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5
15화 한눈팔지 마요
클레어 씨와 헤어진 직후.
나는 그녀의 말대로 가게에 앉아 조용히 맥주를 홀짝이며 시간을 죽였다.
이곳은 시간을 때우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맥주는 미지근했고 기본 안주도 별로였다. 주문 메뉴도 맛이 좋을 거라는 기대감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엔 인상이 거친 녀석들까지.
여러모로 술맛 떨어지는 요소들로 가득했다.
차라리 이 근처를 구경하러 돌아다니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클레어 씨와 합류할 땐 핸드폰으로 연락하면 되니까.
“계산이요.”
“예입!”
그렇게 맥주 한 잔만 마시고 카운터에 선 내가 계산을 위해 카드를 내밀었다.
물론 이 카드는 클레어 씨에게 받은 카드였다. 블랙 카드. 단순히 검은 게 아니라 부자들만 쓴다는 그런 카드인 것 같았다. 클레어 씨의 매니저로 활동하며 받는 월급과는 별개로, 그녀가 내게 마음껏 사용하라고 준 카드였다.
캬. 이게 기둥서방 생활이지.
그런데 점원은 카드를 받지 않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기, 손님. 이곳에선 이런 카드를 받지 않습니다.”
“예? 이거 마스터 카든데요?”
“지불은 토큰으로 해 주셔야…….”
토큰.
이곳 불야성에서 쓰는 독자적인 화폐라고 한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클레어 씨가 준 카드에는 그 토큰이라는 화폐를 지불할 방법이 없었다. 달러나 유로와 달리, 공식적인 통화가 아니었으니까.
내게 지불 능력이 없다는 걸 눈치챈 직원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돈도 없는 게 감히 먹튀를 해?”
“돈은 있는데…….”
토큰이 없는 거지.
아직 튀지도 않았고.
마음만 먹으면 장사꾼을 따돌리는 정도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실수. 잘못을 따지면 내게 이런 사실을 미리 알려 주지 않은 클레어 씨의 지분도 있겠지만. 가게 주인은 백 퍼센트 억울했다.
“돈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갚으라고.”
“몸으로?”
“그래. 눈이든 신장이든…….”
“그러죠.”
내가 간단히 수긍하자 오히려 가게 주인이 당황한 눈치였다. 그사이에 나는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뒤늦게 따라온 주인이 물었다.
“이봐! 뭐 하는 거야!”
“몸으로 갚으려고요.”
어차피 클레어 씨가 돌아올 때까지의 짧은 여흥이라고 생각했다.
가스레인지 밸브를 돌려 불을 켜 봤더니, 가스가 틱틱거리며 나오다 말았다. 밸브를 최대로 당긴 건데도 화력이 영 시원찮았다.
이러니 요리가 맛있을 수가 있나. 이런 약한 불로는 고기도 굽다 만 고무 덩어리가 될 뿐이다.
“불 좀 세게 못 해요?”
“모르는 소리! 그 정도가 어딘 줄 알아?”
불야성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확실히 이곳은 조명도 약한 편이었다. 전기나 가스를 마음껏 끌어오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단전에 잠들어 있던 기가 전신을 순환한다.
그 후 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손가락 사이의 마찰을 기점으로 불씨가 튀었다. 그 불씨는 내 내공을 연료로 계속해서 타올랐다.
삼매진화.
불꽃을 일으키는 무공이었다.
가스 불에 옮겨 붙이니 삼매진화는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타올랐다. 이 정도 화력이면 충분했다.
“후.”
손가락에 바람을 불어 잔불을 끄자 가게 주인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건 대체……?”
“음, 스킬?”
“마, 마법사분이셨습니까? 옮겨 붙은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다니, 설마 헬…….”
“그럼 그런 걸로.”
이곳은 불야성.
어차피 가면을 쓴 상태여서 내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무공을 써도 적당히 비슷한 헌터의 스킬이라 생각될 뿐이었다.
아무튼 이걸로 기본은 갖춰졌다. 불이 있으면 안줏거리는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냉장고 재료를 확인한 후, 나는 홀을 턱짓했다.
“가서 주문받아 와요.”
“예… 예!”
가게 주인이 후다닥 달려 나갔다.
* * *
“어이, 주인장. 오늘따라 꼬치 맛이 죽여주는데?”
“어어. 불맛 제대로야.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손님들의 칭찬에 주인장이 조용히 말을 삼켰다.
“마법은 마법입니다만…….”
비밀은 바로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어떤 남자였다.
여우 가면을 쓰고 손님으로 찾아온 그는 맥주 한 잔을 시키고 실망했다는 듯이 가게를 뜨려 했다.
