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101
101화
“어머니라고?”
신호등에 멈췄던 차가 출발하고, 앞을 보던 우재가 힐끗 이정의 안색을 살폈다. 지난번에 가족, 그리고 지원 집안과의 관계에 대해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네. 왜 이제 전화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요.”
라디오 에 출연해 가족에 대해 흘린 것이 5월 말이었으니 벌써 3주나 지난 일.
완전히 코너의 고정 게스트가 되어 2번이나 더 출연하는 사이에도 없었던 연락이었다.
“연락하려면 더 일찍 할 수 있었을 텐데. 둘 중 하나겠죠.”
이정이 그동안 괜히 머리 아파지고 싶지 않아 검색을 피했던 병원 이름을 검색했다.
“새로운 문제가 생겼거나, 뭔가를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거나.”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하루 전 날짜로 새로운 기사가 잔뜩 올라와 있었다.
“새로운 문제가 생겼거나. 이 경우엔 전자네요.”
“네 방송 듣고 어떻게 연락할까 고민하느라 늦으신 거일 수도 있지 않아? 집 나온 이후로는 한 번도 연락 안 했다고 했으니까 부모님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셨을 수도 있고.”
우재는 혹시나 이정이 가족과 화해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치는 게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랑 제대로 된 대화를 하고 싶었다면 적어도 류지원네를 압박하진 않았겠죠.”
“그건 그렇지만….”
“지금 기사 뜨는 꼴 보면 더 신빙성 없고요.”
그의 말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우재는 필요 이상 그를 설득하지 않았다.
“됐다. 내가 옆에서 거든다고 해결될 만한 일은 아닌 거 같고. 혹시 무슨 문제 있으면 얘기해. 일 더 커지기 전에.”
“겉치레는 엄청나게 챙기는 집이라 문제가 생겨도 밖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게 서로를 헐뜯고 재산을 차지하기 바쁜 소리 없는 전쟁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가족 간의 불화 하나만큼은 철저하게 숨기는 집안이었다.
― 연락처 1개 선택됨.
― 차단하시겠습니까?
부재중 전화번호를 꾹 누른 이정이 차단 아이콘을 누르려다 말고 멈칫했다.
“이제 와서 차단해 봤자 소용없겠지.”
당연히 번호가 저장되어있을 거라는 듯, 혹은 번호를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듯 누구인지조차 밝히지 않고 보낸 문자.
“내 번호는 어떻게 안 거야?”
그가 학생 때 쓰던 번호는 집을 나온 후 요금 미납으로 해지되었다.
이후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민혁의 세컨 폰을 사용했고, 이후에는 아예 새로운 번호를 개통했으니 상식적으로는 이정의 부모가 그의 현 핸드폰 번호를 알지 못해야 정상이었다.
“아, 뻔하지 뭐.”
지원의 부모님이 이정의 번호를 알려주진 않았을 테고, 그의 근황을 조사한 방법. 즉 뒷조사일 게 분명했다.
“흐음….”
이정은 그가 당연히 연락할 거란 전제가 깔린 문자에 정말로 연락을 할지 아니면 무시할지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오는 연락도 받고 싶지 않았지만, 계속 간접적으로만 연락할 줄 알았던 그들이 먼저 이렇게 연락을 해 온 이상 피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일단 무시해야겠다.”
결국, 이정이 선택한 방법은 무시였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먼저 이정을 찾기 시작한 것은 가족들이었으니 지원의 일이 해결된 그로서는 급할 게 없었다.
조금 전보다 만 기사들을 다시 훑자 단순 간호사 파업으로 터진 불만들은 이제 내부고발로까지 이어져 꽤 거센 불길이 되어있었다.
“조만간 또 연락 오겠네.”
사실, 가족에게 이용당해 줄 마음이 조금도 없는 것과 별개로 대체 그를 데려다 뭘 어떻게 하고 싶은지가 궁금하기는 했다.
“잘못하다간 소리도 못 내보고 휩쓸리기 딱 좋겠더구만 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건지.”
그래봤자 이정은 아직 라이징 스타 대우도 겨우 받는 수준의 배우였다.
“그리고 보니까, 너희 집, 너 데리고 이미지메이킹 하고 싶어 한다고 했지?”
“물어본 게 아니니까 장담은 못 하는데, 집안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그런 거 아닐까 대충 짐작하는 거죠.”
현재 촬영 중인 이 흥행에 성공해 대세 배우가 된다 해도 작은 스캔들 하나로도 자리가 위태로운 신인.
“거의 다 왔다. 내릴 준비해 이정아.”
이정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문자도, 통화기록도 지우지 않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너 은근히 기분 좋아 보인다?”
“그래요?”
기분 나쁘다는 듯 찌푸려진 인상과 달리 이정의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더위에 반쯤 정신을 놓은 채 풀린 눈을 하고 있던 좀 전과는 확연히 다른 얼굴이었다.
“뭐, 짜증은 나는데 기분 나쁘진 않네요. 오히려 좀 우습다고 해야 하나.”
“그게 뭐야.”
