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17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017화
017
신기하다는 듯, 리무진 내부를 둘러보던 실비아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삼 류리크 씨가 엄청난 부자라는 걸 느꼈어.”
“부자는 아니다. 이 리무진도 굳이 따지자면 가문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하긴, 진짜 부자였다면 진즉에 내 돈을 갚았을 테지. 도박장 구석구석 돈 꾸러 다니지도 않았을 거고.”
대체 이놈은 온 사방에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다닌 건가. 언젠가 날 한 번 잡고 싹 다 청산하긴 해야 할 듯싶었다.
“그래도 60만은 갚은 셈이니 다행이로고.”
“어, 잠깐만. 그 60만이 혹시 내 60만은 아니지?!”
“정확히 그게 맞다.”
내가 딱 잘라 말하자 실비아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한다. 그녀의 얼굴에 당황과 불만 등의 감정들이 뒤섞였다.
“잠깐만. 류리크 씨. 대학에 들어가게 해주는 건 고맙지만….”
“애초에 후인의 반지에 60만의 값어치를 매긴 건 너였다. 이걸로 그 값어치는 했을 터.”
나는 논리적으로 충분히 납득 할 수 있는 설명을 했지만 실비아가 그건 아니지, 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학교에 학생으로 가는 거랑 호위로 가는 건 얘기가 다르지. 나는 정식으로 수업도 못 듣고, 학교 친구들이랑 놀지도 못하는 거 아냐?”
“애당초 네 목표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그 마법’의 부흥을 이끄는 것 아니던가. 샤프란 대학은 그저 연구실적과 논문 발표를 위한 수단일 뿐.”
등위를 받지 못했다 해도, 루나사 수준의 실력이면 어디 가서도 대접받을 수 있다. 샤프란이 아닌 다른 대학이라면 교수 자리까지도 노려볼 위치.
결코 학생으로 들어가 배움을 구할 처지는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그녀의 목표는 그것뿐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내 예상이 적중했는지 실비아가 기가 막히다는 듯,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이, 진짜. 대체 내가 얼마나 술에 취했길래 류리크 씨한테 그런 것까지 말한 거야?!”
“뭐, 그 술김 덕분에 이런 기회가 생겼으니 좋은 것 아니겠나.”
“…그보다도 헤루인인 류리크 씨한테 된통 당한 걸 보면, 대학에서 다시 배워야 할 거 같은데.”
“그건 내가 너무 유능해서 그런 것이니 괘념치 말라.”
나는 눈짓으로 ‘그래서 60만은?’이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그러자 실비아는 푹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60만은 그걸로 퉁치자고. 하지만 내 친구들 건 꼭 갚아야 돼.”
“그쪽은 여유가 생길 때 하도록 하지.”
내가 여유롭게 웃어 보이자, 실비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참, 내가 알던 류리크 씨랑은 너무 다른데. 당신, 류리크 씨가 맞긴 한 거야?”
“………….”
그녀는 장난삼아 물어본 것일 테지만, 실은 그것 때문에 꽤 많은 고민을 했다.
망나니로 돌아갈 수는 없고, 달라진 모습을 밀고 가자니 주변은 의심하고. 그래서 삼일 정도 고민한 끝에 나름 최적의 답을 준비해 놓았다.
“어릴 적의 나는 아스트레이의 신동이고, 세기의 천재였다. 헌데 그 어린아이가 달라져 끔찍한 망나니로 전락했지.”
“흐음. 나는 망나니였던 류리크 씨가 싫진 않았는데.”
“그 망나니가 다시 한번 달라져 지금이 되었으니… 뭐, 사람 일이란 모른다는 말인 게지.”
사람은 바뀌는 법, 이 당연한 것을 너무 어렵게만 생각했었다.
설명을 들은 실비아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손뼉을 치며 말했다.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응? 뭔데?”
나는 장난기 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 호위다. 그리고 호위는 보통 주인에게 반말을 사용하지 않지.”
“………….”
“그런데 자네는 지금 내게 반말을 하고 있군.”
줄곧 생생하게 움직이던 실비아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류리크 씨, 설마 지금….”
“농담이다. 부르던 대로 부르거라.”
피식, 내가 가볍게 웃어 보이자 실비아가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나, 지금 진짜로 류리크 씨의 쫄따구가 됐다는 걸 느꼈어.”
* * *
제도 뤼겐베르크의 북동부, 로팅엘 구(區).
황성에서 한참 떨어진 그곳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다. 그 규모는 러시아의 바이칼호처럼, 도시 정도가 아니라 어지간한 국가 규모의 크기를 자랑한다.
그 호수 위에 샤프란은 마치 오래된 고성(古城)처럼 고고히 자리 잡고 있었다.
“…와, 진짜 멋지다.”
“실제로 보면 훨씬 더 크게 느껴질 거다.”
“실제라니? 지금 보고 있는 그대로잖아.”
“레이칼 호(湖)는 수많은 결계로 인해 마력의 흐름이 뒤틀려 있어, 저 안과 밖은 전혀 다른 세계로 구분된다. 여기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지.”
