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79
79화 더 보여 줄 게 있나?
“그럼 진짜 가 볼게요.”
클레어가 손을 탁탁 털었다. 클레어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개운한 기색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으…….”
지저분한 골목길 바닥 위에 잔뜩 두들겨 맞은 사내들이 늘어져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클레어는 칼날이 아니라 넓적한 몸통 부분으로 두들겨 팼다. 피를 보는 것보단 나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봐준 건 아니었다. 쓰러진 남자들은 다들 최소한 어디 한 군데가 부러져 있을 거다.
그 일을 저지른 당사자가 후련하게 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착잡했다.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디서 저런 물이 든 건지.
클레어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에 캐리어 손잡이를 돌려줬다.
“가능한…….”
손잡이를 넘겨받으며 클레어가 운을 뗐다.
“빨리 해결하고 와요.”
의외의 말이었다. 손잡이를 통해 이어진 손을 놓기 전에 내가 물었다.
“혼자 집에 있으면 좋아할 줄 알았더니?”
“내가요? 왜요?”
“왜냐니. 그야 거긴 당신 집이고, 난 그냥 얹혀 사는 식객이니까…….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돼서 좋지 않았나요?”
“…처음엔 그랬죠.”
“처음엔?”
그럼 지금은 아니란 건가.
내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토너먼트 일정 때문이라곤 하지만 새삼 오래 떠나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캐리어 손잡이는 좁았다. 두 사람의 손이 올라가 있으면, 포개어진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클레어의 새끼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에 엮여 있었다.
“좀 넓네요, 집이.”
동감했다. 혼자 살기엔 지나치게 넓은 집이었다. 워낙 잘 버니까 돈 문제는 없겠지만.
“…내 말, 알아들었죠?”
클레어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금방 돌아갈게요.”
“약속이에요.”
꾸욱, 하고 클레어가 손가락에 힘을 넣었다. 엮여 있는 새끼 손가락이 안쪽으로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인가.
“네, 약속.”
“좋아요.”
클레어가 캐리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멀어지는 손잡이를 놓으며 자연스레 손이 떨어졌다.
그래도 클레어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약속이 이어져 있었으니까.
“기다릴게요.”
멀어지는 그녀를 배웅했다.
* * *
“좀처럼 꼬리가 잡히지 않네요.”
투기장 대기실.
탐정이 콧등에 걸친 동글뱅이 안경을 손가락으로 달싹거렸다.
“뭐가?”
“뭐긴요. 부스터 말이에요.”
탐정은 드물게도 침울해져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답지 않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토너먼트에서 경기를 치르는 동안 탐정도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수확은 없는 모양이다.
“토너먼트도 슬슬 막바지인데, 단서가 없어서 큰일이네요. 그쪽에 빠진 인력이 보충되면 지금보다 더 틈이 없어질 텐데.”
“그거 말인데.”
“네.”
“관두자.”
“네……?!”
탐정이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제 와서 그만두자뇨! 여기까지 왔는데! 그 위험천만한 물건이 세상을 나돌게 내버려 둘 거예요?! 아니, 그보다! 우리가 지금 손을 떼면 지유는요! 사장님은요!”
“내 말은…….”
“어디 입이 있으면 말이라도 해 봐요!”
지금 하려고 했잖아. 사람 말 참 안 듣네.
나는 손바닥으로 탐정의 이마를 밀어 떼어 냈다.
“그렇게 몰래 조사하는 거 그만두자고.”
“네?”
“그냥 쳐들어가면 되잖아.”
내 말을 들은 탐정이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 아니. 그게 되면 진작에 그렇게 했죠. 어디 조직 하나 상대하는 게 쉬운 일인지 알아요? 이쪽은 단둘이라고요. 아니다. 일단 저는 계산에서 빼 주시고…….”
“나 혼자서도 충분해.”
“아니, 그게 말이…….”
탐정이 말을 흐리고 생각에 잠겼다.
탐정의 앞에선 충분할 정도의 힘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토너먼트의 예선전에서도 그랬고, 서지유의 뒤를 밟다가 도착한 건물에서도 그랬다. 여러 인원을 상대하는 것도, 특별히 강한 개인을 제압하는 것도 가능했다.
게다가 난 그때 조금도 버겁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충분히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 내 힘을 가늠하기엔 한참이나 모자랐으니.
탐정 역시 그 사실을 떠올리고 가능성을 깨달은 것이었다.
“우승 상품 수령은 여기가 아니라 별도의 장소에서 이뤄진다네. 사람들 보는 앞에서 주기 싫다 이거지. 가짜랑 바꿔치기할 생각인 건지, 아니면 협박해서 다시 돌려받을 생각인 건진 몰라도. 마침 잘됐잖아?”
