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51
51화 혼 좀 나 봐야 돼요
“막내가 팀장을 선수 치네.”
“지금 농담이 나와? 나갈래?”
텅 빈 관중석에 앉아 있는 건 청진명과 송민아, 두 사람뿐이었다.
송민아에게 꾸지람을 들은 청진명이 손으로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장소 협찬은 내가 했는데 구경 정도는 괜찮잖아.”
이곳은 길드 ‘로얄 로드’ 소속의 종합 경기장이었다.
일전, 청진명과 클레어의 대결이 벌어진 곳과 비견될 정도로 넓은 장소였다. 길드가 사적으로 이용하는 장소지만 소속 인원이 많은 만큼 사용 예약을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 힘든 곳.
하지만 청진명은 자신의 이름을 대는 것으로 손쉽게 당일 예약을 꿰찰 수 있었다. 그가 길드 내에서 가지는 위상과 인덕 덕분이었다. 먼저 있던 일정까지 양보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칼로 물 베기군.”
“…단순한 부부 싸움이 아니거든?”
“그건 나도 보면 알고.”
경기장의 중앙에 나란히 마주 보고 서 있는 건 이도율과 클레어였다.
청진명의 말은 이 대결의 결과를 미리 점쳐 본 것이었다. 클레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도율이라는 존재를 베어 넘기는 걸 상상할 수 없다는 감상이었다.
“…….”
송민아 역시 크게 다른 생각을 품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건 당사자인 도율과 클레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과가 정해져 있는 듯한 싸움을 앞두고 모두가 침묵에 잠긴 가운데, 클레어만이 태연하게 도율에게 말을 걸었다.
“조건을 확인하죠. 지는 사람은 이기는 사람이 하는 말을 뭐든 한 가지 들어주는 걸로.”
“아무래도 좋아.”
“내가 이기면 당신은 오늘부로 내 개예요. 내가 하는 말은 뭐든지 들어야 하는 충직한 개.”
클레어가 손가락을 목에 대고 멍멍, 하고 짖었다.
한 가지라는 말에서 벗어나는 말이었지만 도율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질 생각이 없었으니까.
오히려 궁금할 지경이었다. 도율은 클레어에게 훈련 삼아 가르침을 전할 때에도 한 번도 흐트러지거나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그것도 전력을 다한 상태조차 아니었다.
클레어는 정말 그런 자신을 상대로 이길 생각인 건지, 그런 자신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그럼 내가 이기면…….”
도율은 이 싸움을 받아 줄 필요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클레어가 찾지 못하게 잠적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녀가 발견할 만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도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클레어는 얼마나 오래 자신의 뒤를 쫓게 될까.
클레어는 성실한 여자였다. 게다가 도율은 그녀의 생명의 은인이기까지 했다. 어쩌면 목숨의 빚을 갚겠답시고 평생을 그런 쓸데없는 일에 할애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필이면. 도율은 그 우연에서 운명이 아니라 저주를 느꼈다.
“다시는 내게 관여하지 마.”
도율이 이 자리에 선 건, 그런 클레어의 마음을 완전히 꺾어 놓기 위함이었다.
두 사람이 지정된 자리에 섰다. 제법 거리가 떨어진 시작 지점이었다. 도율은 저 멀리에 선 클레어가 검을 꺼내 드는 걸 볼 수 있었다.
반면 도율은 맨몸이었다. 그는 싸우기 위한 무언가를 따로 배운 적이 없었다.
삐이익!
호루라기 같은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신호 삼아 클레어가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이전과 달리 힘을 주는 방향으로 마력을 분사하는 방식이 아닌, 신체 곳곳에 그 흐름을 빌려주는 방식이었다. 낭비되는 마력이 주변을 파괴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도율이 가르쳐 준 방법을,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실로 엄청난 재능. 누군가는 그 빛나는 성장에 체념할 만한 속도였다.
클레어의 검이 황금빛 마력에 둘러싸여 긴 꼬리를 그렸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그것이 그녀의 전략이었다. 어차피 도율을 상대로 소모전을 한다고 해도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작전을 짜려고 해 봤자 예상대로 흘러가리란 법도 없었다. 애초에 정보 자체가 적었다.
클레어는 침착하게 도율의 모습을 눈에 담은 채 검을 내리쳤다. 맨몸인 도율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는 게 목적이었다. 칼날을 잡아 세울지, 아니면 강화된 팔뚝 같은 걸로 막을지, 피하거나 흘려보낼지.
도율이 고른 건 그 중 어떤 것도 아니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뭐……?’
