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6
16화 그 사람, 제 남편이거든요
부웅.
하고 차체가 날아오를 때 생각했다.
앞으로 다시는 클레어 씨에게 운전대를 맡기지 말아야지.
우리 차를 들이받은 건 장갑차를 방불케 할 정도로 커다란 밴이었다. 검은 차체에 창문 역시 짙게 선팅되어 있었다.
‘번호판도 없군.’
딱 봐도 뒤가 구린 일에 사용하는 차량이었다.
차량이 몇 바퀴 구르는 동안 에어백이 터졌다. 풀옵션 차량이었는지 에어백은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안전벨트 덕에 시트에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때 순식간에 튀어나온 검은 작업복을 입은 사내들이 다가왔다. 조용하고 신속하게 다가온 그들은 내가 앉은 조수석 차 문을 절단했다.
“조용히 해라. 얌전히 지시에 따르면 신변의 안전은 보장하지.”
그리고 내게 안대와 수갑을 채우고 양쪽에서 팔을 잡은 채로 어디론가 끌고 갔다.
기를 펼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를 자신들이 타고 온 밴에 태웠다. 그리고 좌석에 미리 구비해 둔 헤드셋을 씌워 소리까지 차단하고 출발했다.
“저기…….”
“질문은 받지 않는다.”
그렇다.
나는 납치를 당하는 중이었다.
‘강원도 쪽으로 가는 건가.’
기감을 통해 대략적인 방위까지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위치가 어딘지 몰라서 곤란을 겪을 일은 없어 보였다.
물론 저항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저항할 수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도 수갑을 끊고 이들 모두를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 정도 있었다.
하나는 클레어 씨에게 남들이 보는 앞에서 힘을 드러내지 말라는 충고를 받았던 것. 불야성에서 나온 직후 가면을 벗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은 내 정체를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납치를 한 거겠지만.
둘째는,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뭐 하는 놈들이지?’
이들의 정체와 목적.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다.
이들이 접근한 시점에서 처리하고 심문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확실한 방법이 아니다. 제대로 된 조직에서 보낸 살수들이 임무에 실패하고 자결로 정보 누출을 막는 건 흔한 일이었다.
난 탐정에 소질이 없어서 시체만 가지고 추리하는 법 따윈 알지 못했다. 차라리 살아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심문이라도 하는 거라면 모를까.
이들이 가는 곳은 아마 본거지. 그게 아니라면 납치한 사람을 가두기 위한 임시 거처라도 되겠지. 적어도 지금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쪽 세상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다. 그새 원한을 살 만한 일도 저지르지 않았다. 이들이 납치한 건 나 이도율이 아니라 클레어 씨의 매니저라는 역할에 불과했다.
그리고 난 임시 매니저다. 원래 이 자리엔 나 대신 도은이가 있어야 했다. 그 말인즉슨.
‘원래는 도은이를 납치할 새끼들이었다, 이거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분이 아주 유쾌해졌다. 건장한 사내놈들 사이에 끼어서 타고 가는 밴이, 친구들끼리 엠티라도 가는 대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즐거워졌다.
“…갑자기 춥지 않습니까?”
“잡담하지 마라.”
기다려졌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 * *
“두 사람 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미안.”
클레어가 도은의 병실에 방문했다.
도율이 사라지고, 클레어는 그 근방을 미친 듯이 뒤졌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는 그 주위에 없었다.
고의성이 다분히 느껴지는 사고와 깔끔하게 잘려 나간 차 문. 그리고 사라진 한 명의 사람. 아무리 생각해도 납치였다.
그때 발견한 건 도율이 떨어뜨리고 간 핸드폰이었다. 매니저 일을 시작하며 사 준 최신 기종이었는데, 메모장 앱이 켜져 있었다.
[잠깐 다녀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쓰여 있는 메모와 함께.
클레어도 도율이 나름대로 힘을 갖고 있다는 건 눈치챘다. 하지만 상대가 어느 정도의 실력과 체계를 갖추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 말대로 그렇게 느긋하게 굴 순 없었다.
납치범들이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도은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 걸까. 얼굴을 보면 마음을 정할 수 있을 것 같아 병실에 직접 방문했다.
도은은 혼자 방문한 클레어에게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근데 왜 혼자 왔어? 둘이 싸웠어?”
“…아니.”
“그럼 바람맞았어? 이런, 씨. 내가 그렇게 극진히 모시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다음에 보면 내가 혼내 줄게.”
“아니야, 그러지 마…….”
“지금 편드는 거? 헐~ 뭐야, 뭐야.”
너스레를 떠는 도은의 모습에 클레어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과 반대로 속이 뒤틀리는 듯했다. 머리 위에서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기분.
