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85
제85화
22. 결초보은 (2)
“우리 이만 헤어져.”
냉랭하게 말한 여자가 제 옆에 선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표정의 남자가 바지에 손을 쓱쓱 닦으며 화답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하자고.”
“……?”
“뭐. 불만 있어?”
여자의 질문에도 남자는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채 묵묵부답이었다. 참다못한 여자, 박신주가 제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아아, 반말 때문에 그러시나? 윤수호 헌터님?”
“……그것 때문은 아닙니다만.”
“나는 가호랑 친구, 당신도 가호랑 친구. 그러면 우리도 친구 아니겠어? 나만 말 놓는 게 꼬우면 당신도 놓던가.”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삼단논법이었으나, 윤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윤가호가 ‘친구’로 보인다는 것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아이씨, 한차현 헌터가 꼭 문제라니깐!”
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박신주가 스피커를 소환했다. 기타 소리에 맞춰 발끝으로 톡톡 땅을 두들기던 박신주가 돌연 윤수호에게 말을 걸었다.
“가호가호랑 오붓하게 지낼 절호의 기회였는데…….”
***
한차현과 윤가호의 의견에 따라 일행은 셋으로 쪼개졌다.
가장 먼저 천산팀, 한차현이 스킬을 이용해 차태양을 돕기로 하며 구성된 팀이다. 두 사람은 사로뫼와 함께 천산에서 백아 없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찾기로 했다.
여기서 남은 인원이 다시 두 팀으로 나뉘었다.
누가 윤가호와 같은 팀이 될 것인가를 걸고 벌어졌던 쟁탈전은 한차현에 의해 종결되었다. 그때를 떠올린 박신주가 괜히 돌멩이를 걷어찼다.
‘가호 씨, 이강토 씨를 부탁드립니다.’
‘……예.’
짧은 논의 끝에 윤가호와 이강토는 소한에서 백아의 행방을 수소문하기로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남겨진 박신주와 윤수호가 한 팀이 되었다. 두 사람은 천화강을 따라 도보로 이동하며 백아의 여정을 되짚게 되었다.
유유히 흐르는 천화강을 보며 박신주가 투덜댔다.
“이강토 헌터랑 당신은 어떻게 굴었길래 그렇게 불신당하는 거야?”
박신주가 무어라 말하든 묵묵히 길을 떠날 준비를 하던 윤수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쪽들이 못 미더우니까 하나씩 찢어서 우리한테 맡긴 거잖아. 이런 신뢰는 사양이라구, 정말!”
“그 반대 아닌가.”
“뭐어? 날 당신에게 맡긴 거라고? 근거 있어? 있냐고!”
“등급, 실적, 책임감.”
네가 낫네, 내가 낫네 유치한 언쟁은 한동안 이어졌다. 몇 문장을 던져도, 돌아오는 것은 단답 뿐이니. 드물게도 지친 박신주가 먼저 두 손을 들었다.
“됐다. 내가 당신이랑 더 말하느니 목석이랑 얘기하고 말지.”
조약돌을 주워 마커를 새긴 박신주가 그것을 강 건너편으로 던졌다.
“난 저쪽, 당신은 이쪽. 보고하기 전에 입 맞춰야 하니까 그전에 연락하고. 오케이?”
“그래.”
“근데 그쪽 가호한테도 그런 식으로 말해?”
스킬을 발동하려던 박신주가 윤수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질문의 의중을 모르겠다는 듯, 윤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괜한 걸 물었네. 그쪽도 가호 성격 알지? 계속 그렇게 굴었다간 걔 정말로 당신이랑 연 끊을지도 몰라. 조심하는 게 좋을걸?”
“……무슨 뜻이지?”
“이 이상 떠먹여 줄 생각 없어. 알아서 생각해.”
이렇게까지 말해 줬는데도 느끼는 게 없다니. 역시 사람은 외양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일부러 들리게끔 혀를 찬 박신주의 인영은 이내 사라졌다가 강 건너편에서 다시금 나타났다.
잠시 고민하던 박신주는 결국 떠나기 전, 손나팔을 만들어 소리쳤다.
“신주 누님이라고 부르면 알려 줄 수도 있는데!”
