한테는 통할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합니다.]어, 그렇구나….
몰랐는데 친절한 설명 참 고마워.
그런데 새싹아.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어.
방금은 그냥 우리 도희가 대단하다는 사실에 깊이 공감하면 됐다고.
[세계수가 관리인을 게슴츠레 바라봅니다.] [가르쳐줘도 뭐라고 한다고 투덜거립니다.]새싹이가 나를 보며 투덜거릴 때였다.
『후후….』
아바돈이 웃었다.
물리적인 힘으로 날 떼어낼 수 없고, 도희 때문에 마법도 쓸 수 없는데도 말이다.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에 정신이 나간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아바돈이 내 팔을 붙든 손을 거두면서 말했다.
손가락 참 길기도 하지.
『그거 아나? 관리인.』
“뜬금없이 그렇게 물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
『여는 무저갱에서 태어났다.』
“……?”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바돈이 무저갱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이곳에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뭐 하러 말하는 것일까.
스윽….
아바돈이 한 팔을 들어 올렸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놈의 머리에 자란 뿔처럼 허공에 길게 뻗어 나갔다.
그 순간이었다.
꿀렁, 꿀렁…!
나와 놈의 발밑에 있던 무저갱의 어둠이 끓는 물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
도희가 다시 마법을 썼다.
아바돈이 마법을 쓸 수 없도록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통하지 않아…?”
도희가 당황스럽게 중얼거린 것처럼 어둠이 요동치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즉….
『여는 지금 마법을 쓰는 게 아니다.』
“마법이 아니라고?”
『그래. 이건 그냥 손을 높이 들어 올리고 그러모은 것과 같다. 이렇게 말이다.』
아바돈이 주먹을 쥔다.
그와 동시에 무저갱에서 요동치던 어둠이 솟아올랐다.
높이 솟아오른 어둠 기둥은 곧 다섯 갈래로 갈라졌다.
길이와 두께가 각자 다르게 갈라진 탓일까?
그것은,
“손…?”
마치 손처럼 보였다.
무엇이든 손아귀에 쥔 후 끌고 들어갈 것 같은 손 말이다.
설마….
‘끌어당기는 손’이 아바돈의 짓이던 건가?
그렇다면, 놈은 지금 가장 방해가 되는 사람을 끌어당기고 싶을 터였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놈에게 방해가 되는 사람은….
“태천아!”
“걱정하지 마!”
태천이를 부르자 믿음직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 대답과 동시에 태천이는 도희의 앞에 서 있었다.
알루키노르의 비늘로 만든 방패를 들어 올린 채로.
반드시 지켜 내겠다는 듯이.
저런 얼굴을 한 태천이를 뚫고 도희를 공격할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으리라.
그런 생각을 할 때, 아바돈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여가 관리인의 동생을 끌어당길 거로 생각했나?』
“그럼 아니냐?”
『물론 아니다. 미리 말해두는데, 문지기도 아니었지.』
“둘 다 아니라고? 뭐, 나를 끌어당길 생각이란 거야?”
『바로 그렇다.』
“…….”
이놈이 진짜 미쳤나?
아니면 명제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이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건가?
황당한 마음에 멍하니 바라보는데, 아바돈이 또 “후후” 웃었다.
『생각해 봐라. 지금 이 순간, 여에게 가장 방해가 되는 존재가 누구지?』
“그야 당연히….”
『관리인이다. 당연히 관리인이지.』
“…….”
그래.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긍정할 수 있는 말도 아니었다.
몇 번이고 말했듯이 나는 명제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었으니까.
무저갱에 들어갔을 때 명제 마법의 효과가 사라지기라도 하는 거라면 모를까….
그야 그렇겠지.
새싹이의 설명에 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공간이 바뀐다고 효과가 사라질 마법이라면 ‘명제’라는 단어를 붙일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뭘까?
아바돈은 왜 나를 무저갱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걸까.
단지 가장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너무 빈약했다.
태어난 곳에서 죽는다.
그런 수미상관(首尾相關)을 이루고 싶은 마음인 것도 아닐 텐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로군.』
“너 같으면 이해하겠냐?”
『이해하고말고. 여는 명제 마법의 ‘빈틈’을 찾아냈거든.』
“빈틈이라고?”