목에 돌이라도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10년간 실종됐다가 겨우 나타난 네 오빠가, 어젯밤에 납치됐다고? 그리고 자신은 바로 옆에 있었는데 사라지는 걸 보지도 못했다고?
그녀는 지금까지 도은에게 거짓말 한 번 한 적 없었다. 숨기는 사실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토록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은 단순히 편해지기 위해 말하려는 게 아닐까. 사실을 전하고 나면, 도은은 아마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면 마음은 편해지겠지. 그럼 그만큼의 괴로움은 도은의 몫이 된다.
그렇게 되도록 하느니, 이 모든 죄악을 홀로 떠안고 있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숨기고 있는 실력이 예상보다 더 대단한 것이어서, 아니면 납치범들의 수준이 별거 아니어서. 혼자 힘으로 빠져나오고, 사라져서 미안했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오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현실에서 눈을 돌리기 위한 도피일 뿐일까?
“…니! 언니! 내 말 듣고 있어?”
“어……?”
도은이 클레어의 눈앞에 손을 휙휙 저었다.
“내가 말했잖아. 오늘 스케줄 되게 중요하다고. 요거 스무스하게 끝나야 다음 S급 던전 공략 계획표도 차질 없이 나올걸?”
“응…….”
“아무튼 지금까진 순조롭게 착착 진행되고 이쓰. 다 언니랑 오빠 덕분이야!”
오빠.
도은이 그 말을 꺼내자 클레어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 그 인간 오늘 땡땡이쳤지. 취소할까?”
키득거리는 도은에게 클레어가 물었다.
“도은아.”
“응?”
“도율 씨가 없으면… 안 되겠지?”
그 물음에 도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둘이 진짜 싸웠어?”
“그런 건 아니고…….”
“없어도 돼, 그런 인간.”
“뭐?”
의외의 대답에 클레어가 당황한 사이, 도은이 태연하게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막말로, 오빠가 10년 동안 수련한 헌터여서 S급 던전도 혼자 박살 낼 수 있다고 치면, 좀 개연성이 없긴 한데, 아무튼 그래서 갑자기 S급 마석 뿅 하고 구해 와서 자, 이제 치료만 하면 돼. 하고 건네준다 해도…….”
도은이 씨익 웃었다.
“안 받아. 그런 거.”
“왜…….”
“그럼 나랑 언니가 함께해 온 고생은 뭐가 돼? 그런 식으로 숟가락 얹는 거, 내가 허락 안 하지.”
“그래도…….”
“미안. 내가 욕심이 좀 많잖아.”
그 말대로, 도은은 욕심이 많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자신이 했다.
그래서 클레어의 매니저로 자리할 수 있었다. S급 헌터의 매니저 역할을 길드의 지원 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은 달리 없었다. 거기에는 항상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오빠는 딱 지금 해 주는 정도만 해 주면 돼, 보조로. 운전 좀 하고, 밥 먹이고. 그 외에 심부름할 거 있으면 마음껏 시켜도 돼.”
“…….”
“뭐… 또 말없이 사라지는 것만 아니면 바랄 게 없긴 하지.”
분에 넘치는 도움 따윈 바라지 않는다. 곁에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것이 도은이 바라는 전부였다.
도은의 이야기가 끝나자 클레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
“응.”
머리가 맑았다.
무엇이 중요한지 따지고 보면, 결국 해야 할 일이 뚜렷해졌다. 그녀는 지금껏 자신이 애매한 태도를 고수해 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는 망설일 생각이 없었다.
* * *
택시에서 내린 클레어가 방문한 곳은 각성자 지원 센터였다.
건물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사이 그녀를 알아본 누군가가 멀리서 말을 걸었다.
“클레어 씨!”
멀끔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 구면이었다. 몇 번 같이 던전을 공략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이름은 정민성. A급 헌터였다.
남자가 한달음에 달려와 거리를 좁히더니 물었다.
“이런 곳에서 보다니 우연이군요.”
“헌터끼리 각성자 지원 센터에서 마주친 게 왜 우연이죠?”
“그건… 뭐.”
정민성이 멋쩍게 웃더니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오늘은 택시를 타고 오셨습니까? 차는요?”
“사고 났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차가 뒤집혀서 완전히 개박살이 났다. 사실 그녀가 보유한 차량은 그거 한 대가 끝이 아니긴 했지만. 어차피 운전할 사람이 없었다.
“저런. 그럼 새로 사셔야겠네요? 제가 잘 아는 딜러가 한 명 있는데 추천해 드릴까요? 제가 페라리도 이 친구한테…….”
관심 없는 소리는 한 귀로 흘렸다.
그녀의 반응이 시원찮은 걸 깨달은 정민성이 주변을 살피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그 친구가 없군요?”