실제 샤프란 대학이 있는 호수 위의 ‘섬’은 지도상으로 표시되는 것보다 몇십 배는 넓다. 마법 왜곡이 그런 결과를 일으킨 것이다.
“아, 알고 있었거든! 내가 샤프란에 들어가려고 얼마나 많은 걸 알아봤는데!”
“그러면 길 안내와 등록까지 자네에게 맡겨도 되겠나.”
“…솔직히 말해서 입학 전형밖에 안 알아봤습니다… 죄송합니다….”
“흠흠. 학교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거라.”
샤프란은 호수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다리로 이어져 있고, 그것을 건너기 전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다.
“여기가 샤프란의 입학처다.”
내가 눈앞의 작은 요새를 올려다보며 말하자, 실비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입학처라기보다는 무슨 요새인데?”
“샤프란은 대륙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는 최중요 시설이다. 당연히 외지인의 출입을 철저히 금하는 만큼, 여기가 그 관문 역할을 하는 거다. 때문에 안에는 제도방위군 소속 군인들도 있지.”
입학처가 학외에 존재하는 기형적인 형태, 그것도 높은 언덕에 방벽과 첨탑으로 둘러싸인, 마치 작은 요새와 같은 모습이니 독특하다면 독특하다고 볼 수 있었다.
샤프란의 입학처를 보는 건 처음인지, 실비아가 질색을 했다.
“엑… 학교가 살벌한 건 둘째치고, 무슨 계단이 이렇게 많아?”
“샤프란의 캠퍼스는 이보다 더할 거다.”
나는 실비아를 다독이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절반쯤 올라왔을까, 로팅엘 구의 정경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오며 저편에서 열차의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뿌우우우우…!
제국 횡단 열차가 도착한 것이었다.
「 이번 역은 샤프란 마법 대학역. 샤프란 마법 대학 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오른쪽 문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번 역은…. 」
기차가 정차하자,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애초에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이 아니기에, 아마 저들의 대부분은 샤프란의 신입생이고, 몇몇은 그들을 따라온 학부모들일 터였다.
실비아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어, 어마무시한 인파!”
저기에 휩쓸렸다간 절차가 한참은 늦어질 게 뻔했다. 나는 토끼 눈을 하고 있는 실비아를 툭 건드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입학 등록까지 해야 하니, 서두르도록 하지.”
한시바삐 계단을 오르고, 요새의 입구와도 같은 부분을 지나자 접수처의 플랫폼과 직원들이 보였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직원이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샤프란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신입생이십니까?”
“그렇다.”
“신입생이라면 입학증서를 제출해주십시오.”
나는 후인의 반지를 내보였다. 그러자 접수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그쪽도 신입생입니까?”
“저는….”
“내 호위다.”
내가 대뜸 그리 말하자 접수원의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호위 말입니까?”
“본인의 이름은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샤프란의 학칙 142조 17항에 의거해, 바타체스의 이름을 지닌 황족은 학내에 호위를 하나 둘 수 있게 되었을 터.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자 직원의 얼굴에 물음표가 연달아 떠올랐다.
“142조, 17항이… 어… 그… 렇군요. 잠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접수원은 연신 당황한 티를 내더니 데스크 뒤편으로 사라졌다.
“류리크 씨. 접수원 언니가 왜 저런데?”
“별거 아니다. 황족이 호위를 데리고 입학한 게 130년 만이니 조금 당황한 게지.”
내가 덤덤하게 말하자 실비아가 입을 떡 벌렸다.
“…류리크 씨는 130년 전에 쓰던 학칙을 들먹이면서 날 데려온 거야?”
“본인의 비상한 두뇌와 노고에 감탄하도록.”
10초 정도 지나자, 이번엔 상급자로 보이는 다른 직원이 걸어 나왔다.
남자는 바타체스라는 이름 때문인지, 망나니라는 별호 때문인지 무척이나 격식을 갖추어 말했다.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입학하시기에 앞서 호위에게 몇 가지 확인 사항이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저 멀리 먼지구름을 몰고 오는 인파를 향해 고갯짓하며 말했다.
“저쪽보다 늦지 않게만 해주게.”
“금방 끝날 겁니다.”
싹싹하게 웃은 그는 실비아에게 다가갔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실비아 옥스턴 반즈.”
그 대답과 함께 허공에 종이와 펜이 나타나더니 알아서 움직이며 그 이름을 써 내려갔다.
“실비아 옥스턴 반즈… 혹시 훈장이나 등위가 없습니까?”
“없는데요.”
영업용이라고 땜질이라도 한 것 같던 직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톡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불쑥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것이… 잠시, 만 기다려주십시오.”
슬쩍 종이를 보니 마도 등위, 혹은 기사 훈장에 대해 기입하는 란이 있었다. 아마 저기를 공란으로 넘겨도 되는지, 남자도 모르는 것이리라.
“죄송합니다만. 다소 절차에 시간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입학식에 늦지 않았으면 하네만.”
