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210
제210화
49. 실루엣 (3)
“놓고 가신 물건 없으신지 확인하시고요.”
“이것만 있으면 다 있는 거죠!”
채성아가 견지운의 스태프를 들고 흔들었다.
‘뭐, 그게 제일 중요하긴 하지.’
조금 전, 캐서린에게 물어보니 사건 현장 근처에 우체통이 있다고 했다. 그쪽 기억도 읽어 두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채성아를 데리고 거리로 나왔다.
어느새 주홍빛 저녁 해가 매연 사이로 드리우기 시작했다. 범행은 늘 한밤중에 일어났으니 아직 시간 여유는 있었다. 한차현의 약도에 캐서린이 덧댄 표식들을 따라 광장을 가로질렀다.
“윤가호 헌터는 길눈이 밝으시네요!”
“평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다며 채성아가 답지 않게 거세게 부정했다. 나를 보는 눈동자가 과할 정도로 반짝였다.
‘뭔가 아까부터 계속 이런 반응인데.’
착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정말인가. 고든에게서 퀘스트를 따낸 장면이 퍽 인상 깊었는지, 그때 이후로 채성아는 부쩍 나를 잘 따랐다. 주변에 괜찮은 선배가 오죽 없었으면 이러나 싶어 조금 가엾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도 답이 안 왔나? 기대하며 손목을 내려다보았으나, 헌터워치는 요지부동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건 아니겠지?”
이럴 사람이 아닌데……. 표정에도 불안한 심리가 드러났는지 채성아가 조심스레 내게 다가왔다.
“아직도 두 분 다 연락이 없나요?”
“예, 유감스럽게도.”
“많이, 신경 쓰이시나 봐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차현 헌터가 이러니까요.”
애초에 견지운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 이강토의 상사 아닌가. 업무 협조가 잘 되면 그것대로 이상했다.
하지만 한차현이 갑자기 잠수라니. 뭔가 사정이 있거나, 위험에 처한 듯한데. 후자가 아니길 빌 뿐이었다.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문득문득 걱정이 치밀었다. 세계탑이 어떤 곳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특수 필드에서 연락 두절이 된 날 기다렸을 때, 윤수호가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조금이나마 알 듯했다. 여기선 상대방이 요절하거나, 실종된 대도 알 길이 없으니까.
그러나 감상에 잠겨 있기엔 시급한 일들이 너무 많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지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성아 헌터 쪽에선 별 소득이 없었다고요?”
“그게 좀 애매해요.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데…….”
“뭐든 좋습니다. 말해 보세요.”
머뭇거리던 채성아가 입술을 뗐다. 얘기를 듣자 하니, 과연 그가 말한 대로 애매한 성과였다.
“범인에 대한 정보는 보지 못했다, 라.”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거든요. 비명만 지르고, 그대로 푹 쓰러져 버리더라고요. 심지어는 발소리도 안 들렸어요.”
뭐, 아예 의미 없는 정보는 아니었다. 이로써 살해범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란 게 확실해졌으니까. npc의 사주를 받은 플레이어든, 플레이어의 도움을 받은 npc든.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떤 쪽이든 나와 채성아만으로 상대하기엔 벅차겠지.’
제작한 아이템을 보면, 미리엄은 B급 헌터와 비등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마법사였던 듯한데. 그런 그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다가와, 기척도 없이 사라졌으니. 고전이 예상되었다.
고든이 불러오겠다는 경비대원들도 사실상 포위망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못할 테고. 여러모로 상황이 어렵게 되었다.
“아, 그리고요!”
귀한 스태프까지 빌려 왔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며 시무룩해져 있던 채성아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사건이랑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미리엄이라는 npc 분이 가지고 있던 목걸이에서 특이한 기억을 읽었거든요.”
“목걸이요?”
“네. 엄지손톱만 한 로켓이 달린 거였는데. 열어 보진 않았어요. 왜인지 그걸 쥐고 혼잣말을 엄청 하더라고요. 덕분에 이런저런 게 많이 보였어요.”
“혼잣말이 아닙니다.”
아마도 둘은…….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한숨과 함께 잡생각을 털어냈다. 과몰입은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으니까.
영문을 몰라 갸웃거리는 채성아에게 ‘그대의 초상’의 아이템 효과를 알려 주었다. 직접 미리엄의 모습을 보았던 터라, 채성아는 쉽게 그 뒤에 숨은 이야기를 유추했다. 그는 이내 내가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내뱉었다.
“이렇게 헤어지다니. 참 안타까운 연인이네요.”
공감을 구하듯 채성아가 날 올려다보았다. 일에 사감을 개입시키면 좋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작게 끄덕이자, 그가 나를 따라 붕붕 고갯짓했다.
“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서두릅시다.”
“네!”
지나치게 씩씩한 대답이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래, 처음 봤을 때보단 그래도 이게 낫네.’
새끼 오리처럼 나를 졸졸 따라오는 채성아와 함께 도착한 살해 현장은 미리엄의 가택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고작해야 도보로 10분쯤이나 걸리려나?
“원래는 한 번 쓰면 한참을 못 쓰는데. 마력 수치가 늘어났더니 그것도 완화된 거 있죠?”
우체통 앞에 선 채성아가 왼손에 스태프를 꾹 쥔 채 시동어를 외웠다. 잠시 후, 그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어졌다.
실수라도 그를 건드리지 않도록 한 발 물러나기 무섭게 채성아가 이지를 되찾았다.
