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82
82화 얘기는 끝났나?
“안 되겠군.”
도율이 결론을 내렸다.
도율이 지금 갇혀 있는 곳은 그림자 마녀가 ‘심연深淵’이라 부르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파경대계破境代界였다.
우주의 경계를 허물고 자신의 소우주를 바깥으로 꺼내, 세계의 법칙을 일부 고쳐 쓰는 행위. 도율에겐 이제 놀라운 개념도 아니었다.
게다가 법칙이란 마력이나 내공을 불문하고 우선시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마력을 통해 발동하는 스킬이나 특성이었다면 도율이 가진 내공으로 파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법칙을 바꾼 거라면 도율이라 해도 거스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주혁을 상대할 때도 그의 파경대계 ‘공수래공수거’의 법칙 안에서 승리를 거뒀다. 법칙은 절대적이지만, 시전자 역시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법칙이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었으니까.
그러기 위해 우선, 규칙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었다.
‘그림자… 인가.’
넓다고 할 수 없는 방. 도율은 이미 기감의 범위를 확장해 모든 영역을 동시에 파악하고 있었다.
이쪽 세상의 각성자가 도율이 기감을 펼치는 걸 감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파장 형태로 내보내도 충분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방 안을 고속으로 이동하며 기감의 사각지대를 찾아다녔을 가능성까지 고려했다.
도율의 기는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그를 속이고 움직일 수 없었다. 공기의 기류마저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림자 마녀는 정말 이곳에 없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적어도 도율에게 있어서는.
정말 바깥에서 훔쳐보고 있을지, 아니면 이 방 안 어딘가에 있지만 도율조차 알아낼 방법 없이 숨어 있는 건지.
“그림자를 쫓는 건…….”
지금부터 알아볼 차례였다.
“불꽃이지.”
도율이 내공을 끌어 올렸다.
화약은 충분했다. 놓치는 곳 하나 없이 기감을 펼치기 위해 내공을 넘칠 정도로 방출해 놓은 상태였다. 비유하자면 이곳은 커다란 기름통과도 같았다.
도율이 점화선에 불을 붙였다.
구구웅–!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다. 거대한 진동이 일어난 듯한 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삼매진화가 단숨에 방 안을 모두 집어삼켰다. 이미 존재하는 산소와 내공을 모두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모자라다는 듯이 혀를 날름거렸다.
도율이 그 연료를 끊임없이 주입했다.
심연이라 불리던 검은 방은, 순식간에 업화의 지옥으로 변모했다.
‘이런 무식한……!’
그림자 마녀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이 방 안에서 그림자가 되어 어둠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이동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그림자의 안이었다. 그 속을 자유롭게 떠돌거나 모습을 감추고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설령 방 안을 모두 불태운다 하더라도 그림자 속에 잠시 대피하는 걸로 대처할 수 있었다.
차원의 박리剝離.
그녀가 가진 기술의 비밀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방 안에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절대로 찾을 수 없고, 공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엄연히 이 공간 안에 존재했다.
그리고 이 공간이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불꽃이 폐부를 불태우는 지옥이 되었다.
몸의 겉부분은 마력으로 보호할 수 있었지만, 공기에 섞인 열기는 그대로 들숨이 되어 들어왔다. 마력으로 식히는 것도 크게 소용이 없었다. 너무 뜨거워서 시간이 모자라도 너무 한참 모자랐다.
‘숨이……!’
그림자 마녀가 목을 감싸 쥐었다.
각성자인 덕분에 버티고 있지만,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생물에게 꼭 필요한 호흡 활동이 고통으로 물드는 건 견디기 어려웠다.
‘이깟 불꽃 따위……!’
그림자 마녀가 손을 휘둘렀다. 마력을 휘감아 불꽃을 덮어 보고자 애썼다.
그러나 불꽃이 주춤하는 것도 잠시였다. 그조차도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방 안에 빈틈없이 들어찬 불꽃은 아주 조금 자리만 자리가 비어도 금방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몸뚱이를 불렸다.