“그쪽은 문제없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30분… 아니, 40분만 기다려주십시오. 잠시 다른 곳에 다녀오셔도 좋습니다.”
남자는 잰걸음으로 사라졌고, 어느덧 신입생의 인파는 지척까지 다다랐다.
“직원 앞에서 매우 감격해서 떨 줄 알았는데… 꽤 태연하더군.”
“나는 지금 류리크 씨의 호위인 거잖아. 내가 류리크 씨 앞에서 다른 이들에게 굽신거리면, 그건 아스트레이에 먹칠을 하는 셈일 테니까. 다른 사람들 보는 앞에서만큼은 체면을 챙겨야지.”
혹시나 해서 걱정했는데, 역시 개념이 제대로 된 친구이다. 하지만 구태여 그 개념을 유지할 필요는 없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너 편할 대로 행동해라.”
“으응? 하지만….”
“귀족들이 넘쳐나는 이 학교에서, 누군가의 호위라는 건 당사자 대신 괴롭히기 좋은 먹잇감이다. 특히나 망나니의 호위라면 더욱 심하겠지.”
나를 싫어하는 놈들은 넘쳐나겠지만, 그 대부분이 아스트레이라는 후광 때문에 선뜻 덤벼들진 못할 터다. 하지만 호위라면 괜히 괴롭히는 놈들이 한둘이 아닐 터.
“여기선 오히려 네가 나를 편하게 대하면서, 나와 비슷한 수준임을 내보일 필요가 있다.”
물론 그녀의 행동거지가 내 위신이나 평가를 떨어뜨릴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의 괴롭힘 때문에 흑화해서 사고 치는 편이 더 곤란하다.’
지금은 약간 힘 있고 철없는 애처럼 보이지만, 비뚤어지는 순간 무시무시한 악역이 된다. 되도록 그런 트리거를 건드리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학교에서 허울 없이 어울리는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고.
“아무튼 시간이 비게 되었군.”
“나 여기 별로 있고 싶지는 않은데….”
실비아가 몰려오는 인파를 보며 그런 걱정을 말했고, 때마침 내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시간을 때울 좋은 생각이 있는데.”
* * *
샤프란 마법 대학, 유월의 정원.
거대한 화원으로 이루어진 이 공간은 마법 결계로 인해, 내부의 모든 것이 6월이라는 시기에 계절감이 멈춰 있다.
싱그러운 햇살에 반짝이는 식물들은 여름의 흐름에 맞춰 짙은 녹음의 빛깔을 뽐내고 있다. 그런 정원의 한 가운데, 조그마한 정자(亭子).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모여 심각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 가운데서 내용을 전달하고 있던 학생은 들고 있던 서신을 접으며 말을 정리했다.
“…라는 것 같습니다.”
사건의 개요를 전해 들은 이들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들 중 하나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비죽이며 운을 텄다.
“아스트레이의 망나니가 샤프란에 입학한다고 들었을 때는 코웃음 쳤는데, 그게 실제로 벌어지게 될 줄이야.”
“마스체니가 후인의 반지를 빼앗길 줄 누가 알았겠어.”
다른 누군가가 흐음, 턱을 쓸며 말했다.
“빼앗겼다는 것도 확실하진 않아. 샤일라가 류리크에게 기사 서임을 받고 칼라모르로 진학했다니까.”
“후인의 반지와 기사의 훈장을 맞바꿨다… 라는 거네.”
이번에는 어떤 남학생이 책상을 탕! 치면서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확실해!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망나니가 벨테인 등위의 마법사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이럴 때 총장님이 나서주면 좋을 텐데….”
누군가 안타깝다는 듯 말하자, 반대편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스트레이의 당주가 3황자잖아. 거기에 황녀인 샤르미넨 총장이 직접 나섰다간 황실의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어.”
“그래. 둘 다 황위엔 전혀 관심 없는 분들이지만, 잘못 불을 지폈다간 황위 계승 건으로 내전까지….”
이야기가 산으로 가듯 흘러가자, 상석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누군가가 손뼉을 치며 중재에 나섰다.
“일어나지 않을 비약은 거기까지 하고, 현안에 집중하자고. 일단 샤르미넨 총장님의 힘은 빌리지 못한다는 전제로 보면 되는 거잖아.”
“그래. 그래. 일단 류리크가 대체 왜 샤프란에 왔는지부터 파악해야지.”
중구난방 복잡하던 이야기가 다소 정리되었지만,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는 못한다. 그들 역시 류리크가 ‘왜’ 샤프란을 선택했는지,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
“…그게 문제란 말이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어.”
“약물 사건 때문에 마법적 소양은 모두 잃어버렸다고 들었는데.”
“가문에서도 좋아하지 않을 걸 억지로 선택했다라….”
쉬이 답이 나오지 않자 좌중의 시선이 어느 한곳으로 모인다. 회의가 시작된 이후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누군가에게로.
“우리 후배 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후배라고 불렸음에도 상석에 앉아 있는 여인.
그녀는 어딘가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글쎄.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