“봤어요! 뭔가 보였어요!”
“정말입니까?”
마음이 앞서 채성아의 어깨에 손이 올라갔다. 다행히 그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잠깐만. 저거…….’
채성아가 아무렇지 않게 뒷말을 이으려던 순간, 그의 어깨를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잠시만 기다려 보라는 신호였다.
골목 끄트머리, 세모꼴의 지붕을 얹은 건물 너머 웬 그림자가 튀어나와 있었다. 커다란 후드를 눌러쓴 듯, 머리와 상반신의 구분이 모호했다. 손에는 뭔지 모를 날카로운 것이 들려 있었고.
서쪽에서 깊게 드리운 해가 아니었다면 이 각도에서 보이지 않았으리라. 그를 깨닫고 나니, 등허리에 소름이 쭉 돋았다.
‘아마도 헌터. 아니, 확실해.’
저건 기척을 숨기는 데 자신 있는 이들이 흔히 하는 실수였다. 모습을 감추고, 소리를 죽여도 숨겨지지 않는 게 있다는 것을 간과한 거지.
확실히 하기 위해 칼로스의 시험을 받았을 때처럼 감각을 벼렸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남의 편지가 그렇게도 궁금하셨습니까? 그렇게 좋아요?”
“예, 예?”
“이제 제 스태프 돌려주세요. 도와드리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란 말도 잊지 마시고요.”
역시나. 그림자가 든 물체에서 마력이 감지되었다. 짐작하건대 A~B급 정도의 아이템. 두드러지는 속성은 없었다.
대략적인 정보를 파악함과 동시에 왼쪽 눈을 두 번 깜박였다. 파티원들에게 제안해 미리 정한 신호였다. 플레이어와 대립하는 것이 거의 확실시 된 상황이었으니까.
‘이렇게 금방 쓰게 될지는 몰랐지만.’
밑도 끝도 없는 헛소리에 어물거리던 채성아가 평정을 되찾았다. 감시당하고 있다는 신호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보이길 빌며 채성아와 팔짱을 꼈다.
“홀딱 반했다는 그 npc가 오기 전에 갑시다. 얼른요!”
“아, 네!”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사건 현장을 빠져나왔다.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태연히 걸으면서도 머릿속은 팽팽 바쁘게 돌아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 다시 나타난 거지?’
치안관리국이 이 사건을 주시하고 있단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플레이어끼리 벌인 일이라면 모를까, npc와 퀘스트로 엮인 이상 그걸 무시할 수 없을 거고.
뭔가 대단히 중요한 목적이라도 있는 게 아닌 이상, 기어 나올 필요가 없단 말이다.
사건과 관련이 없는 헌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멀리 밀어두었다.
‘그런 놈이었다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이 골목에 찾아올 리도 없거니와, 그렇게 우리 쪽만 주시하지도 않았겠지.’
그림자가 선 모양새도 판단에 한몫했다. 언뜻 그냥 늘어뜨린 듯한 손은 바로 무기를 내지를 수 있도록 계산된 자세의 일부였다.
어지간히 의심이 많은 놈이 아니라면, 지금쯤 원래 목적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을 텐데. 놓쳐선 안 되는 기회였다. 그 뒤를 밟으면 제대로 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제기랄. 연락은 아직인가.”
헌터워치의 액정을 노려보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괜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한다고 여태 오지 않은 답장이 올 리가 없지.
채성아는 정신계 위저드의 표본 같은 헌터. 심각할 정도로 모든 스탯이 마력에 몰려있다. 브리핑 때 듣기론 스킬도 죄 그런 식이라고 하고. 지금의 내겐 최악의 소식이었다.
“하는 수 없지.”
“……윤가호 헌터?”
“제가 저자를 미행해 보겠습니다. 끝까지 들키지 않는 건 어려울 겁니다. 최대한 노력해 볼 테니 그동안 채성아 헌터가 다른 두 분을 찾아와 주세요.”
“예?”
물론 채성아는 반발했다. 그는 사시나무처럼 파들파들 떨며 내 소매를 붙잡았다.
“설득할 시간 없습니다. 언제 또 이렇게 큰 실마리가 굴러올지 몰라요.”
“그때도 그러시더니만……. 왜 이렇게 무모하세요?”
“그러게요. 저도 그러고 싶지 않은데.”
진심이었다. 누구라고 이런 위험한 일에 자원하고 싶겠는가. 하지만 안전을 따지며 물러나기엔 너무 좋은 기회였다. 대책 없이 던진 말도 아니었고.
“승률이 있으니 시도해 보는 겁니다. 자, 어서 가세요.”
망설이는 채성아의 등을 밀었다. 그럼에도 채성아는 끝까지 나를 돌아봤다. 그러곤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또, 믿으신다고 그러실 거예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입꼬리를 끌어 올렸을 뿐이다. 그를 본 채성아가 입술을 앙다물더니 등을 돌려 달려갔다. 든든하기 짝이 없는 뒷모습이었다.
허전함이 밀려오기 전, 나는 늘 나와 함께 하는 또 하나의 동료를 불러냈다.
“해랑아.”
– 큐!
근래 잘 먹은 덕분에 반지르르 윤기가 도는 해랑이 폭 튀어나왔다.
‘워낙에 연비가 나쁜 녀석이라 밤에만 부르려 했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녀석이 없으면, 미행이 실패로 돌아갈지도 모르니까.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빛내는 고래의 등을 간질이며 넌지시 물었다.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