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50
50화 한판 뜨자고
‘으아……. 내가 미쳤지.’
송민아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너무 화가 나서 다짜고짜 뺨을 갈기고 말았지만, 상대는 마음만 먹으면 건물도 반으로 찢어 버리는 남자였다. 호랑이 꼬리를 밟은 셈이었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두 사람은 결혼한 사이이고 자신은 남일 뿐이지만, 곁에서 이야기만 들어도 화가 치밀어 올랐으니까.
“…가자.”
송민아가 클레어의 손목을 이끌고 바이크에 태웠다. 이윽고 두 사람을 태운 할리 데이비슨이 커다란 배기음을 남기고 도율을 떠났다.
당장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진 것도 없이 바이크를 몰았다. 바람을 쐬면서 머리를 식히면 좀 생각이 날 듯 싶었다. 아예 바닷가가 있는 곳까지 달려 볼까.
그런 생각으로 고속도로에 올라탔는데 뒤에 탄 클레어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배고파요.”
“…그래?”
그러고 보니 던전 공략 이후에 아직까지 아무것도 먹질 않았다.
송민아는 가까운 휴게소에 들러 바이크를 세웠다. 평일 오후 시간대여서 그런지 한산한 편이었다. 우선 눈에 띄는 대로 이것저것 주문해서 바리바리 싸 들고 테이블 위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짧게 인사를 올린 클레어가 소시지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직후 알감자를 입에 두 개나 넣고 우물거렸다. 볼이 미어터질 것 같이 보였다.
송민아가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물었다.
“막내, 너 원래 그렇게 잘 먹었던가……?”
송민아는 꽤 예전에 클레어가 식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지나가면서 본 모습이었지만, 그때의 클레어는 마치 이슬만 먹고 사는 요정처럼 굴었다. 먹는 시늉을 내는 것처럼 깨작거리다가 반 이상 남기고 수저를 놓았었다.
그랬던 그녀와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면,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잘 먹었다. 헌터 특성상 칼로리 소모가 엄청나니 살이 찔 일은 없겠지만.
“…누가 자꾸 먹여 대서요.”
클레어가 우울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송민아도 그게 누굴 떠올리고 하는 말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매니저이자 남편으로 알려진 이도율이 아니면 달리 누가 있겠냐는 결론이었다.
송민아가 커다란 한숨과 함께 사과의 말을 전했다.
“본의 아니게 듣게 된 건 미안.”
“때린 건요?”
“걔한텐 안 미안하고.”
무서운 것과 미안한 건 별개였다.
“확 이혼해 버려, 그딴 놈.”
“…아녜요.”
“아내 울리는 놈은 남편 자격이 없다는 게 내 지론이야.”
“괜찮아요. 원래 그런 사람인 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럼 더 용서가 안 되는데.”
송민아의 말에 클레어가 쓰게 웃었다.
“그래서예요.”
클레어의 대답에 송민아는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도율을 용서하지 못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마치 자신은 행복해질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는 듯, 다가오는 모든 행복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멀어지려 하는 사람이었다.
‘어째서…….’
클레어가 눈물을 보이고 만 것도 그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거절당한 게 아니라, 필사적으로 남을 거절하는 도율의 태도가 슬퍼서.
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가혹하게 구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다른 세상에 있는 동안 있었던 일이 원인으로, 확고한 인식이 가시처럼 박혀든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포기하고 물러설 마음이 들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오였다.
“그 사람한텐 내가 필요해요.”
오히려 반대. 도율이 밀어내고자 애쓸수록, 클레어는 굳세게 나아갔다. 그에게 미움받는 한이 있더라도 굽히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
“으…….”
맞은편의 송민아가 눈을 꾹 감은 채 목덜미를 주물렀다.
단순히 애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거였다면 그딴 놈이랑은 하루 빨리 헤어지라고 윽박지른 뒤 자기가 아는 좋은 남자라도 소개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클레어는 순진하거나 멍청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가시밭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각오가 엿보였다.
누군가는 그런 아이에게 쉽고 편한 길이 있는데 왜 어렵게 돌아서 가냐고 비웃음을 던지곤 한다. 송민아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고생하고 구르고 깨지는 인간을 응원하고 마는 성격이었다.
결국은 송민아도 클레어의 굳은 의지 앞에서 항복을 선언했다.
“…장하네, 우리 막내.”
* * *
“덕분에 살았네, 정말.”
센터장 영감은 환자복을 입고 병상 위에 누운 채로 나를 맞이했다.
