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127
제127화
31. 불씨 (3)
“사목영?”
잠깐만. 이 이름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거 아니야? 동명이인이라기엔 흔한 이름도 아니고. 그렇다면 정말로…….
“당신, 동잿골의 사목영입니까?”
“네, 맞아요. 어떻게 절?”
“익히 이야기 들었습니다. 소한 제일의 의원 아니십니까?”
사목영이 제게는 과한 칭호라며 겸양을 떨었다. 자신은 그저 눈앞의 환자에 늘 최선을 다했을 뿐이란다.
“사감영께서 방금 그 말을 들으시면 서운해하시겠습니다. 얼마나 당신을 자랑스러워하셨는데요.”
“어머, 저희 오라버니를 아시나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사목영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내 그는 내 손목을 덥석 붙잡고는 제 오라버니에 관한 질문을 쉴 새 없이 던져 댔다. 아는 대로 사감영의 근황을 알려 주자 사목영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원체 제 앞가림을 잘하는 사람이라 크게 걱정되진 않았어요. 그런데도 소식을 들으니 한숨 놓이네요.”
“최근에 키우던 우렁이가 영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조금 놀라시긴 했겠지만, 나름대로 화목하게 잘 지내시는 것 같았습니다.”
“우렁이는 또 어디서 주웠대. 하여간 잔정 많은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어느새 맺힌 눈물을 소매 끝으로 꾹꾹 눌러 닦은 사목영이 다과상을 우리 쪽으로 밀었다. 작은 소반 위에는 녹색의 다식들이 소담하게 쌓여 있었다.
“반가운 소식을 들려 주셨는데 대접이 변변찮네요. 그래도 효능은 분명하니 한 입씩 들어 보세요.”
효능? 보통 다식에 그런 표현을 쓰나?
잠시 의문이 들었으나, 사목영의 기대하는 눈빛에 못 이겨 연초록색의 다식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다식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나보다 조금 먼저 다식을 맛본 한차현이 돌연 입가를 가렸다.
‘왜 저래?’
한차현이 저렇게 표정을 가다듬지 못한 것은 처음이었다. 심상치 않아 보여 곧장 손을 물리려 했으나 이미 혀끝에 다식이 닿은 뒤였다.
“윽, 이게 무슨…….”
“죄송,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사레가 들려서.”
억지로 기침을 해 대는 한차현을 안쓰러운 눈으로 봤다. 저건 헛구역질을 감추기 위해 하는 행동이 분명하다. 혀끝만 겨우 닿은 나와 달리 한차현은 다식 하나를 통째로 씹어 삼켰으니까.
‘뭔 놈의 다식이 이렇게 써?’
사목영이 준 다식은 지독하게 썼다.
청재와 제 누이가 닮았다는 사감영의 말은 순 거짓말이었다. 청재는 우렁이답지 않게 덜렁대며 사고를 칠 뿐이지 사람을 고문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적어도 그 우렁이는 제 솜씨가 엉망이라는 건 확실히 알고 있었잖아.’
그냥 쓰기만 하면 이렇게까지 말하진 않지. 쓴맛은 기본에 맵고 떫은 건 덤이요, 잠깐 닿은 것만으로 혀끝이 아리니. 말 그대로 미각 테러였다.
한차현을 걱정하는 척, 어깨를 두드리며 자연스럽게 다식을 내려놓았다. 사목영도 염려 가득한 낯으로 한차현에게 다가왔다.
“이를 어째. 기침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심한데. 진찰이라도 해 드릴까요? 평소에 지병이 있진 않으시죠?”
“아닙니다. 큼, 허기가 들어서 너무 급하게 먹은 듯합니다.”
“아! 약차가 있었네요!”
안절부절못하던 사목영이 냉큼 찻잔을 내밀었다. 녹색 찻물이 담긴 다기를 보는 한차현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어, 음……. 감사합니다.”
요령 좋은 사람답게 잘 둘러대며 피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는 눈을 꾹 감고 차를 들이켰다. 미소라기엔 오묘한 구석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나름대로 표정 관리에도 성공했으니 실로 존경스러웠다.
[- 수신인 : 한차현무리하신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모르긴 몰라도 다식과 비견할 만한 맛이었을 거다. 내심 걱정이 되어 몰래 메시지를 보내자, 한차현이 내게만 보이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 간에 오간 대화를 모르는 사목영이 찻주전자에 손을 얹었다. 빈 잔을 채우려는 듯하기에 얼른 주의를 돌렸다.
“저, 아까 그 불 말입니다.”
다행히 관심 있는 소재였는지 사목영이 번쩍 얼굴을 들었다.
“맞아요! 마침 여쭤보고 싶었던 참이었습니다. 어찌 염상환이 플레이어님들에게까지 흘러간 것이지요? 왕실과 인연이 있으신 건가요?”
“왕족께 받은 것이긴 합니다. 그런데 불만 보고 어떻게…….”
“염상환인 걸 알았냐고요? 모르는 게 이상하죠! 제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제조했는데요.”
역시 그랬나. 이 여인이 의원 사목영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했다. 아까 불꽃을 보면서 ‘진상’을 운운한 게 결정적인 단서였다.
“그렇다면 오읍환과 천극환도 당신이 만든 것이겠군요?”
“네, 그렇답니다!”
문득 환약들을 투척형으로 개량해서 다행이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다식도 이런데 애초에 용도가 ‘약’인 환약은 오죽했을까.
‘뭐, 효능은 확실했지만.’
그 사이 여유를 찾은 한차현이 넌지시 사목영에게 제안했다.