『그래. 여는 관리인을 해하지 않을 거다.』
무저갱으로 끌고 들어간 나를 해하지 않을 거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어이가 없네?
“내가 순순히 널 풀어줄 것 같냐?”
『음?』
“나 무저갱에 처박고 너만 다시 나오겠다는 거잖아. 웃기는 소리지. 세계수의 뿌리를 쓴 나를 떨쳐 낼 수 있을 것 같아?”
『아. 그건 오해다. 여는 관리인을 그저 무저갱에 처박아 둘 생각이 아니니까. 』
“아니라고?”
『그래. 여는 관리인을 권속으로 삼을 셈이다. 해하지 않고서.』
“뭐, 라고…?”
황당한 나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를 뭐로 삼을 셈이라고?
권속?
아니. 그런 게….
“진심으로 가능하리라고 보는 거냐?”
『물론.』
“하, 하.”
아바돈이 선뜻 대답했다.
대답을 듣자마자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진심이라고….
세계수 관리인인 나를 권속으로 삼을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고….
[세계수가 불쾌함을 느낍니다.] [아바돈의 주둥아리를 세게 후려치고 싶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마음이 잘 맞는걸?
나도 지금 딱 그런 기분인데.
대체 날 얼마나 무시하고 있길래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앞에 있는 게 내가 아니라 디싱 나 토르였다면 저따위 망발을 할 수 없었을 텐데 말이다.
단언컨대 입 밖에 내기는커녕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
불편해진 심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을 때, 아바돈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여에게서 떨어지는 것이 어떻겠나?』
“뭐?”
『그리한다면 저 손에 이끌려 무저갱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 관리인.』
“……!”
아바돈의 목소리는 은근했다.
제 말이 굉장히 솔깃한 제안이라는 듯이….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그저 여유로운 게 아니었다.
놈도 알고 있었다.
나를 무저갱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수라는 사실을.
또 성공률이 극악에 달하는 수라는 사실도….
그런데도 놈이 이런 수를 두는 이유는 하나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놈은 내 따스한 손길에 의해서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
“…….”
『…….』
즉, 놈은 방금 도박을 걸어본 거다.
내가 무저갱에 끌려 들어가기 싫어 놈에게서 떨어지기를 바라고서.
그러니, 놈에게서 굳이 떨어져 줄 필요는 없었다.
[세계수가 나뭇가지를 끄덕입니다.] [이어 자신의 소환을 풀고 무저갱에 진입한 후 다시 소환하라고 조언합니다.] [관리인과 함께 무저갱으로 들어가 아바돈이 얼마나 멍청한 생각을 한 것인지 깨닫게 해주겠다고 으릅니다.]새싹이가 내 의견에 동의하며 메시지를 빠르게 보내왔다.
아바돈 때문에 화가 많이 났나 보다.
처음으로 ‘으르다’라는 표현까지 쓰는 것을 보면.
그럼 들어줘야지.
휙.
새싹이의 조언에 따라 바로 소환을 풀었다.
약화했던 아바돈의 권능이 강해진 것이 느껴졌다.
그러는 동안, 거대한 손이 다가와 나와 아바돈을 붙들었다.
스스로 소환한 손인데 함께 붙든 것은 내가 세계수의 뿌리로 몸을 휘감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회할 것이다. 관리인.』
“글쎄. 후회는 네가 할 것 같은데. 아니면, 이미 하고 있나?”
『…….』
아바돈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 반응에 자연히 알 수 있었다.
예상대로 하고 있는 거 맞네.
후회.
“이히히.”
아바돈을 비웃으며 무저갱으로 끌려들어 갔다.
***
무저갱은 공허(空虛)했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은 내게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눈과 귀와 입이 편안해지는….
그런데 왜일까.
자꾸만 무언가를 깜빡한 기분이 들었다.
왜 내가 이렇게 찝찝한 기분을 느껴야 하지?
그저 편안할 수 없는 사실에 불쾌함을 느낄 때였다.
“도운아.”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목소리다.
이 목소리를 내가 언제 들었었더라?
의문이 떠올랐으나 곧 가라앉는다.
알게 뭐야.
이리도 편안한 것을.
