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62
제62화
16. 바다꽃 (2)
단 하나의 선택지, 바다의 봄.
오늘의 시스템 창은 단호했다. 이대로 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 ‘바다의 봄’이라고 쓰인 글씨가 깜박였다. 글자를 누르자 불친절한 메시지가 떴다.
[인챈트 ‘바다의 봄(?)’ : 성공확률 ?%– 높은 확률로 특수 효과가 부여됩니다.
※ 주의 요망! 매개의 상태가 매우 불안정합니다.]
성공확률은 물론이거니와, 언제나 당연하게 제공되었던 예상 회로도 나타나지 않았다. 높은 확률로 특수효과가 부여된다는 게 위안이 되긴 했지만 막막한 마음이 앞섰다.
이 결과값이 아니면 안 된다고 강요하는 주제에 가이드도 없다니.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 겁먹지 말자, 윤가호.
하지만 여기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모든 일이 등을 밀어 주었다.
처음 해안 동굴을 찾았을 때부터, 아이들을 되찾아올 때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면 너무 아깝잖아.
불행 중 다행이라면 봄은 내가 직접 변주를 준 인챈트이다. 지금도 그 구조가 눈에 훤하니 어렵지 않을 것이다.
‘후천 효과인 바다는…….’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나를 살피는 아키스를 불렀다. 설명에 앞서, 바닥에 내가 접합하고자 하는 식을 대강 그렸다.
원반에 부여했던 ‘역전의 봄’은 다소 폭력적인 구석이 있는 인챈트였다. 원하는 효과를 뽑아내기 위해 원반이 본래 가지고 있던 속성은 ‘회귀한다’는 부분을 제외하고 거의 드러내다시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래선 안 된다.
– 아스트로 님의 회로는 되도록 건드리지 않은 채, 여기 있는 식을 접합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이 부분은 연결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요.
– 한번 볼게요. 아아. 침투의 식이군요. 이 정령 회로까지 융통성 없고 완고해선…….
– 아키나, 지금 무어라 했느냐?
– 아, 아스트로 듣고 계셨어요?
바다정령이 못마땅함을 표현하려는 듯, 헛기침하자 아키스가 슬슬 창대를 쓰다듬었다. 머쓱한 얼굴의 아키스가 바다정령의 회로 한 귀퉁이를 가리켰다.
– 저기라면 괜찮을 거예요.
– 저 부분은 전혀 관련 없는 부분 아닙니까? 속성식 같은데.
– 맞아요. 물의 기운을 불어넣는 회로죠. 침투의 식은 수속성의 식과 궁합이 좋거든요. 근본도 비슷하고요.
칼로스가 주었던 기본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이었다. 각 속성의 근본을 제대로 배워 두면 도움이 되는 곳이 많다며 아키스가 덧붙였다.
바닥에 손가락으로 가이드로 삼을 식을 그렸다. 회로 전체를 혼자 그리는 것은 처음이라 중간 중간 아키스에게 확인을 받았다.
– 플레이어님,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회로에서 조급함이 다 읽혀요. 여기, 그리고 이 부분도 마감이 깔끔하지 못하잖아요.
어딘가 허술한 구석이 있던 평소와 다르게, 아키스는 작은 실수 하나까지 꼼꼼하게 모두 잡아 냈다.
– 침착하려 하는데 마음대로 잘 안 되네요.
– 충분히 잘하고 계세요. 잘난 척 조언하고 있긴 하지만, 전 플레이어님 발끝만큼도 못 할걸요? 제작에 재능이 있는 게 얼마나 드문 일인데요.
– 만들고 비트는 일에는 서툴다 하셨죠?
– 그것도 그런 게, 이 이 마력 컨트롤이 형편없거든요.
우리를 구경하던 갈라테아가 툭 던지듯 말했다. 풀 죽은 얼굴의 아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꼬리를 두어 번 휘둘러 다가온 갈라테아가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 대신 아키나 너는 광역마법에 재능이 있잖아. 회로를 보는 눈은 또 어떻고?
– 갈라테아……!