클레어의 눈이 당혹으로 물듬과 동시에 그녀의 검이 도율의 쇄골 부근에 박혔다.
콱!
그러나 검이 가른 것은 옷자락뿐이었다. 칼날은 도율의 몸에 막혀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 피부조차 베어 내지 못하고 멈춰 선 상태였다.
“아……?”
그것을 믿기지 않는 듯이 바라보는 클레어에게 커다란 폭발이 덮쳤다.
콰앙!
클레어는 그에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뒤로 떠밀렸다. 공중에 뜬 채로 뒤로 날아간 그녀가 땅을 굴렀다. 그녀는 금세 자세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후속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도율은 자리에서 미동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애초에 클레어를 밀어낸 폭발 역시 그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는 듯이.
마력과 내공의 폭발이었다. 도율의 몸속을 흐르는 내공과 클레어가 검에 휘감은 마력이 반발해 일어난 반작용이나 다름없는 일.
클레어의 공격은 무방비한 도율을 상대로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에게 피해만 입힌 셈이었다. 운이 좋으면 실력 차이를 딛고 이길 수도 있다는 낙관적인 자세로 좁혀질 차이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도 클레어는 도율을 이길 방법이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나 마찬가지.
“포기해.”
도율이 담담하게 항복을 종용했다. 조금도 기쁘거나 자신만만한 기색 없이,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평온한 태도로.
“…….”
클레어는 대답 없이 검을 들었다. 눈빛엔 변함이 없었다.
도율은 체념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럼 내키는 대로 해라.”
난 이대로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그에겐 그렇게 행동할 근거가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질 리가 없기에.
클레어가 다가왔다. 이전과 같은 급습이 아니었다. 도율은 어차피 가만히 서 있을 테니 재빠른 이동을 위해 힘을 들일 이유가 없었다. 그만큼의 여력을 모두 공격에 돌려도 모자랐으니.
금색의 검이 도율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물론 옷자락을 베어 냈을 뿐, 그의 신체에 상처를 입히는 일은 불가능했다.
이윽고 더 커다란 굉음과 함께 폭발이 클레어를 덮쳤다. 이 폭발이 마력과 내공의 충돌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그 세기는 그녀가 담는 마력의 크기에 비례한다. 더 강한 공격을 퍼부을수록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반동 역시 강력해졌다.
“큭……!”
이번엔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텨 뒤로 밀려나는 선에서 끝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다면 대응하지 못할 리 없다.
문제는 이로써 그녀가 가장 승산이 없다 판단한 소모전에 돌입했다는 점이다. 아직 여유는 있지만, 클레어는 벌써 유의미한 수준으로 마력을 소모했다.
반면 도율은 태연했다.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라 정말 조금도 요동치지 않는 것처럼.
흔히 클레어는 호수와 같은 마력량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받곤 했다. 일반적인 각성자의 것을 상회하는 용적.
그러나 그런 그녀와 비교하자면, 도율은 바다와도 같았다. 그것은 마치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심해에서도 더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수 있는, 끝 모를 깊이를 자랑했다.
클레어가 다시 한번 공격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도율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고 밀려났다.
그러나 그녀는 검을 놓지 않았다.
* * *
“가지 마.”
청진명이 송민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의 시선은 경기장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클레어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공격을 거듭할 때마다 누적되는 피해에 몸이 성하지 않았다. 그것도 도율은 이렇다할 반격 한 번 한 적 없는데도. 그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승부 따윈 단숨에 정해질 것으로 보였다.
클레어의 공격으로부터 발생하는 폭발도 위력이 급감해 있었다. 그녀가 담을 수 있는 마력이 시원찮아졌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어는 맥없이 날아가 엎어졌다. 다시 일어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저걸 보고만 있으라고?”
송민아가 이를 빠득 깨물었다. 그녀가 난입한다 해서 도율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마음만 같아선 그러고 싶었지만, 하다 못해 이 대결을 중단시키고 클레어를 빼 오기라도 해야 했다.
그런 송민아를 붙잡은 것이 청진명이었다. 그는 송민아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클레어를 믿어.”
“믿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저러다 죽겠다고!”
“반대로 저렇게까지 하는 걸 말릴 셈이냐?”
“…….”
“나라면… 지금 방해하는 놈은 평생 용서하지 못할 거다.”
청진명의 말에 송민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청진명이 하는 말이었다. 오래 알고 지내던 그녀이기에 달리 반박할 수 없었다.
