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83
83화 자네가 가져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나란히 선 여자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벽돌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잿빛 벽돌로 쌓아올린 건물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져 첨탑 끝에 십자가가 매달려 있었다.
여자는 내내 불퉁한 표정이었다. 오늘 하루. 어제부터, 아니 사실은 그 이전부터 쭈욱.
턱시도를 입은 남자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오늘 정도는 축복해 주지 그러냐?”
남자의 이름은 최강현.
그는 이곳에서 영원을 약속하기 위해 식의 거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짜 주인공이 준비를 끝마칠 때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방문해 준 친우들과 담소를 나누며 부러움과 축하를 받을 수도 있었다. 크고 화려하지 않은, 소박하고 조용한 자리였다. 정말 친한 이들만 초청했기 때문에 모두가 서로와 어울리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 혼자 그 사이에 끼지 못하고 바깥에서 봄바람을 맞으며 시간을 때우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칠흑을 두른 듯한 드레스와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여자였다.
오늘, 다른 누구보다도 행복한 신부가 새하얀 웨딩 드레스를 입는 거라면. 그녀의 그 새까만 복장은 정반대의 심정을 대변하는 걸까.
…과민한 생각이었다. 하객이 검은 옷을 입는 게 그렇게까지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평소에도 검은 복장을 선호했으니까.
최강현이 말을 건네자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구두 끝으로 땅바닥을 문질렀다.
위니 메이블.
그녀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림자 마녀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보석으로 환심이나 사고, 비겁한 놈. 한심하기 짝이 없어.”
“미안하게 됐네.”
최강현이 시선을 피했다. 프러포즈할 때 선물한 반지 얘기였다. 막상 건네줄 땐 쓸데없이 비싼 거 샀다고 타박을 맞았건만, 다른 사람들 앞에선 그렇게 자랑을 하고 다녔다나.
평소라면 곧잘 하던 대로 거세게 반발했겠지만, 오늘만큼은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답지 않게 한껏 누그러진 태도를 보이는 최강현의 옆모습을 힐끗 훔쳐보고, 위니가 신랄한 목소리로 불만을 토해 냈다.
“꼴에 배려하는 거야? 하, 정말 눈물겹네.”
“…….”
“하지마, 그딴 거.”
역지사지였다.
이 자리에 있는 게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상상하면 그녀의 심정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이게 뭔지 알아?”
굳어 있는 최강현을 향해 위니가 품속에서 소중하게 손수건으로 감싸 놓은 보석을 꺼내 보여 줬다. 영롱하게, 투명하고 맑은 푸른 빛을 발하는 보석이었다.
손톱만 한 크기에 불과했지만, 위니는 그 보석이 한 손으로 다루기 버거운 무게라도 지닌 것처럼 양손으로 소중히 쥐고 있었다.
최강현이 그 물건의 이름을 읊었다.
“세이렌의 눈물……?”
“그래, 누가 준 거게?”
“그야…….”
이 타이밍에 꺼냈다면 답은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위니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래, 맞아. 네가 보석을 사 준 사람이 내게 준 거야. 어떤 기분이니? 네가 조공을 가져다 바치는 대상이 막상 다른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선물해 준다는 건?”
“…눈물이 다 나는 구만.”
싸구려 위안이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친구였으니까. 그런 예사로운 일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질투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세이렌의 눈물일까. 친구 사이의 선물이라면, 보석을 주려는 거라면 그보다 좋은 보석이 달리 많았다.
세이렌의 눈물은, 말하자면 까다로운 전설이 붙은 치료제였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면 그 어떤 상처라도 회복시켜 준다… 였나.’
그 조건이 사실인지조차 불분명했다. 진실된 사랑만큼 검증하기 어려운 것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그런 걸 혼자인 위니에게 선물한 걸까. 최강현이 의문을 품은 얼굴을 하자 그녀가 최강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검은 가면이 그녀의 오른쪽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최강현은 단 한 번도 그 너머를 본 적이 없었다.
위니가 가면을 슬쩍 들췄다. 그 안엔…….
“너, 얼굴이…….”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아픈 부위를 두 번이나 쑤시는 행위였기에.
“난 말이야, 죽을 땐 타 죽고 싶어.”
“…….”
“그래야 아무도 내 흉한 얼굴을 보지 못할 테니까.”
최강현이 침묵하자 위니가 산뜻한 목소리로 말을 돌렸다.
“라고 말했더니, 언젠가 이걸 선물해 주더라고. 참 웃기지? 내가 이걸 쓸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말이야.”
“위니…….”
“앞으로도 글렀네.”
위니가 벽에 기댄 등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걸음을 지켜보고 나서야 최강현이 뒤늦게 깨달았다. 그곳은 나가는 방향이었다.
최강현이 위니의 등에 대고 물었다.
“…안 보고 갈 거냐?”
