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145
145화
여태 험난했던 게 거짓말 같게도 막상 여주인공이 캐스팅되고 나자 나머지 일들은 수월하게 풀렸다. 이제 연기에만 집중하게 해주겠다던 윤 작가의 호언장담이 거짓말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대본 리딩 날, 이정이 한자리에 모인 배우들을 보고 살짝 감탄했다.
10주년 기획 드라마라는 이름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정 PD의 수완이 좋은 것인지 의외로 연기구멍 하나 없이 전부 탄탄한 배우들이었다.
“자, 그럼 다들 앉아주세요!”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이정이 제 옆자리에 앉은 진주에게 슬쩍 고개를 까닥여 인사했다.
“잘 부탁드려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진주의 목소리는 쾌활했다. 어째서인지 연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보현을 놓친 것은 아쉬웠지만 밝은 기운을 내뿜는 진주가 여주인공이 된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희도 역의 이이정입니다.”
의 편성일은 3월. 같은 10주년 드라마들이 이미 촬영을 시작한 것에 비해 은 이제 막 대본 리딩을 시작했으니 조금 늦은 편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말은 즉, 촬영 일정 역시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의미였다.
‘맨날 여유롭게 촬영하고 싶다고 말만 하고 매번 일정에 치여서 촬영하네.’
사전제작으로 시작했던 도 그렇고, 기어코 일정을 당겨 영화제에 참가했던 도 그렇고, 초기 일정은 결코 바쁘지 않았음에도 어째서인지 계속 빠듯한 일정을 소화해 내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발 밤샘 촬영 좀 그만하고 싶은데 힘들겠지.’
소박한 희망이라면 희망이었지만, 지금 일정을 떠나 회귀 전 과 같은 사고가 터진다면 가망 없는 이야기였다.
그나마 이정이 바쁜 스케줄을 버거워하기보단 즐거워하는 쪽이라 다행이었다.
“안녕하세요. 예서, 율하 역의 이진주입니다. 드라마는 처음인데 이렇게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고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앞으로 촬영에 바라는 점 같은 거 있을까요?”
“바라는 점은 없고요. 작가님 마음에 들어서 분량 늘릴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차례대로 본인 소개를 하는 타이밍에도 기죽지 않고 밉지 않게 할 말을 하는 모습이 당차 오히려 보기 좋을 정도였다.
“김동철 역의 곽우현입니다. 다시 정 PD님과 드라마를 할 수 있게 되어 기쁘네요.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차진우 역의 류영진입니다.”
“남미영 역의 신정혜입니다.”
정 PD의 믿을 구석이었던 이정의 상대 배우 곽우현을 비롯해 주, 조연 배우들의 인사가 끝났다.
‘회귀 전 에 곽우현 배우는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이정의 상대역인 곽우현은 정 PD의 말대로 그 때문에 드라마에 참여하게 된 건지 이정이 기억하고 있는 에는 출연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후 속 쓰려…. 적당히 마실 걸 그랬나? 이 시간엔 문 연 마트도 없고….”
“희도야, 나는 아영이랑 지철이 데려다줘야 할 거 같은데 혼자 갈 수 있겠냐?”
오늘 대본 리딩은 기존 캐스팅 당시 전달되었던 1화, 그리고 추가로 전달된 4화 이렇게 두 편. 캐스팅이 확정된 후 약간의 수정은 거친 대본은 현재 5화까지 전달되었다.
“네, 형. 너무 많이 마신 거 같아서 술도 깰 겸 좀 걸어가려고요.”
“걸어갈 수 있겠어?”
“저기 다리 지나면 금방이에요. 한 30분?”
“어두운데 조심히 들어가. 내일 보자.”
“네, 형. 내일 봬요.”
자리하지 않은 조연, 혹은 엑스트라의 대사는 윤 작가와 정 PD가 대신하며 가볍게 흘러갔다.
“어후, 내가 술이 덜 깼나 이 새벽에 다리 위에 웬 사람이…. 잠깐만, 진짜 사람이잖아? 저기요! 저기요!”
“가까이 오지 마세요!”
“저, 저기 알았으니까 잠깐만요. 무슨 일인인지는 몰라도 여기서 떨어지면 진짜 죽어요.”
“진짜로 죽고 싶은 거니까 잘됐네요.”
1화의 예서, 그리고 그 이후의 율하를 연기해야 하는 진주는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두 사람의 포인트를 잘 살려 연기했다.
“그냥 가요. 아무도 마주치지 않은 것처럼. 그게 서로를 위한 길이에요.”
“아니, 사람이 죽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그냥 가요! 대체 왜 죽고 싶은 건지는 몰라도 일단 내려와서 얘기해 봐요. 네?”
이정도 대본 리딩은 이제 환상 없이도 능숙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죽으려고 하는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부담감, 처음 겪는 상황에 대한 당황스러움.
사실 대본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전부 외운 장면들이었다.
“아 씨, 분명 이 근처에 있었는데?”
결국 예서가 떨어지고 희도는 공중전화를 찾아 나선다. 1화의 배경이 90년대 후반인 탓이었다.
“여, 여보세요? 거기 119죠? 여기, 여기 사람이 떨어졌는데요! 강, 강가요! 무슨 다리냐고요? 아니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사거리 비어비워에서 구름아파트 가는 길로 쭉 걸어오면 있는 그 다리요!”
공중전화에 돈을 넣는 시늉을 한 이정이 앉아 있으면서도 전력 질주 한 사람처럼 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대사를 읊었다.