둘만의 세계에 빠진 두 바다사람은 내버려 두고,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뻣뻣해진 뒷목을 풀기 위해 고개를 들자 나를 구경하다 지친 아이들이 기다림에 지쳐 탑 이곳저곳을 헤집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아키스, 마지막으로 확인 부탁드립니다.
– 음, 이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아요!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디어 끝났다.’
나를 방해하지 않으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한차현이 고생했다며 말을 건넸다.
– 아직 끝난 것도 아닌걸요.
– 그래도요.
한차현이 제 외모와 퍽 잘 어울리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스킬을 발동하기 전, 인벤토리를 뒤져 기다란 봉을 꺼냈다.
– 그걸 제물로 쓰실 겁니까?
– 예, 지화 님이 떠안겨 주신 건데 이렇게 쓰게 될 줄 몰랐네요.
길드에서 연습용으로 여러 아이템을 쓸어오기는 했으나, A급은 이것 딱 하나만 가지고 나왔다. 마땅한 주인을 찾지 못해 방치되고 있다며 김지화가 내게 이 장비를 안겨 주었다.
“아이템 놀려서 뭐 하겠어요. 일단 장부엔 내가 가져갔다고 써둘게요. 윤가호 헌터를 위해 사용된다면 이 친구도 좋아할 거예요.”
여러 번 거절했지만 김지화의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그때 받아 오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어.’
봉을 창 옆에 내려놓았다.
일반적으론 인챈트의 대상과 동일한 아이템을 사용해야 한다.
이 창은 신화와 역사를 함께하는 아이템이니만큼 평소라면 A급은 제물은 무슨, 제물 후보도 되지 못할 테지만…….
– 지금은 얘기가 다르지.
등급이 교란된 상태이니 걸어 볼 만하다. A급 인챈트인 ‘역전의 봄’도 적용되지 않았는가. 제물도 A급이면 충분하겠지.
하지만 낙관적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 최소 요구치 : S급]
– S급?
생각보다 높은 제한 등급에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A급도 겨우 구한 마당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역시 세계탑. 내 마음대로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 한차현 헌터. 혹시 남는 S급 장비 같은 건 없으시죠?
– 예?
– 아니, 아닙니다.
영문을 모르는 한차현이 눈을 깜박였다. 그래, 바랄 걸 바래야지.
공식적으로 국내에서 SS급 장비를 가진 것은 견지운 한 명뿐이다. S급은 그보다 조금 많은 수준.
‘그런 걸 얼렁뚱땅 구할 수 있을 리가.’
인챈트에 사용할 식을 완성하면 뭐 하나. 제물 등급이 미달이라니. 이것부터 확인했어야 했는데 마음이 급해 실수했다.
확률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마구잡이로 스킬을 사용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컸다.
– 얌전히 칼리아를 기다리는 수밖에…….
– 그런 거라면 이걸 써.
바닥에 놓인 창 옆에 짙은 붉은색 천이 펄럭 내려앉았다.
뒤를 돌아보니 버둥거리는 이강토를 짐짝처럼 들쳐 멘 윤수호가 있었다. 그는 얼른 집으라는 듯, 눈빛으로 나를 재촉했다.
– 뭐야 갑자기?
– 제물.
– 마음은 고마운데, 도로 가져가. 못 들은 모양인데 최소 등급이 S급이거든. 아, 이게 말이 돼?
– 알아.
내가 아이템을 챙길 기색이 보이지 않자, 윤수호가 이강토를 들고 있지 않은 쪽의 손으로 천을 집어 내 품에 안겨주었다. 소용없다니까 왜 이러는 거야?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감촉의 천을 그러쥐었다.
– 정보 확인해 봐.
눈을 가늘게 뜬 채, 손에 들고 있는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했다.
[마지막 불꽃(S)“먼 훗날까지 오직 너만을 지키리라.”
– 체력 : 17
– 근력 : 8
– 마력 : 7
– 민첩 : 7
– 항마력 : 25
※ 소유자의 의지에 따라 형태를 달리합니다.
※ 모든 종류의 불꽃으로부터 소유자를 수호합니다.]
– 너 미쳤어?
– 왜 그러는 거지? 이것도 너를 방해하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질문에 화가 치밀어 윤수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윤수호는 가볍게 내 발길질을 피했다. 뒤늦게 도착한 차태양이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 채 우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 윤가호, 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네 능력치로 날 쳤다간…….