“도운아.”
목소리는 계속 나를 불렀다.
내 편안함을 방해하고 싶은 듯이.
한 번만 더 불러봐, 아주.
주둥아리를 후려쳐줄 테니까.
“백도운!”
좋아.
주둥아리 때려 달라 이거지?
그렇게 소원이시라면야 들어드려야지.
난 검지를 펼쳤다.
“……?”
그게 이상했다.
후려치는데 주먹도 아니고 웬 검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눈앞에 한 인영(人影)이 나타났다.
처음엔 거울이 나타난 줄 알았다.
앞에 나타난 인간이 나와 아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를 부른 인간은 바로,
“또 넋 놓고 있는 거냐?”
나의 아버지.
‘백지현(地玄)’이었다.
푹.
그가 내 머리에 손을 얹는다.
그때 깨달았다.
내 몸이 아주 작아졌다는 사실을.
과연.
이건 그러니까 기억이었다.
무저갱이 만들어낸 나의 과거 말이다.
“도운아.”
과거의 그가 나를 부른다.
사실 이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달리 헛소리를 해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별로 기억에 남길 필요가 없었다.
“…….”
뭐지.
방금 타이밍에 누군가가 딴지를 걸었어야 했을 것 같은데.
난 그 딴지에 히히 웃고.
“네 이름은 ‘민정’이가 지어줬어.”
그건 몰랐네.
“네 뜻대로 살라는 의미지. 그러니까, 너는 뭐든 될 수 있을 거야.”
“……?”
근거가 좀 이상한데?
아내가 지어준 이름이니까 뭐든 될 수 있을 거라니.
아. 하긴.
이 인간 아내 껌딱지에다 팔불출이었지.
저런 당치도 않는 근거를 진심으로 생각할 만도 하다.
역시 평소처럼 헛소리해댄 기억이었나….
무저갱은 왜 이 기억을 내게 왜 보여주는 거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거 아니었나.
그때였다.
“부탁 하나 할게.”
아버지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변했다.
이때 나한테 부탁을 했었군?
“동생을 지켜줘.”
“……!”
“도희는 아직 아이니까, 네 도움이 필요해. 그러니까 항상 동생 챙겨주기. 그래 줄 수 있지?”
“…….”
그래 줄 수 있긴 하지.
그런데 도희랑 나랑 2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건 아나 몰라.
도희가 아이면 나도 아이인데.
무엇보다 그 부탁을 왜 나한테 하는 거야?
본인은 뭐하고.
“아버지는?”
오.
역시 과거의 나.
나와 사고방식이 비슷했다.
“음.”
그가 콧숨을 내쉰다.
왠지 곤란한 얼굴이었다.
“아빠는 민정이 지키러 가야 해.”
어머니를?
뭐지.
이때 어머니가 위험에 처한 상황이었나?
전혀 기억에 없는데….
뭐, 지금까지 기억하지 못한 기억이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한가.
“그리고 그게 곧 너와 도희를 지켜주는 일이 될 거야.”
“……?”
“후후. 이해가 안 가겠지. 뭐. 언젠가 알게 될 거야.”
그러면서 아버지는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글쎄 그 언젠가가 언젠데 이 양반아.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구만.
“백도운.”
“……?”
“넌 민정이 아들이니까 뭐든 잘 해낼 거야. 물론, 내 아들이기도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긴 한데….”
안타까워라.
그가 걱정한 대로 난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훨씬 많이 닮았다.
그나마 위안 삼을 수 있는 일은 도희가 어머니를 닮았다는 거려나.
드문드문 백 씨 집안의 피가 주머니 속 송곳처럼 튀어나오긴 하지만.
“어쨌든 잘 해낼 거야.”
네.
굉장히 막연하고 추상적인 얘기 잘 들었습니다.
이런 쓸데없는 말 하려고 등장한-
“아. 그리고 너 친구는 꼭 사귀어라. 특히, 네게 ‘옳은 길’을 제시해줄 친구를.”
“옳은 길…?”
“그래야 도운이 네가 ‘민정이가 바란 구름’이 될 테니까.”
어머니가 바란 구름?
기분 탓인가.
그건 좀 의미심장한데….
톡.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다.
어디에선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