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168
168화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슬며시 눈을 감아봐도 폐가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무너지던 그 순간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이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무서운 건 아닌 거 같은데.’
식은땀이 배어나고 심장이 쿵쿵거리며 제 존재를 알리고 있긴 하지만, 막상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의 정체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서움, 혹은 두려움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트라우마를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가?’
오히려 이 감정은 시합 출전 직전의 선수처럼 기분 좋은 고양감에 가까웠다. 회귀 전과 같은 현장이긴 해도 환상이 여전히 카메라를 가려주고 있기 때문인지, 그때와 전혀 다른 상황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피곤해?”
“아니에요.”
그 모습을 본 우재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물었다. 최근 이정이 한 번 쓰러진 이후로 그는 이정의 몸 상태에 촉각을 곤두세운 상태였다.
“저 주변 좀 둘러보고 올게요.”
“어. 조심해. 집이 워낙 낡아서 촬영팀도 고생했다고 하더라.”
“알겠어요.”
우재가 이정에게 충고했다. 그러나 현장 인원 중 이 폐가에 대해 이정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역시 전체적으로 그때보단 적네.’
이정은 우선 폐가를 돌며 연결된 장치들을 훑었다.
주연들뿐만 아니라 보조 출연자까지 안으로 들어가는 인원이 적지 않은 탓에 조명부터 카메라, 심지어 스태프들까지 꽤 많았던 그때와 달리 이번엔 단둘뿐. 그만큼 필요한 것들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발화 지점은 모르지만….”
폐가 아래쪽에서 불이 붙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발화의 원인이 합선이라고 했으니 높은 확률로 억지로 연결해 놓은 멀티탭이 원인일 텐데 크게 문제가 될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날씨도 건조하지 않고.’
오히려 곧 장마라 피부에 달라붙는 공기가 찐득찐득하고 습했다.
“당장 원인이 될 만한 건 없어 보이는데….”
그러나 사고는 원래 예기치 않게 튀어나온다. 콘센트의 연결 상태를 보기 위해 쭈그려 앉았던 이정이 일어섰다.
― 파삭
“이거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그냥 둬도 조만간 무너질 거 같은데.”
화재만 없었다면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는 말에 원인이 될만한 것들만 치울 생각이었는데, 무심코 짚은 벽이 그대로 뚫리는 모습에 이정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집이 엄청 낡았네요?”
“어, 이정 씨 언제 왔어요?”
그가 폐가를 나오자 아까는 보지 못했던 정 PD가 보였다.
“조금 전에요.”
“로케이션 잡아둔 곳이 무슨 공포 영화 촬영 때문에 일정 밀릴 거 같다고 해서 급하게 새로 잡았어요. 너무 낡아서 좀 불안 불안하죠?”
“여기서 치고받고 싸우면 집 무너질 거 같아요.”
이정이 제 손에 들린 벽의 잔해를 정 PD에게 보여주었다.
“와, 여기 어디예요? 아예 집이 통째로 썩었네. 썩었어.”
“거실에서 부엌 가는 복도 쪽이요.”
그의 말에 정 PD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확인하더니 무전을 쳤다.
“부엌 벽 쪽에 설치하려고 했던 거 이동해야겠다. 확인해봐.”
― 네.
“일요일에 와서 확인했던 것보다도 상태가 별로네요. 빨리 찍고 빠져야겠어요.”
“보니까 목재던데 불은 안 나겠죠?”
이정이 슬쩍 화재 위험성에 대해 말을 흘리자 정 PD가 웃으며 말했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마요. 우리도 혹시 몰라서 구역마다 미니 소화기 배치해놨어요. 날이 습해서 불도 안 붙을 거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정 PD가 카메라 앵글에 쉽게 걸리지 않을 것 같은 구석진 곳을 가리켰다.
“혹시 불나면 저걸로 끄면 돼요. 애초에 쓸 일 없어야겠지만.”
500mL짜리 물병과 비슷한 크기의 미니 소화기.
‘PD 한 명 달라진 걸로 이렇게까지 달라지네.’
우습게도 이정이 혹시 몰라 가지고 온 미니 소화기와 같은 브랜드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보현 씨 왔네요. 슬슬 촬영 들어갈까요?”
줄곧 쩔쩔매거나 당하는 모습만 보여 맹해 보였던 정 PD가 처음으로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순간이었다.
“나 오늘 거 대사 외우느라 죽을 뻔했다.”
“대사가 좀 많긴 했지?”
“좀이 아니라 완전. 무슨 설명봇된 느낌이었다니까. 나 이따가 대사 씹을지도 몰라.”
게다가 씬 특성상 희도보다 율하의 대사가 더 길고 많아 최근 긴장을 거의 하지 않았던 보현이 잔뜩 긴장할 정도였다.
“모르는 거 같으면 내가 적당히 받아쳐 줄게. 나 다 외웠어.”
이정이 그런 보현을 안심시키고자 말했다.
쪽대본이라 대사를 외울 시간이 부족했다면 모를까, 이미 대사를 외웠다면 대꾸하는 척 힌트를 주기만 해도 충분할 것이라 생각한 탓이었다.
“율하 대사까지? 대충도 아니고 싹 다?”
“응.”
그의 대답에 보현이 어이없다는 듯 이정을 쳐다보았다.
“벗겨보면 안에 슈퍼컴퓨터 있는 건 아니겠지?”
“헛소리할 여유 있으면 대본이나 더 보시던가.”
― 스탠바이. 들립니까. 스탠바이.
“네. 들립니다.”
폐가 안. 촬영지의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것을 몸소 느낀 정 PD가 필요한 인원만을 남겨둔 채 밖으로 빠졌다. 사람이 많아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 원래도 NG 잘 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찍고 끝낼게요.