힘들이지 않고 녀석들의 본거지까지 갈 수 있는 기회였다.
“…적진 한복판에서 일을 벌이시겠다고요?”
“필요하다면.”
나는 이미 방침을 정했다. 탐정에게 묻는 건 따를 건지 말 건지에 대한 질문에 불과했다.
이윽고 탐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요. 가끔은 조수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도 탐정의 덕목일 테니까요.”
“…탐정이?”
“그보다, 한 가지 묻겠는데요. 토너먼트 우승, 가능하시겠어요?”
가볍게 지나가듯 말했지만, 이 작전은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는 걸 전제로 하고 있었다.
“조수가 강하다는 건 알지만, 토마스라는 남자도 무지막지하게 강했잖아요, 하늘에서 벼락을 떨어뜨리고 땅까지 무너뜨릴 정도로. 그런데도 졌고요. 뭘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다르다는 게 느껴지던데요. 분명 아무리 강해도 소용이 없는 무언가가…….”
“뭔가 다르다? 그게 뭔데?”
“탐정의 직감이라, 저도 자세히는 잘……. 헤헤.”
탐정이 뒤통수에 손을 올리고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그건 정확한 평가였다. 아무리 강해도 소용이 없다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토마스는 분명히 내 예상을 뛰어넘는 실력을 갖춘 강자였다. 이런 곳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수준보다는 훨씬 강했다. 제대로 싸운다면 그 앞에서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주혁은 그런 토마스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며 승리를 거뒀다. 그건 확실히 상대의 강함을 무시하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나는 모두가 감이나 예상으로만 짐작하는 그 수단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파경대계.’
자신의 소우주를 바깥으로 확장해 영역을 만드는 기술. 그 영역에서는 시전자가 정한 규칙이 절대적인 법칙이 된다.
이 기술을 처음 보여 준 장승은 넓은 지역의 풍경까지 바꿀 정도로 능숙하고 강력했다.
하지만 주혁이란 놈의 마력으로는 고작해야 자신의 몸 주의를 둘러싸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자신을 향한 공격을 무위로 되돌리기엔 충분했다.
탐정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질문에 답을 할 시간이었다.
“가능해.”
내가 단언했다.
그러자 탐정은 ‘어떻게’라느니 하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납득할 뿐이었다.
“뭐, 그런 걸 보고도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거라면 뭔가 방법이 있는 거겠죠.”
탐정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부분은 맡길게요, 조수!”
슬슬 경기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탐정이 대기실에서 나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지체 없이 해치우자고.”
“알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해요. 작전 성패는 대부분 조수 손에 달렸다고요.”
“나야말로.”
탐정에게도 내가 필요하지만, 내게도 탐정이 필요했다. 주어진 일을 조속히 마무리하고 돌아가기 위해선 협력이 필수였다.
탐정은 밖을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꾼 거예요? 되게 늑장 부리는 것 같더니.”
클레어의 말을 떠올렸다.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는데, 지켜야지.
“빨리 끝내고 돌아오란 소릴 들어서.”
그러자 탐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난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 * *
토마스가 망가뜨린 경기장은 하루 사이에 고쳐져 있었다. 운영 측에서 관련된 스킬을 보유한 각성자라도 보유하고 있었던 건지, 놀라울 정도로 말끔했다.
그 위에 올라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안 그래도 많았던 관중이 빽빽할 정도로 들어차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리를 모두 채운 건 물론이고 사이에 끼거나 서서 보는 이들도 많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응원하는 건 정말 극소수에 불과했다.
“가라, 역배!”
그마저도 건전한 응원은 아니었다.
“결승전치고는 상대가 영 심심하네.”
“아무래도 어제 그런 걸 봐 버렸으니까 말이지.”
“그게 결승전이어야 했는데…….”
내가 보여 준 모습이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서 인상적이지 않았다는 건 인정했다.
예선전을 한 번에 쓸어버리긴 했지만, 그런 참가자는 나 하나가 아니었다. 그런 자들도 결국 본선에 올라와서 이 자리까지 도달하는 건 실패했다. 게다가 예선전을 보는 관객은 많지 않았다.
결국 나는 관중들에게 예선전 때 끝발 좀 날렸다는 소문이 돌 뿐인, 대진운이 좋았던 데다가 토마스가 급발진을 해서 이 자리에 선 행운아에 불과했다.
옆에 선 안내원이 물었다.
“억울한가요?”
“글쎄.”
“저 비웃음을 모두 환호로 바꾸겠다는 각오는 어떠신가요?”