우두커니 서 있던 윤수호는 그에 답하지도 않고 휙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흥, 나중에 도와주나 봐라.”
강변은 순식간에 고요해지고 방금까지의 소란은 거짓말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그를 보고 입을 비죽인 박신주 역시 강가를 떴다. 짧지만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
‘그 고집불통들이 순순히 같이 다닐 리가 없지.’
아마 지금쯤 벌써 갈라섰으리라. 그게 아니라면 대판 싸우고 있겠지. 우리를 소한에 바래다주던 때부터 으르렁대지 않았던가. 안 봐도 훤했다.
“김 서방, 또!”
“후, 마음대로 이탈하지 말라 했을 텐데요.”
이강토는 소한에 도착한 이래로 조금만 눈을 뗐다 싶으면 멋대로 사라졌다. 거기다 어쩜 그렇게 기척도 없이 움직이는지. 도깨비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몇 번은 놓쳤을 것이다.
‘목줄을 채우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아까 들은 한차현의 조언이 나를 유혹했다.
“아니, 그래도 이강토 헌터한테도 인권이 있는데 그건 아니지.”
팔랑팔랑 멀어지려는 이강토의 삼색 띠를 움켜쥐었다.
“병을 쫓는 신통한 부, 부적이 있대서요.”
“그게 저희 업무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어, 음, 그러게요?”
삼색 띠를 놓아 주며 구경하고 오라 말하자 녹안이 유리구슬처럼 반짝였다.
“진짜요?”
“대신 가서 근 몇 년 사이 기이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지 넌지시 물어보고 오십시오.”
“예에? 너, 너무 어려운 걸 시키시는 거 아니에요?”
“못 하겠다면 관두시…….”
“하, 할게요! 할 테니까요!”
내가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까 이강토는 쪼르르 좌판으로 달려갔다. 삼색 띠가 달랑이는 뒷모습이 꼬리 흔드는 강아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름다움을 운운할 때가 아니면 이강토의 언변은 참혹했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나를 볼 때면 늘 찬양 일색이라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설상가상으로 낯가림도 심해.’
그렇다고 해서 내 말재주가 좋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필연적으로 npc들과 부딪혀야 하는 이곳에서 불리하기 짝이 없는 조건이었다.
“뭐, 날 걱정해서 여기에 보낸 거지만.”
온의 수도를 병풍처럼 둘러싼 산세는 대단했다. 서쪽에서 이곳으로 진입하려면 무조건 저 산을 넘어야 한다. 제법 떨어진 이곳에서도 저리 거대하게 보일 정도니, 여정팀이 되었다면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서쪽 궐이 천혜의 요새라고 불리는 것도 저 산맥 때문이라지.”
“그럼 뭐하니. 여기고 저기고 죄 부정을 탔는데.”
“아직 영물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습니까?”
“응! 이 근처에는 없는 것 같아.”
손끝으로 도깨비를 쓰다듬자 웃음소리를 닮은 금속성이 울렸다.
“소리 씨 덕분에 마음이 든든합니다.”
“태양이가 좋아하는 김 서방이니까 도와주는 거야!”
“예,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함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차현 헌터가 있으니 천산 쪽은 걱정하지 마시고요.”
차태양과 떨어지는 법이 없는 도깨비가 굳이 우리와 함께 온 것은 사로뫼의 말 때문이었다.
‘백아와 동행한 영물이 있다.’
7년 전, 온 이곳저곳에 방이 붙었다. 죽을병에 걸린 아비가 마지막 여한을 풀기 위해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그 소식은 천산까지 흘러 들어왔다.
사로뫼와 백아는 곧바로 그 아이가 백아임을 알아챘다고 한다. 백아의 등에 있는 특이한 모양의 점이 묘사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사로뫼는 만류했으나 백아는 낳은 은혜를 갚겠다며 기어코 소한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때까지 서녘으로 떠나지 않았던 영물 하나가 백아와 동행했다.
인간에게 7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백아의 인상착의를 받아 적기는 했으나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백아가 아니라, 그 영물을 추적하기로 했다. 그를 찾으면 백아의 행방은 절로 딸려올 것이다.