정 PD가 최대한 빨리 끝내자고 신신당부했지만, 사실 폐가에서의 그렇게 금방 찍을만한 분량은 아니었다.
‘내 문제랑은 별개로 에서도 캐릭터 분기점이니까.’
이제껏 숨겨왔던 비밀들이 밝혀지면서 희도와 율하의 관계가 정리된다.
희도와 율하. 둘의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입소문을 탄 수많은 추측 중 무엇이 정답인지 밝혀지는 편이었다.
― 오케이 레디할게요.
정 PD의 말에 몇 없는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이따 보자. 나 대사 씹으면 꼭 도와줘야 돼.”
“알았다니까.”
밖에서부터 걸어들어오는 이정은 폐가 입구에 서고, 보현은 마치 회귀 전의 이정이 그랬듯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 레디.
현실의 이정에게도, 의 희도에게도 분기점이 되는 편이 시작되었다.
― 액션.
* * *
“여긴 대체….”
누군가의 문자를 받고 도착한 주소는 적어도 10년 이상 사람이 살지 않은 것 같은 폐가였다.
“저기요!”
손가락으로 철문을 훑자 뿌옇게 내려앉은 먼지가 묻어나왔다. 그나마 최근 누가 문을 연 적이 있는 듯 끌린 흔적이 있었지만, 희도는 문을 여는 대신 밖에서 소리쳤다.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들리는 것이라곤 희도가 내지른 고함의 메아리뿐. 그 어느 곳에서도 다른 사람의 대답은 없었다.
“오면 뭘 알 수 있다는 거야?”
처음 보는 폐가. 이전에. 그러니까 김희도일 적에 살던 집 근처이긴 했지만, 난생처음 보는 집이었다.
“찝찝하게 진짜….”
대낮이어도 어딘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얼굴을 구긴 희도가 문자가 왔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낯선 문자에는 이곳에 오면 원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적혀 있을 뿐이었다.
“지금…. 안에서 소리 나는 건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고 걸기를 반복하던 희도가 희미하게 들리는 벨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꺼림칙해 차마 들어가지 못했던 폐가 안. 분명 그곳에서 벨 소리가 들려왔다.
― 끼익
문을 열자 철문 특유의 불쾌한 소리가 뒤따랐다. 그리고 그의 짐작이 맞았다는 듯 벨 소리가 한결 뚜렷해졌다.
“별거 아니기만 해봐 진짜.”
희도가 벨 소리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김… 율하?”
희도가 그녀를 부르자 율하는 그제야 전화를 받았다. 그가 여태껏 전화를 반복했던 그 전화였다.
― 응. 희도야.
“응. 희도야.”
핸드폰 속의 목소리와 눈앞의 목소리가 돌림노래처럼 연달아서 들려왔다. 문자를 보낸 핸드폰의 주인이 율하라는 의미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왜일 거 같아?”
“모르니까 물어보지…. 문자도 네가 보낸 거야?”
희도가 혼란스럽다는 듯 주위를 훑었지만, 그녀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응. 내가 보냈어.”
생글생글 웃고 있는 율하와 다르게 희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녀가 굳이 다른 핸드폰을 이용해 그를 여기까지 오게 한 이유를 짐작할 수 없어서였다.
‘미치겠네.’
그러나 실제로 그의 낯이 굳어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만약 이정이 보현처럼 웃어야 했다면 진작에 NG가 났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까 넌 어떻게 온 거야? 네비 찍고 와도 찾기 힘들던데 여기까지 택시 타고 왔을 리도 없고.”
“내 차로 왔어.”
“차? 언제 샀…. 아니, 너 면허 없잖아. 딸 생각 없다며?”
가까스로 대사를 내뱉으며 연기를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점점 환상이 흐려지고 있었다. 환상이 이렇게까지 흐려진 것은 연기나 이름을 통해 환상의 농도가 복구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처음이었다.
“면허는 없지만 차는 몰 줄 알거든.”
“뭐야. 설마 무면허로 여기까지 왔단 뜻은 아니지?”
“맞는데? 나 운전 잘해. 면허만 없는 거야 면허만.”
다행히 희도 역시 혼란스럽게 굳어진 얼굴을 유지해야 하는 장면이라 어떻게든 계속해서 연기할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대사를 하면 할수록 환상이 점점 흐려졌다.
‘저번에 쓰러질 뻔했던 그 장면이잖아.’
심지어 지금 그들의 대사는 보현의 소속사 연습실에서 처음으로 폐가를 보고 주저앉았던 그때와 같은 대사였다.
“면허가 없는데 어떻게 운전을 해.”
“왜, 가끔 뉴스에 나오잖아. 무면허에 배운 적도 없는데 운전하는 애들. 내가 천재인가 보지. 거참. 유희도 씨. 표정 좀 풉시다. 농담도 못 하나.”
이정이 주먹을 말아쥐고 연기에 집중했다. 환상은 어느새 카메라가 확연히 보일 정도로 흐릿해져 있었다.
“나 운전해 봤거든. 그것도 꽤 오래. 20살 때 땄었으니까…. 한 6년 정도?”
“면허 딴 적 없다며?”
대사 한 글자, 한 글자를 내뱉을 때마다 환상은 점점 더 흐려졌다. 이제는 이정의 시야에도 붐마이크가 걸릴 정도였다. 카메라가 그들 주위를 서서히 도는 것이 느껴졌다.
“응. 딴 적 없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대체.”
율하를 노려보는 씬이라 시선을 많이 빼앗기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딴 적 없다고. 너도 비슷하잖아?”
그리고, 보현의 대사를 마지막으로 환상이 완전히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