– 나만 다치겠지.
– 그래. 그러니 화가 난다면 차라리 그 천으로 날 때려.
– 언니, 저 아저씨가 또 이상한 소리 했어요?
수식언에 특수효과까지 딸린 S급 장비. 그걸 이렇게 내놓는다고? 수식언이 뭔지 몰라서 그런 건가.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 인챈트가 실패하면 제물이 파괴돼. 알고 있는 거지?
이제야 의문이 해소되었다는 듯, 윤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심한 얼굴이 구세주처럼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세상 둘도 없이 미련하게 보였다.
– 됐어. 며칠 더 기다리면 방법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보류하자.
– 나한테는 필요 없는 아이템이다. 수치도 애매하고, 화염저항 스킬은 이미 가지고 있으니까.
윤수호가 드물게 길게 말했다. 저러는 걸 보면 정말 괜찮은 것 같기도 한데.
– 그래도. 경매에 내놓으면 저게 얼마인데.
윤수호가 어이없단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 정도를 아까워할 것 같냐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몸값 비싸기로 유명한 방어계 프리헌터니 돈이 많기야 하겠지.
‘아니, 그래도 말이야…….’
저세상에 가 있는 금전 감각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튀어나왔다.
– 나중에 가서 탓하지나 마.
–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하는군.
– ……고마워.
중얼거리듯 작게 한 말에 윤수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 감사 인사 처음 들어 봐?
민망해져 사나워진 내 눈을 본 윤수호가 턱을 쓸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금 바다정령에 신경을 집중했다.
– 이제 정말 시작하겠습니다.
– 잘 부탁하마.
[인챈트 ‘바다의 봄(?)’ : 성공 확률 ?%– 높은 확률로 특수 효과가 부여됩니다.
※ 주의 요망! 매개의 상태가 매우 불안정합니다.]
아키스가 짚어 준 부분에 바닥에 작성한 회로를 옮겨 그렸다. 산만하게 돌아다니던 아이들이 어느새 내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혹여 획이 삐치기라도 할까, 손끝을 바짝 세웠다. 한 획, 한 획 그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여기 이 부분은 조금 수정하는 게 좋겠어. 아, 이쪽 식도…….’
정령의 얼개는 최대한 그대로 두되, 해주 효과가 발현할 수 있도록 내 남은 정신력을 전부 기울였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마무리될 즈음엔 내 숨소리까지 거슬릴 지경이었다.
다만 언뜻 들리는 희미한 멜로디만큼은 기꺼웠다. 따뜻한 곡조의 환청이 틈만 나면 급해지려는 마음을 눌러 주었다.
– 인챈트 ‘바다의 봄’을 적용.
마지막 매듭을 맺은 뒤 곧장 ‘바다의 봄’을 부여하겠노라 선언했다.
그와 동시에 꽉 부여잡고 있던 집중의 끈이 끊어지고, 좁아졌던 인지가 탁 트였다.
– 우리의 봄은 다정하고 선명하니. 이 겨울을 두려워 말아요.
[특수 스킬, 영창(C)의 효과로 필드 내의 모든 아군에게 작은 행운이 깃듭니다.] [효과 중첩! 스킬의 효과가 강화됩니다.] [효과 중첩! 스킬의 효과가 강화됩니다.] [효과 중첩! 스킬의 효과가 강화됩니다.]…
나를 둘러싼 바다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 환청이 아니었어…….
손을 휘둘러 시야를 가리고 있는 메시지를 지웠다.
손에 손을 맞잡고 노래하는 바다사람들, 소라고둥을 꽉 쥔 채 노래하는 아테라, 인간형으로 변해 차태양과 함께 몸을 들썩이는 도깨비, 언제나처럼 팔짱 낀 채 근엄한 척하는 윤수호, 보석함을 품에 안은 이강토, 전부 잘 될 거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한차현.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꽃이 피는 날, 우리는 다시 만날 거예요.
그 풍경을 본 순간, 더 이상 불확실이 두렵지 않았다.
이 작은 축복이 이곳에 봄을 불러오기를.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마력을 불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