“우렁이 영물이랬지? 우리 쪽과 비슷하다면 쉽지 않겠구나.”
“크기가 작아서 그럽니까?”
“뭐어? 아하하, 김 서방 그 말 우렁이 만나면 꼭 해 줘!”
너무 1차원적인 생각이었나? 폭소하는 도깨비를 보자니 괜히 멋쩍어졌다. 한참 뒤, 겨우 웃음을 멈춘 도깨비가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본질은 쉽게 바뀌지 않거든. 음, 김 서방은 우렁이라고 하면 뭐가 제일 먼저 생각나?”
“……까만 껍질?”
“그치? 우렁이란 놈들은 단단한 껍질 속에 제 몸을 감추고 있잖아. 그래서인지 우렁이 영물은 하나같이 차분하고 숨는 데는 도사야. 같이 숨바꼭질이라도 했다간 해가 지기 일쑤라니깐!”
그래도 자신이 있으니 걱정 붙들어 매라며 도깨비가 자부했다.
하지만 그날 해가 기울 때까지 우리는 그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산 잡동사니를 양손 가득 든 이강토가 음울하게 중얼댔다.
“오, 오늘 치 기운을 다 썼어요. 사람은 이제 그만…….”
“신줏단지 처자는 오늘도 안 오는감?”
“히이익!”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강토가 주모를 피해 달아났다. 저보다 작은 내 뒤에 숨어서 뭘 어쩌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내버려 두었다.
“당분간은 바깥에 일이 있답니다. 지금 식사 가능한가요?”
“뒤채로 가져다줄 테니 슬렁슬렁 들어가 계슈! 탁주도 한 사발 내올까?”
“아뇨, 그건 됐습니다.”
“옛날엔 우리 집 탁주 때문에 저 담장 너머까지 줄을 섰는데……. 딱 한 동이만 먹어 보지 그러우? 약초 반 묶음만 주면 내 가득히 내오리다.”
이렇게까지 권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지금은 근무 중이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재차 거절하려던 찰나, 주모라면 무언가를 알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주점에는 온갖 소문이 몰려들기 마련이잖아.’
“그렇게 좋다면 어쩔 수 없지요.” “유, 윤가호 헌터, 술 마시시게요?”
“여기 술값은 먼저 드리겠습니다. 좋은 놈으로 가져다주세요.”
요구했던 것보다 몇 배는 많은 양의 약초를 건네받은 주모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그 뒤로는 모두 일사천리였다.
내가 의도했던 대로 주모는 상다리가 휘어지게 음식과 술을 내왔다.
“이 친구가 술을 못합니다. 혼자 마시기는 영 적적한데 한잔 같이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제, 제가 술을 못 한다고요?”
“한 잔만 마셔도 고주망태가 되지 않으십니까.”
회식 때 보았듯 상당한 애주가인 이강토가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이 나름대로 가여워 보였으나 가뿐히 무시하고 주모에게 잔을 내밀었다.
“손님도 없는데 나야 좋지.”
내가 신주와 친구라는 것을 알린 뒤로부터 주모는 나를 부쩍 편하게 대했다. 지금쯤 야영하고 있을 신주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전했다.
밤이 깊어짐에 따라 빈 술동이가 하나둘 늘어갔다. 술도 마셨겠다, 매상도 올렸겠다 잔뜩 기분이 좋아진 주모는 내 뜬금없는 질문에도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이상한 소문?” “요새 소한이 워낙에 흉흉하지 않습니까. 미심쩍은 곳이 있으면 피해 다니려고요.”
“암! 젊은 처자들이 조심해야지, 물론! 어디 보자…….”
주모가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의 지명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별달리 이곳이다 싶었던 곳이 나오지 않아 이만하려던 그때, 주모가 제 무릎을 탁 쳤다.
“어휴, 내 정신아. 거기 얘기해 주는 걸 깜박했네.”
“거기라 하심은?”
“몇 년 전부터 귀신이 들렸다고 소문이 자자한 집이 있거든. 다른 덴 몰라도 거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슈. 험한 꼴 보기 딱 좋으니까.”
거기로구나. 주모 몰래 입술을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