그런데 그는 ‘토큰’이라는 화폐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불야성을 처음 찾은 초객. 그것도 미리 정보를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 얼뜨기였다.
그러나 남자는 맥줏값을 몸으로 치르겠다는 말과 함께 주방에 들어서더니 손가락에서 불꽃을 피워 냈다. 여기까지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마법사 계열의 헌터라면 그 정도는 당연히 가능했으니까.
놀라운 건 그 불꽃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는 중이었다는 점이다. 그 정체는 바로 [헬 파이어]. 상당한 수준을 요구하는 화염 계열 주문이었다.
“오늘 술 잘 받네. 주인장! 여기 맥주 한 잔 더!”
“여기도!”
“예에!”
주문을 받은 가게 주인이 커다란 500cc 잔에 맥주를 따르고 쟁반 위로 옮기는 순간이었다.
“앗, 차거!”
그는 표면의 차가움에 손을 움츠렸다. 가게의 맥주는 원래 이렇게 시원하지 않다. 그런데 지금은 살얼음이 낄 정도로 차가웠다.
‘설마 이것도…….’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불 앞에서 요리를 하는 한편, 이따금 맥주가 든 커다란 오크 통을 어루만졌다. 그 순간 나무 표면 위로 잠깐이지만 성에가 생기는 것을 목격했다.
분명히 얼음과 관련된 주문을 사용한 거였다.
이쯤 되자 가게 주인은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헬 파이어를 쓸 수 있는 수준의 마법사가 맥주 한 잔 값 때문에 불 앞에서 요리를 하는 건 그렇다 쳐도, 동시에 빙결 계열 주문까지 사용했기 때문이다.
화염 계열과 빙결 계열은 완전한 상극. 두 가지 계열의 주문을 익히는 건 ‘마검사’나 ‘성전사’와 같은 듀얼 클래스 헌터만큼이나 희귀하다고 들었다.
그런 인간이 도대체 무슨 변덕으로 이런 낡아 빠진 가게에서 요리나 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맥줏값을 못 내겠단 건 핑계에 불과했고, 사실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그게 훨씬 더 말이 되는 소리였다.
심지어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염통 꼬치를 굽고 있었다. 소스를 바르는 붓놀림에 리듬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고양이 가면을 쓴 여자가 들어왔다. 그 후 벌어진 소동과 여우 가면의 대처를 보아 두 사람은 잘 아는 사이로 보였다.
“이봐, 여우! 주문이 밀렸다고!”
주방에서 뒤늦게 출근한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외치자 가게 주인이 냅다 달려가서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아! 왜 때려요?!”
“제발 닥쳐라. 응?”
그 후 가게 주인은 고양이 가면의 여인 앞에서 손을 비볐다.
“제,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
끄덕.
고양이 가면의 여자는 무척 무뚝뚝해 보였다. 적어도 기행을 벌이는 여우 가면보다는 나았다.
* * *
간단히 인수인계를 마치고 클레어 씨가 있는 테이블에 앉아 지금까지 겪은 일을 전했다.
“…토큰이 없어서 알바를 했다고요?”
“먹힌다니까요, 제 요리 실력.”
특히 고기를 불에 굽는 요리라면 자신이 있었다. 한창 쫓기던 시절엔 산짐승을 잡아서 대충 구워 먹기만 하던 시절이 었어서 불 조절엔 이골이 났으니까.
가게는 아직도 성황이었다. 내가 자리에서 내려오자 손님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맥주는 아직 시원했고 주방에 불꽃도 남겨 뒀다. 적어도 하루는 꼬박 갈 거다.
벌컥!
가게 주인이 서비스로 준 맥주를 한 입. 고된 노동 후에 마시는 맥주는 훨씬 더 각별하다. 빙백신장으로 살얼음이 낄 정도로 차게 만든 맥주여서 더더욱.
“이것만 다 마시고 갑시다.”
“천천히 마셔요.”
클레어 씨는 자기 앞의 맥주는 한 모금도 손대지 않았다. 그래도 재촉하는 기색 하나 없이 느긋하게 기다려 주었다.
“인상적이더군.”
머리 위에서 들린 목소리.
클레어 씨와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다가온 거한이 낸 목소리였다.
2미터는 되어 보이는 키에 터질 듯한 근육. 그리고 일부러 사이즈를 작게 맞춘 건지 근육의 굴곡이 그대로 보이는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얼굴에는 붉은색의 치우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뒤로 넘긴 머리가 회색빛이었다.
노인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머리색과 목소리를 가졌지만, 몸은 웬만한 장정보다도 좋아 보였다.
“겉멋만 잔뜩 든 요즘 애송이들보다 훨씬 재미난 구경이었다.”
“…영광이네요.”