“심하게 사레에 들려서 그런가, 바로 먹기가 좀 겁이 나네요. 죄송하지만 이 다식들은 나중에 먹어도 될까요?”
“물론이죠. 무엇보다 건강이 우선이잖아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과상을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쭉 밀어 둔 사목영이 말끝을 흐렸다. 묻고 싶은 게 있는 낯이었다. 한차현이 편하게 말씀하시라 어른 뒤에야 사목영은 입을 열었다.
“제 환약들에 누가 손을 댄 듯한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의원분의 이름을 여쭐 수 있을까요?”
“아, 의원은 아닙니다만. 그거, 제가 한 겁니다.”
“정말이요? 그 환약은 제가 매우 섬세하게 조제한 것이라 의술에 조예가 없다면 균형이 모두 깨져 버렸을 거예요. 아, 혹시 재야에 숨은…….”
“조예 같은 건 없습니다. 물론 은둔 고수 같은 것도 아니고요.”
단호하게 말했지만, 사목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시범 삼아 방에 있던 환약 하나를 개량하는 걸 직접 보여 주고서야 그는 내 말을 납득했다.
“어쩜 신기하기도 해라! 정말 약제술이나 의술과는 전혀 다른 분야의 실력자시네요.”
“아닙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이런 귀한 재주를 가진 분께서 무엇을 얻으러 서천까지 오셨나요? 예삿일로 걸음 할 곳은 아닌데.”
생글대던 사목영이 뜬금없이 핵심을 찌르고 들어왔다. 조금 더 친밀해진 뒤, 슬슬 이야기를 꺼내 볼까 했는데. 뭐, 진행이 빠르면 우리야 좋지.
“저희는 사람을 찾으러 이곳에 왔습니다.”
“산 사람? 그게 아니면 죽은 사람?”
“산 사람입니다.”
나보다 말재간이 좋은 한차현이 우리의 사정을 대강 설명했다. 처음 보는 이에게 패를 모두 보여 줄 순 없는 노릇이니 적당히 지어낸 이야기도 섞었는데 순발력이 대단했다.
“안타까운 사연이네요. 어린아이가 아픈 부모의 약을 찾기 위해 서천에까지 왔다니.”
“그만큼 지독한 역병이란 거죠. 가호 씨가 사감영이란 분과 만난 것도 그 아이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던 중에 생긴 우연이었습니다.”
“남매 두 분께 모두 신세를 지게 되어 면목이 없습니다만,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혹시 아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좋으니 저희에게 알려 주십시오.”
한차현의 이야기에 장단을 맞추어, 사목영에게 공손한 어조로 부탁했다.
이렇게까지 간청하니 사목영은 마음이 약해진 듯했다. 그는 무언가 고민되는 사람처럼 손바닥으로 한쪽 뺨을 괸 채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은거하신 꽃 감관을 대신하여 서천 꽃밭을 돌보고 있답니다. 그를 위해 매일매일 날아다니며 온 서천을 살피지요.”
“그렇다면……!”
“저는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아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찾으시는 그 아이는 제 기억에 없네요.”
순간 힘이 탁 빠졌다. 서천 꽃밭이 광활하다지만 몇 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니.
백아가 정말로 여기 있긴 한 걸까? 확신에 가까웠던 추측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사목영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다만, 그 노리개.”
나와 한차현을 두루 살피던 사목영의 시선이 내게로 고정되었다. 정확히는 내 허리띠 쪽으로.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자 모서리가 둥근 원석이 만져졌다.
‘그러고 보니 이게 있었지. 사로뫼에게 묻는다는 걸 깜박했네.’
이강토가 꼬리와 합쳐 달라며 달랑달랑 들고 온 것을 뺏었더랬지. 퀘스트 아이템이라고 몇 번을 타일렀지만, 그는 끝까지 후궁의 원혼 어쩌고 하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계속 아쉬운 티를 내기에 허리띠 안쪽에 매달아 감추어 두었는데 나까지도 이 존재를 잊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투 중에 빠진 모양이었다.
“객께서 하고 계신 그 노리개는 어디선가 본 듯해요.”
“정말입니까?”
“네, 그렇고 말고요.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기억이 날 것 같아요.”
“가호 씨?”
됐다! 내가 주먹을 불끈 쥐고 기쁨을 표현하자 한차현이 의문을 표했다. 아차, 이 사람은 이 노리개가 무엇인지 모르지.
“이건 백아의 친모가 있던 사당에서 가져온 노리개입니다.”
영민한 이답게 한차현은 긴 설명 없이 내 말을 알아들었다.
“……사로뫼가 그랬죠. 백아가 푸른 옥으로 된 목걸이를 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 목걸이는 백아가 천산으로 떠내려 올 때부터 함께 있었습니다. 이 청옥 노리개와 같은 소재로 만들어진 것이 공교로운 일만은 아닌 것 같죠?”
“과연 그렇네요.”
이제 거의 다 온 것이나 다름없다는 안도감이 훅 끼쳤다. 성벽 너머, 저잣거리, 그리고 궁궐까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애를 썼던 게 허사가 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때마침 우리의 대화를 들으며 무언가를 골똘히 궁리하던 사목영이 끼어들었다.
“먼 길 오신 두 분께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기뻐요.”
“제가 청옥 노리개를 하고 있단 걸 어떻게 잘 보셨네요? 사실 저도 이게 있단 걸 완전히 잊고 있던 차였습니다.”
“아, 그리고 저 이제 다 기억났어요. 어디서 봤는지요! 노리개만 봤을 땐 헷갈렸는데 목걸이라고 하시니까 바로 알겠더라고요!”
드디어 밝혀지는 백아의 행방에 귀를 쫑긋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