이정이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좀 얼굴 알렸다고 냉큼 이용하려는 게 짜증 나긴 하죠.”
“근데?”
“또 몇 년 동안 연락도 안 한 아들의 별거 아닌 이름값이라도 필요할 정도로 상황이 나쁘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라 기분이 나쁘진 않아요.”
회귀 전의 이정은 병원을 중심으로 견고한 가족에게 사소한 복수조차도 하지 못했다.
“다르게 생각하면 내 이름값이 커질수록 역으로 당하게 만들 힘도 커지는 거잖아요.”
“하여간 성격 특이해.”
“그냥 성격 나쁘다고 해도 돼요.”
“그래 너 성격 나쁘다.”
차라리 한의사가 되었다면 두고두고 집안의 역린이 될 수 있었을 수도 있지만, 사고로 자퇴 후 매니저 일을 하는 그가 집안사람들을 상대하기엔 상대적으로 너무 힘이 없었다.
“그냥 이전처럼 모르는 사이처럼 사는 게 서로한테 편했을 텐데, 왜 일부러 상황을 악화시키나 싶기도 하고. 여러모로 복잡하네요.”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겨우 3, 4년의 악감정쯤은 금세 풀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겠지만, 이정에게는 또 다른 20년의 세월이 있었다.
“나야말로 복잡해 죽겠다. 슬슬 스케일이 커지는 게 조만간 대표님한테도 말씀드려야 할 거 같은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을 해야 할지”
딱딱하고 사무적인 대표, 희경의 얼굴을 상기한 우재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일단 일부터 열심히 해야겠죠.”
“하아…. 그래 기운 좀 차린 게 어디냐.”
이정을 내려준 우재는 주차하고 오겠다며 다시 차를 끌고 사라졌다.
“오는 동안 잘 쉬었나 봐? 좀 괜찮아 보이는데?”
“해가 져서 그런지 한결 낫네요.”
이동한 장소에서 찍는 장면은 영화의 흐름에서 크게 중요한 장면이 아닌 탓인지 송 감독 대신 촬영감독이 현장을 총괄하고 있었다.
“송 감독님은요?”
“부분 편집 시작하겠다고 들어가셨대.”
“벌써요?”
촬영이 시작된 지 이제 한 달 반. 총 3개월로 예상했던 것과 달리 수월한 촬영에 조금 더 일찍 촬영을 끝낼 수 있을 거라 짐작하긴 했다.
하지만, 어느 한 부분 중심적으로 찍은 것 없이 극 전체를 오가며 얼기설기 찍어낸 탓에 편집을 시작하기엔 조금 이르지 않나 싶었다.
“후반부가 너무 마음에 들게 나와서 안 건드리고는 못 견디겠는데 뭐 어떡합니까. 보내줘야지.”
의아해하는 이정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촬영감독이었다.
“아, 감독님.”
“송 감독 같은 타입은 뭐에 꽂히면 말려도 안 들어요. 그냥 하고 싶은 거 하게 두는 게 낫지.”
송 감독보다 경력이 많은 그가 어쩌다 의 촬영감독을 맡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송 감독을 잘 알고 있는 듯 별로 놀란 기색도 없었다.
“야외 씬 때는 계셔서 당연히 여기로 이동하셨을 줄 알았거든요.”
“오다가 갔어요. 오히려 난 오래 참았다 싶었는데. 장례식 씬 찍고 나서 그거 손보겠다고 며칠 밤새다가 이젠 도저히 병행 못 하겠다 싶으니까 나한테 넘긴 거지.”
나쁘게 말하면 자신의 일을 촬영감독에 미룬 셈이었지만 송 감독과 촬영감독의 신뢰 관계가 퍽 돈독한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심드렁한 태도였다.
“뭐,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총괄 감독하던 때 생각나고. 빠르게 촬영하고 마무리합시다. 힘든 씬은 다 찍었잖아요?”
촬영감독의 말대로 엔딩 씬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주요 장면들을 완성한 터라 부담감이 덜 하긴 했다.
“어차피 훈진 씨도, 이정 씨도 딱히 디렉션 필요한 스타일은 아니잖아요?”
“그거야 뭐, 훈진 선배님은 원래 컷 한 번에 따시는 걸로 유명하시잖아요.”
“사돈 남 말 하시네. 이정 씨도 마찬가지예요.”
악소문과 별개로 연기력만큼은 인정받던 훈진이 이정의 기세에 눌려 NG를 낼 정도였으니 딱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몸 편해, 마음 편해 영화 촬영이 매일 이러면 일 년에 세 편도 더 찍겠어요. 진짜로.”
“칭찬하셔도 이제 더 나올 거 없어요.”
“참나, 이 사람이 진심을 곡해해서 듣네? 진짜라니까.”
이정과 훈진이 같이 붙어 있는 씬이 많은 것 역시 의 촬영 시간을 줄이는데 한몫했다.
컷, 컷, 그리고 컷. 건드릴 것 없이 한 번에 통과가 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좀 더 지나면 몸값 때문에 둘이 같이 영화 찍는 일 없을 거 같으니까 지금 실컷 찍어야지. 자, 촬영 시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