“당연하지. 누가 네 허영심이나 채워 주는 들러리 신세가 되어 줄 것 같아? 그리고…….”
그녀가 작게 덧붙였다.
“드레스 입은 모습 보면, 못 참을 것 같아.”
떠나는 뒷모습을 되돌려, 위니 메이블이 최강현에게 전했다.
“울리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
그녀의 말에 최강현이 시선을 하늘 위로 띄웠다.
“당연하지.”
그것은 누군가에게 부탁받아 하는 다짐이 아니었다.
* * *
이후, 그녀는 아웃브레이크의 영향으로 무너진 도시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안전한 장소가 드문 시대에, 강력한 각성자가 장기간 체류하는 곳이라는 소문에 떠돌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모이자 도시가 재건되었다.
항상 가면을 쓰고 이름과 얼굴을 가리는 그녀를 본따 그곳의 주민들 역시 그 행위를 모방했다.
시간이 흘러, 그곳은 불야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 *
“차라리 날 죽여……!”
그림자 마녀가 필사적으로 울부짖었다. 눈앞에 선 최강현과 그 부하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들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뒤에 선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문제였다.
자신이 가진 최고의 수단, ‘심연’조차 통하지 않았다. 바깥인 이곳에선 말할 것도 없었다.
폭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녀가 선택한 것은 설득이었다.
“내가 죄를 지은 거라면 날 죽여. 하지만, 이곳을 태울 필요는 없잖아. 이 연구 자료들은 모두 사실이야. 정보라고! 분명히 누군가에게, 아니 인류에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까…….”
그림자 마녀의 말에 도율이 최강현을 돌아봤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최강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금기에 다가가는 방법은 필요 없다. ‘인간’에게는 말이다.”
그 대답에 그림자 마녀가 망연자실하게 무너졌다.
“너, 너…….”
그녀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최강현을 가리켰다.
“넌 항상… 항상 내 앞을 그런 식으로…….”
최강현이 무표정하게 그림자 마녀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오래 만나지 않았다. 긴 세월이 흘렀다. 자신은 검은 머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늙었다. 그사이 변한 건 겉모습뿐만이 아니었다. 오랜 친구 역시 변해 있을 거라고 각오했다.
하지만 그녀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 내용물 역시 예전과 같을 거라는 기대는 너무 큰 욕심이었을까.
그림자 마녀가 크게 소리 질렀다. 철판을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솟구쳤다.
“혼자 잘난 듯이 내려다보지 좀 마–!!”
그림자 마녀가 달려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뻗어 나간 검은 칼날이 최강현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나 최강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태우게.”
도율이 대답했다.
“…분부대로.”
화륵!
최강현의 목덜미에 닿은 검은 칼날이 피부를 찢었다. 그 사이로 핏방울이 흘렀다. 그러나 칼날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도율의 검은 불꽃이 사방에서 피어올라 연구실 자료들을 태웠다. 문서와 실험 장비, 전자 기기를 불문하고 모든 것이 불꽃에 휩싸였다.
그림자 마녀가 최강현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연구실을 바라보았다.
“아, 안 돼…….”
그녀가 자료들을 향해 달려갔다.
“탈출하지. 계속 있으면 위험하니까.”
“…그러지.”
도율과 최강현. 두 사람은 아직 이 정도 열기 속에서 버틸 수 있었지만, 남은 한 사람이 문제였다.
동글뱅이 안경을 쓴 탐정, 그녀는 체력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그런 상태로 이런 곳에 오래 노출되어서 좋을 게 없었다.
도율이 탐정을 업은 채 완전히 타오르기 전의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출구는 아직 열려 있었다. 안에 있는 사람을 태워 죽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이곳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무위로 돌리기 위함이었으니까.
탈출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었다. 특히 그림자 마녀 정도 되는 각성자라면, 충분히.
“잠깐만…….”
최강현의 목소리가 도율의 발길을 멈춰세웠다.
“잠깐만 기다려 보지.”
도율이 최강현에게 물었다.
“…생포해야 하기 때문입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닐세.”
노인의 눈동자가 타오르는 불꽃에 못 박힌 듯 고정되었다.
“조금만… 지켜봅세.”
하지만 그 근처에서 아무리 지켜봐도 그림자 마녀는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 나오고 있지 않는 건지. 안에서 불을 끄려고 시도해도 무용지물이었다. 삼매진화의 불꽃은 도율의 의지가 다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타오르기 때문에.
포기를 안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불타는 광경 속에, 사람 그림자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조금만이라 말했던 최강현의 말과는 달리, 그는 건물이 전소할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벽이 허물어져 뼈대가 드러나고 무너진 잔해들마저 모두 재가 될 무렵, 하늘에 태양이 떠올랐다.
“…….”
최강현이 잿더미 사이를 거닐었다. 매캐한 탄내가 가득한 공간엔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최강현이 옛 기억을 떠올렸다.