“더 늦어지기 전에 자네가 와 준 덕분에 안정을 취할 수 있었지. 덕분에 크게 문제가 생기진 않았다네. 이 정도면 며칠 입원했다 퇴원하면 금방이지.”
핫핫. 아직 나도 현역이라니까.
영감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나는 따라 웃지 못했다. 같이 있는 영감의 손녀, 최지연도 정색을 하고 바라봤다. 영감은 머쓱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크흠. 그래, 길드 하나 완전히 작살 내 버린 건 좀 과하다 싶긴 했지만, 너무 걱정하진 말게. 내가 다 책임질 테니.”
어차피 영감이 밝혀낸 사실을 드러내면 늦든 빠르든 해체될 운명이었다 했다. 결과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말.
그 과정에서 길드의 간부들을 모조리 죽인 건 법치와 거리가 먼 행동이었지만, 영감은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각성자다운 시선이었다.
“무슨 일 있었나?”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죽상을 하고 있으면서…….”
영감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외쳤다.
“아! 반지! 결혼 반지 부숴 먹어서 한 소리 들었구나, 자네!”
“…….”
“거기도 마석이 들어가니까. 음, 반지를 간수 못 하다니. 이건 자네가 잘못했… 아, 아니야. 내 잘못이지. 내가 새로 하나 사 줄 테니까…….”
나는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검게 타 버린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건 필요 없고. 지낼 집이나 좀 알아봐 줬으면 좋겠는데, 가능하면 오늘부터.”
“…그 정도로 심하게 싸웠나?”
영감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귀찮게 계속 캐묻는 것도 싫어서,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내 손으로 다 끝장내고 왔지. 됐나?”
“그으……. 며, 면목이 없네.”
영감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딱히 영감의 탓은 아니었다. 언젠가 이렇게 할 생각이었으니까. 그 시기가 내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을 뿐이다. 잘못한 게 있다면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나 자신일까.
영감은 내 눈치를 살피더니 돌연 결연한 표정을 짓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가 사과하게.”
“다 끝났다니까.”
“상대 말도 들어 봤나?”
“…….”
그걸 떠올리면 일이 복잡해졌다.
클레어가 10년 전 내가 목숨을 구해 준 아이였다. 하지만 그 사실이 이 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되어 주진 못했다.
“…보통 목숨을 구해 준 상대와 결혼까지 하나?”
“그런 경우가 없다고 할 순 없지.”
“그럼 경찰이나 소방관은 중혼을 못 해서 안달이겠군.”
“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진 알겠네. 근데 나만 해도 아내를 만나게 된 계기가 게이트 구조 활동이었으니, 자네 말에 힘을 실어 주긴 어렵겠는걸.”
영감이 히죽 웃었다.
“아무튼 내 의견은 변함이 없네. 둘이 얘기 좀 나눠 봐. 오래, 진득하게.”
“소용없는 일을…….”
“솔직히 자네한테 충고할 기회가 많진 않아. 벌써 내가 본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니까.”
“…….”
“하지만 인생에 있어선 다르지. 여기선 먼저 늙은 영감탱이 말 좀 믿어 보게나.”
영감은 상념이 담긴 목소리를 내뱉었다.
“후회하면 늦어.”
후회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만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매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면 되는 거다.
알고는 있지만, 커다란 힘을 지니고 있으면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괴로움이 따라붙었다. 차라리 내가 이만큼 강하지 않았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넘치는 힘을 가지고도 후회할 일을 만드는 내가 싫었다.
그래서 나는 후회하지 않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게 싫으면, 애초에 소중한 사람을 만들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집 좀 알아봐 달라고 했지?”
영감은 생각에 잠긴 나를 내버려 두고 말을 돌렸다. 비서인 손녀에게 무어라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자네 부탁이니 바로 준비하겠네. 곧 연락이 갈 걸세. 물론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반납해도 좋고.”
그게 정해졌다면 남은 용건은 없었다.
나는 자리를 떴다. 센터장 비서 최지연이 나를 배웅하러 나왔다. 너무 멀리 나올 필요는 없다 생각했지만, 그녀 나름대로 할아버지를 구해 준 은인인 나를 대우해 주는 듯했다.
헤어지기 전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저도 감사드립니다, 할아버지를 구해 주셔서.”
“내가 감사받아도 좋을 사람인가?”
“제 입장에서 보면 그쪽은 전화 한 통에 바로 달려와 준 사람입니다.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최지연이 무표정하게 덧붙였다.
“그쪽이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감사 인사 따윈 사치라고 여기기는 건… 그쪽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 거고요.”
“…신랄하군.”
“자주 듣습니다.”
최지연이 입가를 끌어당겼다.