신체를 보호하는 것과 화염을 꺼뜨리는 것.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건 벅찼다.
‘이… 망할……!’
그림자 마녀가 도율을 노려봤다.
아크투러스 토너먼트 결승전에서 도율이 불꽃을 피워 올리는 모습은 이미 봐서 놀라울 건 아니었다. 하늘을 꿰뚫을 정도의 화력을 자랑하는 검은 불꽃을 목격했기에.
하지만 이렇게 공멸을 노릴 줄은 몰랐다. 방 안 가득 불꽃을 피워 낸다면,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태워 죽이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그러나 그 순간.
도율을 바라보는 그림자 마녀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설마…….’
도율은 그림자 마녀와 달리, 그 어떤 괴로움 한 점 없는 평온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표정에 감정이 서려 있다면 그것은 괴로움이 아닌, 단순한 지루함에 불과했다.
‘멀쩡하다고……? 이 불꽃 속에서……!?’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림자 마녀.
무법과 폭력의 도시, 불야성의 뒤를 주무르는 조직 테네브리스의 우두머리.
자신의 능력만을 위해 안배해 놓은 비밀의 방, 심연.
그녀는 그녀가 아는 몇몇 규격 외의 강자를 제외하면 절대 패배할 일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조차도 이 방 안에서라면 비등하게 싸움을 이어 나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결계가……!”
파경대계. 새로운 법칙을 덧씌우기 위해선 계속해서 마력을 순환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림자 마녀는 더 이상 파경대계에 필요한 마력을 운용할 수 없었다. 목숨을 이어 가기 위해 몸을 지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큭…….”
다소의 피해를 감안하더라도 버틸 작정이었다. 자신은 강대한 각성자였다. 상대가 제법 재능이 있는 아이라 할지라도, 소모전으로 몰고 가면 유리한 건 당연히 자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모되고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그 사실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었다.
“어떻게…….”
그림자 마녀의 의문이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어떻게 그 열기 속에서도 멀쩡할 수 있었던 거지……?!”
그녀의 물음에 도율의 표정이 한순간, 아주 짧게 굳었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가장한 도율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익숙하니까.”
쉬이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이었다.
* * *
삐빅, 삐빅!
대계 안을 빠져나오자 전파가 터지기 시작한 건지 작은 뱃지에서 알람 소리가 울렸다.
간단한 버튼을 누르자 형편없는 음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만했다.
탐정의 목소리였다.
[작전대로, 시간 끌어 주신 덕분에 다 끝났어요.]“그러냐.”
뱃지는 작은 무전기였다. 주파수를 맞춘다거나 하는 기능 따윈 없는 데다가 고작 두 명밖에 연결해 주지 않는 물건이었다.
“작전……?”
바닥 위에 엎드려 있던 그림자 마녀가 흐트러진 머리 사이로 눈동자를 쏘아 보냈다.
내가 이곳의 우두머리, 그림자 마녀의 시선을 끄는 사이 탐정은 우리가 부스터라 부르던 약물을 개발하던 연구실을 습격했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그림자 마녀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안 돼…….”
폐가 익어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상태일 텐데, 그걸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절대 안 돼.”
그림자 마녀가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어디로 가려는 건지는 명백했다.
“…위치 불러! 빨리!”
[네……?! 아, 여기 좌표는…….]나는 그림자 마녀를 뒤따라 나섰다.
탐정이 불러 준 좌표에 도착하니 그림자 마녀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탐정은 발을 헛디딘 건지 바닥에 자빠져 있었다.
내가 몸을 날려 탐정과 그림자 마녀 사이를 가로막았다.
카앙–!
검은 칼날이 손날이 부딪쳐 궤도를 이탈했다.
“안 돼.”
그림자 마녀가 중얼거렸다.
“이곳에 담긴 의미를, 너희는 몰라.”
여유 넘치던 말투는 온데간데없이, 그녀는 목소리를 떨고 있었다.