직원이 관중을 힐끗거리며 물었다.
“어렵겠는데. 오늘 경기는 별로 재미없을 거야.”
“저런.”
직원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지 말고 힘내 주세요. 혹시 모르죠, 노력 여하에 따라 그 물건을 받으실 수도 있으니까요.”
“…….”
그거, 이제 필요 없어.
슬쩍 웃음을 짓자 직원이 마주 웃었다.
그때 관중들 쪽에서 커다란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반대쪽 통로를 지나쳐 결승전 상대방이 경기장 위에 발을 올렸다.
주혁이었다.
두 선수가 모두 경기장에 오르자 안내를 위해 곁에 있던 직원들이 자리를 떴다. 경기장 위에 남은 건 나와 주혁뿐이었다.
주혁이 친한 듯 말을 걸었다.
“여어.”
“…….”
대답 대신 인상을 찌푸렸지만 주혁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어제, 다 봤겠지?”
고개를 끄덕이자 주혁이 잇새로 뜨거운 숨을 흘려보냈다.
“그래, 그럼 숨길 거 없겠네.”
경기를 시작하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주혁이 동시에 마력을 전개했다.
정안을 통해 바라본 마력의 흐름. 주혁은 가지고 있는 마력이나 그걸 다루는 실력은 어설펐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을 위해 익혔다는 듯, 한 가지 기술을 펼치는 것만은 능숙했다.
놈의 몸을 따라 마력이 흘렀다. 그 흐름은 몸 안쪽을 벗어나 그 주위로 점점 더 넓어져 갔다.
“공수래공수거.”
주위의 모든 마력을 무위로 돌리는, 어제의 그 기술이었다.
주혁은 섯불리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가능한 공격이 있으면 내키는 대로 얼마든지 시험해 보라는 듯이.
나는 내공을 끌어 올렸다. 떠올리는 것은 불꽃. 손가락을 튕기는 것과 동시에 화염이 솟구쳤다.
“-삼매진화三昧眞火.”
그러자 검은 불꽃이 주혁을 삼켰다. 크고 두꺼운 불꽃이 녀석의 주위를 온통 뒤덮어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거꾸로 흐르는 폭포처럼 거센 불길이 하늘을 향해 끝없이 솟구쳤다.
천장이 없는 경기장이었기에 마음껏 불꽃을 피워 올릴 수 있었다.
한겨울. 경기장으로부터 충분히 거리를 두고 떨어진 관중들마저 땀을 흘릴 정도의 열기였다. 그 중심에 있는 자가 무사하리란 예상은 어려웠다.
하지만 주혁은 불꽃을 헤치며 걸어 나왔다.
“…놀라게 하긴. 이게 네 비기냐?”
주혁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하지만 소용없어. 제아무리 강력한 불꽃을 둘러도 내겐 불티 하나 닿지 않아.”
본래 그 정도 불꽃 속에 가두면, 몸이 멀쩡하다 해도 뜨거운 숨을 삼키는 걸로 인해 폐부터 익는다. 하지만 주혁은 숨이 막힌 기색도 없이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
더군다나 이 불꽃은 마력이 아니라 내공으로 피워 올린 것이었다.
‘…역시 그런가.’
공수래공수거.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는 의미.
그건 마력이나 내공. 그 어떤 수단에도 의지하지 않고, 맨손으로 하는 행위가 아니라면 인정되지 않는 세계라는 뜻이었다.
주혁이 내공의 존재를 알고 있을 리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정한 법칙이 적용됐다.
“어때, 더 보여 줄 게 있나?”
기공이 소용없다는 걸 확인한 이상 굳이 내공을 소모할 이유가 없었다.
주혁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맨손 싸움에 누구보다 자신이 있는 남자가, 맨손 싸움이 아닌 그 무엇으로부터도 간섭받지 않는 소우주를 만들어 내는 건 지극히 그럴싸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자신을 무적이라 여긴다면, 그건 착각이다.
“그럼, 수고했다.”
주혁이 팔을 뻗었다. 손을 곧게 뻗은 수도가 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이곳은 주혁의 대계 안. 놈도 나도 마력이나 내공을 사용한 그 무엇도 불가능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주혁은 타고난, 거기에 더해 단련된 신체와 기술로 일방적 승리를 가져왔지만.
이번엔 상대가 나빴다.
“커헉……?!”
쿠둥!
등부터 바닥에 떨어진 주혁이 비명과 함께 숨을 토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한참 하늘을 바라보며 엎어져 있었다.
그런 녀석을 향해 내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명했다.
“일어나.”
바닥에 쓰러진 적을 공격하는 취미는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