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78
78화 마침 잘됐네요
“약속, 못 지켰네.”
침대에 누운 샤디아가 중얼거렸다.
토마스의 부탁으로 샤디아를 의무실로 옮기자 그녀는 응급 처치를 받았다.
아크투러스 투기장에 마련된 의무실이었다. 이곳의 설비와 의료진은 웬만한 대경 길드 산하의 병원에 버금갈 정도였다. 규모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퀄리티에 있어서는 그랬다.
당연한 일이었다. 투기장은 선수들이 필사적으로 싸우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 싸움 끝에 목숨을 잃거나 재기 불능이 되는 건 바라지 않을 테니까.
각성자라는 게 그렇게 발에 채일 정도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유용한 인재를 가능한 오래 써먹기 위해서라면 치료 설비에 투자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치료를 받은 샤디아는 침대에 누워 떠들 정도의 기력은 남아 있었다. 양팔을 회복하기 위해선 안정이 필요하지만.
“약속은 무슨 약속.”
“결승전에서 만나기로 했잖아. 아아, 아쉬워라.”
그랬었다. 샤디아는 내게 결승에서 이런저런 짓을 해 줄 테니 기대하라 말했다. 하지만 나는 동의한 기억이 없었다.
다소 일방적인 선언이었는데, 그런 것도 약속으로 치나?
바깥에선 토마스와 주혁의 대결이 한창이었다. 상황은 일방적이었다. 토마스가 주혁을 압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여 주지 않았던 압도적인 무위로.
‘…강하군.’
몸을 번개로 바꾸는 건 화신化身의 영역이었다. 육신이 아닌 무언가를 육신으로 재구성하거나, 그 반대의 일.
그런 게 가능한 자는 드물었다. 수련이나 노력의 영역이 아닌, 타고난 상성의 문제니까.
“괜찮으니까 가 봐.”
샤디아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새침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내게 말했다.
“직접 보고 싶은 거 아니야? 보내 줄게.”
“…….”
“대신 다음에 이 빚은 두 배로 받아낼 거니까.”
샤디아가 단단히 벼르고 있겠다는 듯 으름장을 놓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왜 네 허락을 받아야 하지?”
“칫.”
샤디아가 혀를 찼다. 분위기를 타서 내게 마음의 빚을 지우려 한 모양이지만, 상대가 나인 만큼 수포로 돌아갔다.
의무실에서 빠져나와 경기장으로 돌아가자, 굉음이 울리며 지축이 흔들렸다.
토마스의 짓이었다. 번개와 망치, 두 가지 힘을 동시에 다루자 경기를 위해 만들어 놓은 단상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질 정도의 충격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마저도 관중석에 피해가 가지 않게 힘을 조절한 거였다. 그 이상의 위력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토마스의 승리를 점치고 있을 때, 나는 한 가지 이상 현상을 포착했다.
‘이 느낌은…….’
대기 중에 느껴지는 마력의 흐름. 그 양은 미약했다. 예민한 자가 아니라면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양이었다.
하지만 그 흐름은 분명히 일련의 순환을 이루고 있었다. 정해진 길을 따라 흐르는 마력의 종착지가 곧 그 마력의 근원지와 같았다.
주천周天. 마력이 궤도를 따라 순환하고 있었다. 그 궤도는 신체 내부로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즉…….
‘파경대계, 인가.’
까마귀가 안내한 장소에서 망량에게 가는 길목의 문지기를 하고 있던 장승. 그가 하던 것과 동일한 행위였다.
자신이 가진 소우주를 이곳 대우주에 침범시키는 일. 하지만 그 결과는 각자가 가진 소우주에 따라 판이하게 달랐다.
“공수래공수거.”
장승의 대계는 넓은 장소를 아우를 수 있었다. 이곳 경기장을 모두 덮어 쓰고도 남을 정도였다. 대계의 테두리를 따라 흐르는 내력의 흐름도 거센 강물처럼 힘차고 거침이 없었다.
그에 반해 주혁이라는 놈의 대계는 고작해야 놈의 몸 주변에 이르는 정도였다. 마력은 금방이라도 끊길 것처럼 미미했다. 컨디션의 문제도 아니었다. 녀석은 원래 지니고 있는 마력적 재능이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주천은 주천이었다. 녀석이 가진 소우주가 작게나마 현실을 덧씌웠다. 그 결과는 곧 확인할 수 있었다.
토마스의 번개가 녀석의 몸에 닿기 전에 흩어져 사라졌다.