“그 친구?”
“왜, 매니저라던 친구 있잖습니까. 안 보이네요? 혼자 오셨나요? 하, 이거. 센터 올 일이 있으면 매니저가 알아서 좀 할 것이지…….”
그 말에 클레어가 걸음도 멈추고 정민성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받은 그가 신나서 떠벌였다.
“혹시 그만뒀습니까? 하여튼, 요즘 매니저 중에 사람다운 놈 구하기가 어렵다니까요. 지금 내 매니저도 길드에서 배정해 준 놈인데…….”
“정민성 씨.”
“예?”
정민성은 클레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눈을 빛냈다.
“좀 닥쳐요.”
“…예?”
정민성이 어리벙벙하게 되묻는 말에 대꾸도 없이 클레어가 앞서 걸어 나갔다. 그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있었다. 그녀에겐 잘된 일이었다.
센터 건물에 들어가자 이미 센터장 비서 최지연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클레어 님.”
“오랜만이에요.”
두 사람이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센터장 집무실로 향했다.
오늘 그녀의 방문 목적은 각성자 지원 센터의 센터장 최강현과의 대담이었다. 급히 잡은 일정이었지만 용케 성공했다. 센터장은 역마살이 끼어서 자리에 없을 때가 더 많은데, 운이 좋은 편이었다.
센터장 최강현.
중년과 노년의 기로에 선 듯한 외모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것이었다. 그건 그 역시 각성자이기 때문이다. 헌터라는 직업에서 은퇴한 지는 꽤 됐지만.
“믹스로 괜찮지?”
“그것밖에 없잖아요.”
“난 그게 제일 입에 맞더라이~”
센터장 비서 최지연이 쟁반에 컵을 내왔다. 종이컵이었다. 안에 담긴 건 흔하디흔한 믹스커피. 센터장의 취향이었다.
“무슨 일이냐? 네가 날 다 찾고.”
“도움을 요청할 일이 있어서요.”
“도움?”
최강현이 수염을 매만졌다.
S급 헌터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은 없거나 아주 어렵거나, 둘 중 하나였다. 보통은 길드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는데, 클레어란 헌터는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었다.
“얘기나 들어 보자.”
클레어는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했다.
“사람을 한 명 수색하고 싶습니다.”
“누구?”
“이도율. 제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센터장님도 면식이 있으실 거예요.”
“내가?”
최강현이 고개를 기울이며 턱을 긁자 옆에 선 최지연이 귓가에 속삭였다.
“얼마 전에 센터장님이 주워 온 남자요.”
“아~ 걔! 네가 주워서 매니저로 쓰고 있었냐? 별 신기한 인연이 다 있구만.”
최강현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근데 수색이라니, 뭔데? 뭐, 납치라도 당했냐?”
“네.”
“…진짜냐?”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강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걸로 농담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자세한 경위를 설명하자 최강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헌터가 모는 차를 들이받고 사람을 납치해? 이거 딱 봐도 보통 놈들은 아니군. 짐작 가는 놈들은… 아니다.”
최강현은 질문을 삼켰다. S급 헌터라는 자리가 누구에게 원한을 사야만 노려지는 위치는 아니었다. 들어 봤자 방해만 되는 정보다.
“한데 헌터 본인이 아니라 매니저를? 이러면 일이 좀 복잡해지는데…….”
“왜죠?”
“원칙상 매니저는 길드 소속이잖냐. 센터에선 각성자의 권익을 보호해야 하는데 일반인을 보호하려고 나서면 나중에 위원회 염병할 것들이 지럴 지럴을…….”
최강현이 미간을 주물렀다.
그에 클레어가 설핏 웃었다.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네 일 아니라고 막말하지 말고…….”
“진짜예요.”
아무렇지 않은 듯, 클레어가 툭 하고 내뱉었다.
“그 사람, 제 남편이거든요.”
“…뭐?”
그 자리에 있던 두 사람, 최강현과 최지연 모두 얼어붙었다.
최강현이 이마를 문질렀다.
“…내가 축의금을 냈던가?”
“식은 안 올렸어요. 호적으로 신고만 했죠.”
“그, 그랬구만.”
최강현이 최지현과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그게 언제였지?”
“…한 달은 안 됐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와따, 요즘 애들 빠르네잉…….”
한 달 내에 결혼까지 골인?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여태껏 그런 풍문 하나 없던 클레어 컴벨이 그런 짓을 할 줄은, 두 사람 모두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 문제없는 거 맞죠?”
“그, 그렇지. 각성자의 배우자… 라면야.”
“그러니까.”
그런 두 사람을 앞에 두고 클레어가 테이블 위로 손을 얹었다.
“찾아 주세요. 제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