겉멋으로 치면 나도 중간에 불 쇼 좀 했는데. 치우 노인은 그땐 가게에 없었나.
가면 너머, 노인이 황금색 눈을 맹금류처럼 빛내며 물었다.
“이런 곳에서 장난이나 치고 있는 걸 보니, 무료하다고 광고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일자리 찾는 중인가?”
내가 의자를 살짝 빼고 물었다.
“제 실력이 마음에 드셨습니까?”
“제법.”
“그거 안타깝군요. 아쉽겠지만, 오늘은 단순한 기분 전환이었습니다. 전 본업이 따로 있는 사람이라서요. 이쪽이 제 사장님이죠.”
그 말과 함께 나는 마주 앉은 클레어 씨를 가리켰다.
“흠.”
노인은 아쉬운 듯이 침음을 흘리고는 탁자 위에 검은 명함을 내려놓았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라도 연락하도록.”
노인이 떠나고 명함을 확인해 보니 명함은 그저 새까말 뿐이었다. 겉보기엔 아무 글자도 쓰여 있지 않은 검은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뭐야, 장난친 건가?”
클레어 씨의 매니저로 활동하며 요리사 생각은 접은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명함을 받아 기분이 나쁘진 않았는데. 장난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열받았다.
“블라인드 카드예요.”
“블라인드 카드?”
“마력을 주입해야 내용이 보이는 카드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아무나 보지 말라고?”
“그것도 있지만, 가끔은 수준을 테스트할 때도 쓰죠. 순도 높은 마력을 집어넣어야만 작동하도록 만들 수도 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클레어 씨가 대신해서 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으로부터 하얀 물결이 퍼지는 듯싶더니 파문을 따라 글자가 드러났다.
그 글자 내용을 읽으려는 순간, 그녀가 마력을 폭발시켰다. 명함에 퍼진 마력이 글자를 드러내다 못해 새하얗게 타 버렸다.
나한테 관심을 준 데가 어딜까. 혹시 어떤 레스토랑이나 호텔 뷔페가 아닐까, 하고 가졌던 궁금증 역시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되어 버렸다.
“저기요…….”
이게 무슨 짓이냐고 따지려는데, 클레어 씨가 선수를 쳤다.
“한눈팔지 마요.”
“…….”
가면 너머, 그녀가 웃고 있을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인지 오싹했다.
* * *
붉은색 가면을 쓴 회색 정장 차림의 노인. 그에게서는 짙은 피 냄새가 났다.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그런 냄새가.
그래서 클레어는 명함을 읽지도 않고 태워 버렸다.
도율이 이제 와서 다른 일을 찾아보겠다고 하는 것도 곤란했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그런 곳에서 일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모처럼 음지에서 벗어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사람이었다. 꼬드김에 넘어가 다시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건 그녀도 원치 않았다.
‘…단순한 동정심이야.’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혹시 정육점 주인이 아니었을까요?!”
이 인간은 아직도 요리 타령이었다.
클레어가 정중히 물었다.
“도율 씨.”
“예?”
“미안한데 좀 닥쳐 줘요.”
“…예.”
그녀도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심야. 달조차 뜨지 않은 어두운 밤에, 그녀는 현재 드문드문한 가로등 불빛과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의존해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양손은 핸들을 꽉 붙잡은 채였고, 양발은 각각 액셀과 브레이크 패드 위에 올라가 있었다.
돌아갈 때 운전을 누가 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도율은 술을 마신 상태였고, 클레어는 멀쩡했다. 그리고 그녀는 술에 취한 사람에게 운전을 맡길 생각이 없었다.
맥주를 마신 도율이 그녀보다 나을 거라는 의견에는 반박하지 못했지만.
“…클레어 씨.”
“말 걸지 말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앞에만 보는 거 아닙니까? 사이드미러도 가끔은 좀…….”
“그럼 운전할 때 앞을 보지 어딜 봐요?”
도율은 지금이라도 갓길에 차 대자는 말이 목 끝까지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콰앙 하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영문을 알 수 없는 충격이 두 사람을 덮쳤다. 세상이 위아래로 마구 뒤집혔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보니 차체가 뒤집혀 있었다.
“어떤 개…….”
에어백과 안전 벨트 덕에 그녀는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거의 없었다. 반고리관이 마구 흔들려 어지럽긴 하지만 견딜 만했다.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가드레일에 박은 정도론 차가 뒤집혀서 날아가지 않는다. 누군가 작정하고 들이박지 않는 이상.
에어백에 막혀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도율 씨. 괜찮아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 기절한 것일까. 이만한 충격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부탁이 있다면 부디 크게 다치지만은 않았길.
그리 바라며 그녀가 조수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깔끔하게 도려내진 차 문 너머로 바깥 풍경이 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