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icked up a black panther and became a duchess RAW novel - chapter 94
그리고 마침내 체이스 후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모두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뜻깊은 자리인 만큼 부디 오늘 하루 원하는 성과를 얻어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귀부인과 영애들이 너도나도 대화를 열기 시작했다.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정원 가득 말소리가 오가며 적막을 채웠다.
그리고 에밀리나는…….
“안녕하세요, 공작부인. 다시 한번 인사드립니다. 세리카 체이스라고 해요.”
“……반가워요, 체이스 영애.”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곧장 말부터 걸어온 세리카를 상대하느라 진땀을 빼게 된 것이다.
정말이지 너무 당황해서 하마터면 혀까지 씹을 뻔했다.
‘그러지 않아 천만 다행이지.’
만약 그랬더라면 창피는 물론이고 뒤에서 웃음을 샀을 테니까.
다른 건 몰라도 저 양면성 짙은 인간들에게 웃음거리를 안겨 주고 싶진 않았다.
에밀리나가 그렇게 생각하며 제 괜찮은 처신에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때였다.
세리카가 입술을 부드럽게 휘어 다음 말을 꺼냈다.
“부인과는 한번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매번 상황이 맞지 않아 너무 아쉬웠어요. 그래도 이렇게 일찍 기회가 찾아와 설레지 않을 수 없네요.”
그래…… 네가 그동안 나한테 관심을 오죽 보였어야지.
모른척 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지금도 그 여전한 관심 때문에 아주 뜨거운 눈빛들을 받고 있었고.
힐끔힐끔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관심없는 척 수다를 떨고 있는 주변 귀부인들과.
‘그러다 내 얼굴 뚫리겠다.’
저기 저 중간에 있는 영애들의 불타는 시선이 말이다.
곁눈질로 슬쩍 살피니 질투와 시샘, 부러움 등. 하여간 추악한 감정으로 보는 이가 여럿 있었다.
‘어휴. 표정 관리 좀 해라.’
쟤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교양 높은 중앙 사교계라면서 일반 사교계 영애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저리도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데 무슨 차이가 있다고 그리 구분지어 놓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뭐, 애초에 그간 보인 태도가 있어 저럴 줄 알았지마는.
어쨌든.
‘하, 그래서 바로 말 걸어 올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그녀의 오판이었다.
상황 좀 지켜보다가 라젤라 백작 부인을 통해 대화를 유도할 줄 알았는데, 제대로 헛다리 짚은 것이었다.
에밀리나가 달갑지 않은 시선을 철저히 숨기며 천역덕스럽게 말을 뱉었다.
“이런. 영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할 텐데요. 제가 말주변이 없어 나눌 이야기가 많을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완곡한 말투로 최대한 돌려 말했지만, 세리카의 철벽도 만만치 않았다.
“농담을 잘하시네요. 이야기 꽃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제길. 그냥 좀 적당히 넘어가라고.
에밀리나가 싱긋 웃었다.
“그럼요. 체이스 영애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한번 해본 말이었어요. 어때요, 제법 괜찮은 농이었나요?”
세리카가 눈매를 곱게 접었다.
“후후. 제법 괜찮았답니다. 저도 말재간이 없다보니 한수 배워보고 싶을 정도였어요.”
……이건 뭘까. 대체 무슨 대화의 흐름일까.
에밀리나는 찰나간 복잡한 시선으로 세리카를 바라보았다.
저건 대체 비꼬고 싶은 건지, 친해지고 싶어 저러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세리카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으니 말속의 가시를 구분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한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는데.
‘이제 대화를 피하기는 글러 먹었다는 거야.’
데뷔탕트 때부터 제게 묘한 관심을 보이고 있더라니.
그때부터 싹수를 알아봤어야 했다.
정말이지 끈질긴 영애가 아닐 수 없다.
당시에 제대로 된 선을 그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아쉬운 상황에 부닥치지도 않았을 테니까.
예를 들어, 한 성깔 하는 모습으로 상대를 질리게 하는.
저와 상종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무례하게 행동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저를 기피하고 싶을 만큼 추억을 심어주지 않은 게 에밀리나를 안타깝게 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미 지나가 버린 일에 후회해봤자 바뀌는 건 없었다.
상황이 변하는 것도 아니니 그녀는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영애에게 그런 칭찬을 받게 되다니. 이거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네요. 말이라도 고맙게 받을게요.”
“저는 진심으로 드린 말이었는걸요. 그러니 세워주지 않으셔도 돼요.”
“그런가요?”
“그렇답니다.”
호호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한차례 웃음을 주고받았다.