“…그런가.”
주혁은 항상 신체 능력을 기반으로 싸워 왔다. 녀석의 주특기도 악력을 통해 상대의 몸을 찢거나 부러뜨리는 것이었다.
반면 마력에 관련된 능력은 크게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고작해야 몸을 보호하거나 강화하는 게 고작이었다. 가장 기초적인 활용법, 어쩌면 그 이상을 할 수 없었던 걸지도.
그러니 녀석의 소우주란, 순수한 육체의 싸움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번개는 주혁의 소우주에 닿자 허위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토마스가 가진 망치도 마찬가지였다.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망치의 강함에는 마력이라는 요소가 개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주혁의 영역 안에서 단순한 쇳덩어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주혁이 토마스의 목을 움켜쥐며 승리를 점하는 장면을 바라보며, 나는 깨달았다.
“누가 가르쳐 준 거지?”
애초에 마력을 다루는 걸 포기하다시피 한 녀석이 대주천 같은 복잡하고 위험한 일에 도전할 리가 없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 가르쳐 준 스승이 있다는 뜻이다.
녀석은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거였다. 그 기간에 누군가에게 배운 거라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한 사람밖에 없었다. 까마귀의 안내로 찾아간 벽곡. 툇마루에 앉아 긴 곰방대를 피우던 긴 머리의 남자.
“망량…….”
망량이 주혁에게 파경대계를 가르친 걸까?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누구이든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녀석에게 묻고 싶은 게 생겼다.
* * *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토너먼트 일정은 예정 그대로 진행되는 것으로 정해졌다.
토마스가 난입해 주혁과 싸웠지만 결국 패배했기 때문에 실격 처리. 남은 내가 부전승으로 올라가 주혁과 결승전을 치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 싸움에서 주혁이 불필요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회복 기간을 줄 수도 있었지만, 거절한 건 다름 아닌 본인이었다.
“바로 해 버리자고, 결승전.”
의료진이 붕대를 감고 있는 와중에도 주혁이 내게 제안했었다.
아크투러스 운영 측에선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 하루 이상은 쉬어야 한다고 만류했고, 나 역시 거절했다.
만전 상태의 적과 싸우고 싶다는 호승심 따위에서 비롯된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예정대로 딱 하루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았다.
“쳇.”
결국 예정대로 다음 날 결승전을 치르는 걸로 합의했다. 주혁이 하루만 있으면 싸울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한 탓이었다.
한편 내가 오늘이 아닌 내일을 기다리는 이유.
그건 클레어의 휴가가 딱 오늘까지이기 때문이다.
“더 시간 내긴 어려워서요.”
클레어는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S급 헌터였다.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오래 머무를 순 없는 법이었다.
“어쩔 수 없죠. 팀에서도 막내잖아요? 휴가 막 쓰고 그러면 눈치 보일 텐데.”
클레어는 지금 불야성에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채비라고 해 봐야 가져온 것도 딱히 없으니 그냥 몸만 가면 되겠지만.
그리고 결승전은 내일. 클레어가 관중석에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클레어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왜 이렇게 신나 보이지?”
“…신나긴요.”
나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클레어가 날 방해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불편한 점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탐정도 클레어를 무서워하는 건지 자꾸 자리를 피하려 했고.
무엇보다도 이 좁은 방에서 둘이 자는 건 단지 불편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종 고문이었다.
짧았던 지난날을 돌이키던 내가 클레어의 짐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뭐예요?”
“이거요? 캐리어죠.”
그건 나도 알았다.
“어디서 난 거예요?”
클레어는 캐리어 따윈 가져오지 않았다. 갈아입을 옷도 없어서 밤에는 옷을 벗고 자지 않았나. 그럴 거면 근처 가게에서 사 오면 됐는데, 토큰이 없다고 했었고.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나? 클레어에겐 아공간 반지가 있는데.
거기서 조리 도구 세트도 꺼냈다. 그건 챙기면서 다른 건 하나도 안 챙겼다고?
평소 클레어는 전혀 덤벙대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철저하다면 철저한 스타일. 휴가까지 써서 며칠 묵을 생각으로 왔으면서 그렇게 허술할 리가…….
“그야 나 원래 묵던 방에서 가져왔죠. 이제 돌아가야 하니까.”
“…원래 묵던 방?”
클레어는 묵을 곳이 없어서, 이 근처 방도 전부 다 예약이 꽉 차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좁아터진 내 방에서 묵은 거였는데.