등 뒤에 보이는 연구실. 이대로 그림자 마녀를 무시하고 연구실을 불태우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삼매진화로 붙인 불은 내 의지가 명하지 않는 한 꺼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등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여긴 내게 맡겨 주지 않겠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불야성. 이곳에선 밤과 향락의 도시에 누구나 본성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쓰고 얼굴을 가린다.
그러나 노인은 주름진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보던 얼굴 그대로.
“드디어 도착했나.”
센터장 최강현.
영감이 도착해 내 앞을 가로질렀다.
영감의 얼굴을 마주한 그림자 마녀의 태도가 그대로 멎었다. 끝없이 점철된 증오를 두르고 있던 눈동자 역시 얼어붙은 것처럼 고요했다.
“최강현…….”
그림자 마녀의 입술 사이로 영감의 이름이 비집고 나왔다.
“위니.”
영감 역시 그녀의 정체를 아는 듯했다.
“왜……. 이런 짓을 한 거냐.”
연구실 내부.
이곳에선 약물을 만들기 위해 자행된 수많은 실험의 결과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부스터를 사용한 후 마력 코어가 파열해 사망한 시체가 늘어져 있는 것 정도는 양반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이곳에선 보다 자세한 실험을 위한 상세한 연구가 진행되어 있었다.
생명체를 마치 무기질 다루듯 정교하고 치밀하게 분석해 놓은 결과들이.
“…왜냐고?”
그림자 마녀, 위니가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라면 알 거 아냐.”
그녀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언제까지 거짓된 평화 위에서 아웅다웅할 생각인 거지? 그렇게 자신을, 남을, 세상을 속이고 살아가면 마음이 편한가?”
“…….”
“내겐 너희가 역겨운 위선자로 보여.”
그림자 마녀의 말에 영감이 이를 악물었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 사실이 네겐 안 보였나?”
“최선을 다하면, 뭐?!”
그림자 마녀가 소리를 높였다.
“떼죽음을 당하고 나서도, ‘그래도 우리는 체면 지켜서 고상하게 굴었으니 영광스러운 죽음입니다.’ 하고 누구한테 감상이라도 써 달라고 하게?!”
그녀가 직후 짐짓 차분한 목소리로 비웃었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어. 넌 아직도 그걸 못 배운 거야?”
그러자 영감이 주먹을 틀어쥐었다. 단순한 논파가 아니었다. 그림자 마녀가 영감의 추억 속 치부를 쑤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영감은 노기를 삭히고 끊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왜.”
“왜?”
“왜……. 투기장 우승 상품으로 세이렌의 눈물을 내건 거냐.”
“뭐어?”
영감이 침착하게 다시 한번 물었다.
“그 세이렌의 눈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건 네가 갖고 있던 물건이야. 그걸 왜… 상품으로 걸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림자 마녀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가진 물건이잖아. 내가 주최한 대회에 그럴싸한 물건을 내거는 게 뭐가 잘못됐어?”
“……!”
빠드득.
영감이 어금니를 갈았다.
“그런가. 자네는 이미…….”
목소리에서 체념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런 영감의 등에 대고 내가 물었다.
“얘기는 끝났나?”
영감은 지친 듯한 얼굴로 돌아봤다.
“미안하네. 기다리게 했군.”
“어떻게 할까.”
그 말이 의외라는 듯 영감이 처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깊게 팬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다.
영감에겐 몇 번이고 신세를 졌다.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돈처럼 숫자로 매겨서 거스름돈을 계산할 수 있는 일들은 아니었다.
영감과는 서로 크기를 알 수 없는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이 사건엔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얽혀 있다. 이건 영감의 사정이었다. 영감이 내 사정으로 벌인 일의 뒤처리를 맡아 줬던 것처럼, 나도 빚을 갚을 이유가 있었다. 어떻게 할지는 영감이 정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난 당신 부하잖아.”
“……!”
내 말에 영감이 눈을 크게 떴다. 이곳에 와 처음으로 느슨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렇지.”
지친 기색을 지우고, 영감이 단단한 목소리로 내게 명을 내렸다.
“모두 불태우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