에밀리나는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는 기분을 느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꿋꿋한 미소를 유지하며 세리카를 보고 있으니 그녀 또한 입술에 매끄러운 호선을 그린다.
에밀리나는 피로감이 들었지만 안색을 바꾸진 않았다.
여기서 표정을 드러내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었으니까.
그리고 뭔가 지는 기분이었다.
세리카와 경쟁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냥 여기서 굽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태도를 하나하나 주시하는 시선이 있었다.
별거 아닌 행동으로도 꼬투리를 잡힐 수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에밀리나가 그렇게 생각하며 세리카와 눈을 맞추는데, 그녀가 말없이 입꼬리를 더욱 끌어올렸다.
슬슬 짜증이 밀려올 정도로 말이다.
‘이제 제발 좀 본론으로 넘어가 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생각이 있기는 한 것인지.
세리카는 여상한 태도로 미소짓고 있었다.
저와 기 싸움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말을 꺼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놈의 진심을 내보이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건지 대화를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분명 제게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데 말이다.
귀족의 화법이란 이래서 피곤했다.
본론을 꺼내기까지 한세월이 걸리니 성질 급한 그녀로서는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대화에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답답함에 못이긴 에밀리나가 먼저 말을 꺼내게 되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함이었다.
절대 자신이 먼저 꼬리 내린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녀에게 졌다고 할 수 없었다.
선뜻 말을 건네지 못하는 세리카를 위해 손수 대화를 이끌어 주는 것이니까.
에밀리나가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제게 궁금한 것은 따로 없는 걸까요? 영애의 관심이 무척 깊으니 있으리라고 생각돼서요.”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줬는데, 또 말을 돌릴 생각은 아니겠지?
에밀리나가 딱 그런 눈빛으로 세리카를 바라보았다.
또한 주변에서는 흥미진진한 대화의 서두에 귀를 쫑긋 세우는 기척마저 내고 있었다.
그런데 세리카는…… 정말이지 보통 영애가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디트리오 공작부인을 궁금해하지 않을 사람이 어딨겠어요.”
세리카는 그렇게 말하며 붉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살풋 미소 지으며 다시 시선을 들었다.
“하지만 호기심을 충족하고자 부인과 대화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싶진 않네요. 저는 부인과 친해지고 싶어 말을 건넨 것이지, 반감을 사기 위해 대화를 건 것이 아니니까요.”
그 순간 주위에서 아주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세리카의 말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귀부인과 영애들이 무심코 뱉은 신음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빌어 호기심을 충족했으면 했는데, 그 기회가 사라져버렸으니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에밀리나 또한 저도 모르게 거짓말하지 말라며 정색할 뻔했다.
애초에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찾아오겠는가?
‘아, 사냥제 때가 있긴 하겠네.’
그래도 그때는 제가 먼저 피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 에밀리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리카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제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부인께서 디트리오 공작가에 적을 두기 이전부터 꽤 관심이 많았거든요.”
당연히 알다마다. 에밀리나라고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아주 잘 알고 있을 만큼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껏 내내 그 이야기를 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던 것이지.
그녀의 의문스러운 관심을 어떻게든 피해 보고자 말이다.
그 관심 때문에 피곤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정면으로 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소용없게 되었다.
그래서 종국에는 얘가 대체 왜 이럴까 싶어 본심을 듣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세리카가 먼저 회피하고 있으니.
아니, 피하고 있는 것인지 말을 꺼낼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로서는 세리카의 의중을 알 턱이 없어 복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는 행동을 보면 확실히 제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닌 거 같은데 말이다.
그러던 중 세리카가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일전의 무도회에서도 말을 붙이고 싶었는데, 상황이 참…….”
너그럽지 못했다며 에밀리나에게 짐짓 서운하다는 눈짓을 보냈다.
이 말의 의미는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라는 시선이었다.
그래서 에밀리나는 되레 찔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인정했으니까.
그날 제가 대놓고 피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눈치 빠른 그녀가 몰랐다고 하는 것이 더 이상할 터였다.
책망하는 듯한 세리카의 시선에 신음을 삼키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에밀리나도 에밀리나 나름의 사정이 있었는데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게다가 빙빙 돌아가는 대화도 결국 제자리걸음이라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되었다.
그런데 그때, 예상치 못한 지원이 들어왔다.
“저런. 체이스 영애가 많이 속상했었군요. 영애의 마음을 이해해요. 저 또한 공작부인과 미리 알고 지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답니다.”
라젤라 백작 부인이었다.
“왜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무척 아쉬울 정도예요. 그만큼 디트리오 공작 부인은 무척 좋은 분이시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