원래 묵던 방에 가서 캐리어를 가져온 거라고? 그럼 그 방은……. 지금까지 계속 갈 수 있는 거였고?
캐리어를 뒤적거리던 클레어의 동작이 멈췄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 보시죠.”
“그, 그게…….”
“얼굴 보고.”
클레어의 손목을 잡아 끌어 마주 세우자 그녀가 눈을 사방으로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부부가 각방에 머문다니, 이상하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기에 우리가 부부라는 걸 아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으…….”
그건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바깥에서야 이목을 의식해서 사이 좋은 부부를 연기해야 한다고 쳐도, 가면을 쓰고 정체를 숨기는 불야성에서까지 그래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클레어가 목까지 새빨갛게 물들이고 쥐어짜 내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연습이에요, 연습.”
“연습? 무슨 연습?”
설득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 건지 클레어가 검지손가락을 곧게 폈다.
“그래요!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연습이에요. 마음의 준비라고나 할까, 미리 익혀 두면 손해 볼 거 하나 없으니까 안 할 이유가 없으리라 말씀드릴 수 있을지…….”
너 똑같은 소리만 하고 있다.
그보다 이렇게 말 많이 하는 것도 처음 본다.
자기도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걸 잘 아는지 클레어의 손가락 끝이 마구 떨리고 있었다.
“클레어.”
“…네.”
내가 이름을 부르자 클레어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딱히 클레어를 탓하려던 게 아니었다. 토큰이 없다면서 좁아터진 방에 얹혀 살 땐 불편하긴 했지만, 그런 걸로 생색을 내면 양심이 없는 거다. 이 세계에 돌아왔을 때 지낼 곳을 내어 준 상대한테.
내가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내 기분 따위가 아니었다.
“안심해. 내가 너한테 손 대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네?”
“맹세할게.”
내 다짐에 클레어의 입가가 경련했다. 날 보는 시선이 고깝기 그지없었다.
“못 미더운가?”
내가 귓볼을 긁었다.
지금은 잘 지낸다곤 하지만, 나와 클레어는 좋았던 일만 있었던 사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으니까. 마음 한편에 미심쩍은 구석이 남아 있어도 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믿어요. 믿고말고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믿죠.
클레어가 그렇게 덧붙였다.
* * *
클레어의 배웅을 위해 불야성의 외곽까지 움직이자, 인기척이 드물어졌다.
토너먼트가 진행 중인 중심부에 인파가 몰려서인지, 아니면 클레어가 인적이 드문 경로를 선호하는 건지. 주위엔 대화 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클레어가 캐리어를 끄는 바퀴 소리만이 울렸다.
“…….”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의 클레어. 다시 헌터로 돌아가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걸까.
그때 골목에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몇몇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불야성인 만큼 얼굴을 숨기는 게 특이한 일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불온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 무리는 내게 시비를 걸었다.
“토너먼트 결승 진출자란 양반이 이런 곳까지 여자랑 단둘이 뭐 하시려고 그러나?”
“우리도 좀 끼워 주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저들이 정말 관심이 있는 건 나 하나였다. 시선이 모두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하지 않아? 정식 경기도 아니고, 그 인간이 갑자기 경기장에 난입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게. 그러니까 내 말은, 이 경기라는 건 최대한 공정한 상황에서 떠야 하는 거 아닌가 싶더라고.”
이해했다.
주혁은 토마스와의 싸움으로 부상을 입었다. 그건 정식 경기도 아니었고, 토마스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그 상태로 결승전을 치르게 생겼으니 억울하다는 생각이었다. 설마 주혁에게 패거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고. 노름에 토큰이라도 건 놈들이겠지.
결국 이들이 용건이 있는 건 나였다. 클레어의 귀갓길을 방해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가요.”
배웅을 방해받은 건 열받는 일이었다.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주지.
하지만 클레어는 내 말대로 하지 않고 내게 캐리어 손잡이를 내밀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잡이를 받아 캐리어를 맡았다.
고양이 가면을 쓴 클레어가 한 걸음 내디뎠다.
“마침 잘됐네요.”
클레어가 오른손을 뻗었다. 검지손가락에 낀 아공간 반지가 푸른 빛을 뿜었다. 일렁이는 푸른 아지렁이 너머로 클레어가 손을 움켜쥐었다.
익숙한 장검이 클레어의 손에 들렸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 사이로 얼음장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트레스 좀 풀고 가게.”
클레어의 검이 어두운 골목길을 태워 버릴 것처럼 밝게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