‘이게… 네가 원하던 최후였나?’
불에 타서, 그 누구도 그녀의 흉한 얼굴을 볼 수 없는 최후를 맞이하는 것. 언젠가 그녀가 바랐던 대로의 결말이었다.
툭.
그때 최강현의 발치에 작고 단단한 무언가가 걸려 굴러갔다. 모든 것이 가루가 된 곳에서 유일하게 형체를 잃지 않은 물건이었다.
최강현이 검은 상자를 들어올려 손가락으로 먼지를 쓸었다. 위아래로 열 수 있는 상자였다.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크기에 불과했다.
“이건…….”
“겉이 그을렸을 뿐이군.”
뒤따라온 도율이 첨언했다.
“크기를 보니 USB라도 들어 있는 모양인데. 마저 태우도록 할까?”
최강현의 목적은 이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모든 정보를 파기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도의를 저버린 실험을 통해서만 알아낼 수 있는 귀중한 정보가 있다 하더라도, 악에 물든 길을 걸어 들어가면 더 깊은 악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지기 마련이라 여겼다.
그 내용조차 확인하지 않고 불태우라 지시한 건, 그런 정보엔 인간의 마음을 유혹하는 마력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흔들릴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이 역시 내용물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도율의 손에 넘기는 게 맞았다.
하지만.
“…조금 보지.”
“괜찮은 건가?”
“그래.”
이곳에 있는 모든 자료가 불타는 동안, 유일하게 안에 든 물건을 보호한 상자. 도율이 예상한 것을 웃도는 강도를 지닌 상자였다.
그 안에 들은 게 실험의 핵심 정보일 거라는 도율의 추측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당연한 것이었다.
달각.
최강현이 손가락을 집어넣자 상자가 입을 벌리며 내용물을 토해 냈다.
“보석……?”
도율이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그건 햇빛을 받아 하늘의 색으로 빛나는 보석이었다. 그 크기는 손톱 정도였다. 상자 속에 남는 공간은 충분했지만…….
상자 안에는 손수건으로 둘러싸인 보석 하나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떠올렸다는 듯 도율이 말했다.
“이거, 세이렌의 눈물이라던 그 보석이군, 토너먼트 우승 상품으로 내걸었던. 그런 걸 이런 곳에 보관하고 있었나?”
“…그래, 그렇군.”
“뭐, 수상한 물건은 아닌 것 같고.”
그렇게 말하며 도율이 관심을 접었다.
탁, 하고 최강현이 상자를 다시 닫았다. 그 안엔 세이렌의 눈물이 들어 있었다. 그의 아내가, 그녀의 친구에게 선물했던 물건이.
그 두 사람은 모두, 지금은 없었다. 그러니 그걸 자신이 가져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최강현이 도율을 불렀다.
“자네.”
“응?”
최강현이 상자를 내밀었다.
“가져.”
“뭐……?”
도율이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나보고 그거 구해다 오라면서. 영감이 필요해서 맡긴 거 아니었나?”
“그래. 확인해 봤으니 이제 됐네. 그러니까… 자네가 가져.”
“무슨……. 내가 왜?”
도율이 묻자 최강현이 당연한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자네가 우승하지 않았나. 그럼 우승 상품도 가져가야지.”
“…그게 그렇게 되나?”
“얼른. 노친네 팔 떨어져.”
최강현이 엄살을 부리자 도율이 상자를 건네받았다. 그의 손에 들린 상자를 보며 최강현이 씁쓸한 미소를 띄웠다.
“어떻게 쓰든 자네 마음이지만, 내 한 가지 전설을 가르쳐 주지.”
“전설? 무슨 전설?”
“세이렌의 눈물에는, 그 어떠한 상처라도 치료할 수 있다는 전설이 있지.”
최강현이 히죽 웃으며 말하자, 도율은 그게 유치한 장난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런 게 가능한 보석이라면 부르는 게 값이었을 거다. 세이렌의 눈물은 비싸긴 하지만 못 구할 정도는 아니었다. 신빙성이 떨어지는 전설이었다.
물론 생략한 말이 있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
최강현은 도율과 클레어의 사정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둘이 모종의 사정으로 계약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그러니 둘 사이에 사랑이라 부를 만한 감정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사람 일이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법이었다. 오래 살아온 최강현의 기억 속엔 의외라고 여기는 경험이 상당히 많았다.
그런 일은 앞으로도 벌어지리라.
“요긴하게 쓰는 날이 오길 바라지.”
그런 최강현의 말에 도율이 표정을 찌푸렸다.
어떠한 상처라도 치유할 수 있다는 전설을 가진 보석을 요긴하게 쓰는 날이라면, 그건 자신이 크게 다쳐야 한다는 뜻 아닌가.
“별 악담을 다 듣는군.”
의미를 모른 채, 그리 툴툴거리는 도율을 향해 최강현이 빙긋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