“클레어 씨는 그쪽과 만나고 많이 변했습니다.”
“……?”
“이전엔 마치 아름다운 인형, 싸우는 기계 같은 모습이었거든요.”
나도 그런 인상을 받았었다. 그 시절의 인상이 흐릿해진 건 모두 거리감의 변화라고만 여겼다. 본래 성격이 그런 것이라고.
오래전부터 클레어를 알고 지내던 최지연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저는 그 변화가 썩 마음에 듭니다. 그러니…….”
“…….”
“모쪼록 아내분과는 잘 해결되길 바라겠습니다.”
나는 무어라 확실히 대답하지 못하고 그 길로 병원을 빠져나왔다.
* * *
“아, 오빠 새끼 또 전화 안 받네.”
핸드폰을 귀에 댄 채 한참이나 통화 연결음을 듣던 도은이 화면을 끄며 투덜거렸다.
“이제 할 일 다 끝났다 이거야? 하여간,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니까. 어떻게 인간이 나이를 먹어도 변하는 게 없냐.”
도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식적으로 동생이 수술대에 눕게 생겼으면 얼굴은 못 비치더라도 전화 한 통 정도는 넣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안 그래? 언니.”
“어? 어…….”
도은이 말을 걸자 클레어가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도은의 말대로 그녀는 곧 수술에 들어간다. 클레어가 S급 마석을 구해 오기만 한다면 필요한 모든 준비가 끝날 수 있도록 미리 대비해 온 덕분이었다.
병원에는 사실상 남인 클레어가 혼자 와 있을 뿐, 가족인 도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아버지 역시 마침 외국에 출장을 가 있는 상태였다. 이쪽은 당장 비행기 타고 돌아오겠다는 걸 도은이 뜯어말린 참이었다.
하지만 어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면서 해외에 나가 있는 사람보다 바쁘게 구는 건 아니꼬웠다. 당장 안 튀어 오냐고 전화를 걸었는데 이젠 전화까지 씹는다. 도은이 자리에 없는 도율을 씹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왜 둘이 같이 안 왔어? 같이 살잖아.”
“…….”
도은의 물음에 클레어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외박을 했다고? 이런 미친…….”
지난 며칠 도율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운전하던 클레어의 차량은 주차장에 고이 주차되어 있었다. 그리고 부엌의 식탁 위에 클레어가 줬던 열쇠와 카드가 모두 반납되어 있었다.
어디서 지내고 있을까. 몸의 안전을 걱정할 상대는 아니었다.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언니.”
“왜?”
“난 언니랑 가족이 될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지만, 나 때문에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야.”
도은이 클레어의 손을 잡았다.
“언니가 원하는 대로 선택했으면 좋겠어.”
그에 클레어가 도은의 손을 맞잡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럴게.”
그때 의료진이 병실로 들어와 시간을 알렸다.
이제부터 클레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림뿐이었다.
수술실로 들어가는 도은을 배웅하며, 클레어는 왠지 모를 시선을 느꼈다. 그 정체 모를 시선을 의식하며, 그녀는 그걸 놓쳐선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시선의 주인은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클레어는 그 흔적을 쫓았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병원 건물 바깥까지 나가자, 그제야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잠깐만요!”
클레어는 도율이 모습을 감추더라도, 한 번 정도는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동생이 수술을 받고 건강해 지는 모습 정도는 보러 올 것이라고.
“…….”
도율이 멈춰섰다.
클레어가 자신이 잠입한 걸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는지 얼굴 위로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곧바로 지워 냈다.
“…얘기 좀 해요.”
“난 할 말 없는데.”
“나한텐 있으니까 좀 들어 봐요.”
도율의 어깨가 크게 가라앉았다.
“짧게 말해.”
그리고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곧바로 끊고 떠날 것만 같았다.
지금 꺼내는 말은 그런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한마디여야 했다.
클레어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지난 며칠, 이 순간 하고자 할 말을 몇 번이나 곱씹어 왔다. 어쩌면 도율과 함께 지내며 꼭 한 번 정도는 전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몰랐다. 짧은 시간 돌본 감정으로는 이 깊이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남몰래 연습한 미소를 선보였다. 둥글게 휘는 눈매와 함께 새하얀 이가 보이게 크게 입이 벌어졌다.
송민아의 감독 아래 몇 번이나 연습한 말이 그녀의 혀끝을 통해 빚어졌다.
“나랑 맞짱 한번 뜹시다.”
“…뭐?”
도율은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깜빡였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클레어가 다시 한번 확답했다.
“한판 뜨자고.”
과연.
의도대로, 도율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