클레어를 멈추고 싶은 건 그녀를 상대하는 도율에게도 마찬가지인 얘기였다. 도율은 비척비척 걸어오는 클레어를 바라보다 자기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그만.”
도율의 말에 클레어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항복 선언인가요?”
“우스운 소리 하지 말고, 적당히를 알아라. 몇 번을 반복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 텐데.”
클레어는 처음에 비해 체력도 마력도 모두 소모된 상태였다. 몸 상태 역시 성하지 않았다. 폭발에 노출되고 충격에 밀려나 구르며 생긴 부상들이었다. 옷은 헤져 있었고 곳곳이 피투성이였다. 그녀의 자랑이던 금색 머리칼도 먼지를 뒤집어 쓰고 광택을 잃은 채였다.
반면 도율은 처음과 비교해 아무런 변화도 없어 보였다. 단지 옷자락이 잘려 나갔을 뿐,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내공 역시 차고 넘칠 정도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몸 상태가 정반대였다 하더라도 도율이 패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차이가 벌어진 상황에선 더더욱 명확했다.
하지만 클레어는 포기하지 않았다.
“난 아직 더 할 수 있어요.”
“더 할 의미는 없어.”
도율이 딱 잘라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날 쓰러뜨려요.”
“…내가 못 할 것 같나?”
말과는 달리 도율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클레어는 이미 한계였다. 손을 댔다가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지?”
“전부터 이래야 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정도로 내가 미웠나?”
도율이 쓸쓸한 목소리로 묻자 클레어가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이 미웠으면 이 고생을 하진 않죠.”
그것은 도율에게 있어서는 모순이나 다름없는 생각이었다. 그에게 폭력이란 미워하는 자를 상대로 행하는 복수에 불과했다. 무림에서의 경험이 그랬다.
그러나 왠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그의 인생에서는 경험한 적 없었지만, 그가 내심 바라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도율은 아주 오래 전, 학교에서 싸움을 벌였을 때가 떠올랐다. 부모님께 연락이 가게 되어 학교로 불려 오신 아버지가 연신 사과를 하는 곤욕을 치르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버지는 도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네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그보다는 오래되지 않은, 이곳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한 가문을 송두리째 불태워 버린 일도 떠올랐다. 잿더미가 된 폐허에 찾아온 땡중이 끈질기게 묻는 말에 변덕이 일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은 후에, 그자는 도율에게 이런 대답을 꺼냈다.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
자신을 위해 해 준 말이라는 걸 알지만, 도율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의문이 남았다.
‘아버지, 스승님. 그럼 저는…….’
정녕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이유가 있었다고 한들, 친구를 때리고 한 가문의 식솔을 모두 죽인 일이.
그 마음속 물음에 대답하듯 클레어가 검을 들었다. 검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지친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당신은 혼 좀 나 봐야 돼요.”
“내가……?”
“그래요.”
클레어도 이전에 말했다, 도율에겐 잘못이 없다고. 하지만 그건 진정으로 도율에게 필요한 말이 아니었다.
클레어는 생각했다. 도율이 자신을 미워하는 건, 그를 꾸짖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아무도 지켜봐 주지 않는 사람이기에 스스로에게 가혹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먼저, 그런 도율을 제대로 나무라는 것이 순서였다.
“전하고 싶은 불만이라면 잔뜩 있지만, 우선…….”
클레어가 마력을 쥐어짰다. 처음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양이지만, 그래서인지 더욱 수월하게 다룰 수 있었다. 전신으로 퍼진 마력이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웠다.
그 현상을 지켜보는 송민아가 중얼거렸다.
“저거 설마…….”
옆에 있던 청진명도 피식 웃었다.
“주눅들게 하는구만. 천재 후배가 쫓아오는 광경이란…….”
그러나 불만을 토로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이것은 그녀가 맞서 싸워 쟁취해 낸 성장이니까.
마신화.
마석과 같은 외부의 마력을 받아들여 강제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력만을 이용해 순수한 상태로 도달한 영역. 그 경지에 그녀가 발을 들이려 하고 있었다.
클레어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현상 따윈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집중하는 건 오로지 맞은편의 상대뿐이었다. 그에게 전해야 하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고요!”
너무나도 당연한 말. 그러나 도율과 같은 강자가 그런 것을 지키지 않아도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에겐 불만을 잠재울 힘이 있었으니까. 심지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마저 그렇게 힘으로 억눌러 왔다.
그렇게 높은 성벽처럼 쌓아 올린 댐에 작은 균열이 일어났다.
콰득!
클레어의 검이 도율의 가슴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