“호흡 조절이 대단하다. 소리만 들으면 진짜 뛰다 온 거 같은데 얼굴은 또 멀쩡해.”
“정 PD님 복이지. 맨날 기획 뺏기고 무시당하고 그러더니 이이정이 정 PD님 드라마를 고를 줄 누가 알았겠어?”
“맞아. 난 솔직히 이번 특별 기획도 엎어질 줄 알았어.”
그런 이정의 연기를 보던 스태프들이 목소리를 낮춰 소곤댔다.
“유희도! 야, 유희도! 몇 번을 불렀는데 대답이 없어?”
“저, 저요?”
“그럼 여기에 유희도가 너 말고 또 있어?”
“하아…. 그러니까 내가 유희도…. 김희도가 아니라 유희도란 말이지…. 들어도 들어도 어색하네.”
“뭘 혼자 중얼거려? 빨리 와. 오늘 행사 때문에 바쁘니까.”
어느새 1화의 대본 리딩이 끝나고 배우들이 차례대로 4화 대본을 펼쳤다. 시간 간격이 완전히 다름에도 모두가 물 흐르듯 이어 연기했다.
“주말에 차 사고 났다더니 아직도 상태 안 좋아? 오후 반차 쓸래?”
“됐습니다. 오늘 바쁘다면서요.”
“지금 너 하는 꼴 보면 도움이 안 될 거 같아서 하는 말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말투나 분위기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지금의 희도가 딱 그랬다.
“608호실 김순자 할머니 아들분 외 1명 오셨어요. 두 분 다 오늘 행사 참가하시겠대요.”
“아 귀찮아. 외부인 데리고 오면 우리가 나가야 하는 거 뻔히 알면서 진짜…. 야, 희도야! 네가 좀 갔다 와라.”
“네. 알겠습니다.”
스무 살, 통통 튀던 희도의 말투는 12년의 수감생활을 통해 서서히 바뀌어 좀 더 날카롭고 딱딱한 말투로 변했다.
“김동철… 형사님?”
“음? 유 보호사. 웬일로 나와 있나?”
“김 과장님! 제가 들겠습니다. 주세요.”
“아니야. 우리 어머니 드릴 건데 내가 들어야지.”
가뜩이나 눈을 뜨니 칼 맞고 강에 떨어진 김희도가 아닌 고급 요양병원의 요양보호사 유희도가 된 상황에 혼란스러웠던 그의 눈에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행사 때는 안전을 위해 친인척 외 외부인은 보안 검색이 필수라서요.”
“아, 그렇지? 매번 혼자 와서 깜빡했네. 우 형사, 유 보호사 따라가서 보안검색대 통과하고 와.”
조금 늙긴 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 바로 그를 잡아넣은 형사 김동철이었다. 그는 경사였던 과거와 달리 형사과장이 되어있었는데, 이전과 다름없는 희도의 얼굴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것이 이미 서로 아는 사이인 듯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아, 네. 과장님 금방 오겠습니다!”
“어머니한테 가 있을 테니까 천천히 와.”
혼란스럽지만 겨우 정신을 차린 희도가 우 형사를 안내하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이야, 순간 그놈이 살아 돌아온 줄 알았네.”
명백히 유희도가 아닌 김희도를 칭하는 말. 그리고 그렇게 4화가 끝난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걸리는 것 없는 대본 리딩은 특별히 지적할 것 없이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진짜 촬영뿐이었다.
* * *
― 어디야?
“다 왔어. 그냥 퀵으로 보내면 되지 넌 왜 이런 걸 가져달라고 하냐?”
― 난 돈 없다. 네가 퀵비 낼 거야?
며칠 뒤, 놓고 간 대본을 가져다 달라는 지원의 말에 마침 한가했던 이정은 그녀의 회사 근처까지 나온 상태였다.
“이미 근처인데 이제 와서? 아, 그래서 너네 회사 어디 있는 건데 여기 건물 죄다 똑같이 생겼어.”
“이이정! 여기!”
길쭉한 빌딩 숲 안에서 지원의 회사를 찾지 못하고 헤매던 이정이 그를 부르는 소리에 핸드폰을 내렸다.
“와 땡큐. 너 아니었으면 쌤한테 깨졌을 듯.”
“정신 차려라 진짜.”
대본을 건네준 이정이 회사 건물로 들어가는 보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저 사람 너랑 같은 회사 소속이야?”
“누구? 아. 보현 언니? 응. 서로 대화해 본 적은 없지만. 그런데 조만간 회사 나갈 거 같던데.”
“왜?”
지원에게 들은 이유는 보현이 의 오디션을 탈락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 본인의 열의에 비해 연기를 너무 못한다는 것.
“우리 회사 실장님이 조금만 하면 될 것 같다고 데리고 있으신지가 3년이라는데…. 그 실장님 이번에 회사 그만두시거든. 그래서 덩달아 계약 종료될 거 같다는 소문이 있어. 근데 왜?”
그녀에 대해 묻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지원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잠깐만. 나 전화.”
― 이정아 아직 지원이 못 만났어?
“아뇨. 지금 막 만났어요. 이제 대본 전해주고 가려고요. 왜요. 형?”
― 그게….
“무슨 일 있어요?”
우재가 어딘가 불길한 목소리로 말을 늘어뜨렸다. 그 말투에 이정이 그를 채근하자 우재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 정 PD님이 차마 너한테 직접 말 못 하겠다고 전해 달라고 하시더라. 율하 역의 이진주 배우 하차하게 됐대.
“하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