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224
224화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칠판 한구석에 항상 자리하고 있던 수능까지의 디데이가 점차 줄어들어 어느새 D―10이 되었다.
“추… 워….”
“쌤!! 히터 좀 세게 틀어주세요. 추워 죽을 거 같아요!”
“동상 걸려서 공부 못하면 어떡해요!”
“참나, 공부 잘하는 승원이나 재은이는 가만히 있고만 왜 니들이 난리야?”
재은이 전학 왔을 때만 해도 슬슬 포근해지기 시작하던 날씨는 어느새 다시 추워졌지만, 승원과 재은. 두 사람의 사이는 변함없었다.
“우우! 학생 차별이다. 학생 차별!”
“쟤네 둘이랑 비교하면 저희가 억울하죠. 솔직히!”
“시끄러워 이것들아. 수능 얼마 안 남았다고 숙제 안 해오는 놈들 안 봐준다. 숙제 꼭 해와.”
승원과 재은이 서로를 보고 웃었다. 언젠가부터 두 사람이 세트로 언급되는 일이 잦아졌다. 그만큼 두 사람이 붙어 다니는 날이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 쌤! 고3한테 무슨 숙제에요! 수능이 다다음준데!”
“꼬우면 니들이 선생 하던가.”
“쌤!!”
“맞다. 반장, 부반장. 너희 담임이 너희 좀 불러 달라고 하더라.”
그 말에 승원과 재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1학기 내내 재은이 종종 자리를 비우는 승원을 대신해서인지, 2학기가 되자 자연스럽게 재은이 부반장이 된 탓이었다.
보통 고등학교 3학년 때는 1학기의 반장, 부반장이 2학기 때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편이라 재은은 부반장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다행히도 부반장 역시 학급 활동에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다며 좋아했다.
“왜 부르시는 거지?”
“그러게. 그냥 심부름이면 이렇게 안 부르실 텐데.”
“또 귀찮은 거 시키신다에 한 표.”
“그럼 난 수능 관련된 거다에 한 표.”
승원과 재은이 함께 교무실로 향하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대부분 시답잖은 이야기였지만, 두 사람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키득거리기 바빴다.
“쟤네 둘이 사귀어?”
“아닐걸? 오승원이 1반 반장이고 옆에 있는 애가 부반장일걸?”
“난 또 둘이 사귀는 줄.”
누군가는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말했지만, 승원도, 재은도 누구 하나 나서서 소문을 사실로 만들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수능 끝나면 뭐 할 거야?”
“나 재경이랑 놀러 가기로 했어! 너는?”
“나는…. 영운이랑 놀지 않을까.”
“그럼 우리 다 같이 놀러 갈까?”
지지부진한 사이에 먼저 용기를 낸 것은 재은이었다. 곧 있으면 수능, 그리고 졸업. 졸업 이후에는 지금처럼 자주 볼 수 없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럴까?”
잠시 티 나지 않을 정도로 고민한 승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까 너 생일 얼마 안 남았네.”
“얼마 안 남기는. 아직 3개월이나 남았는데?”
“그래도. 생일 선물 뭐 받고 싶은 거 있어?”
“글쎄….”
승원의 질문에 재은이 고민에 빠졌다. 생일 선물이란 건 원래 어지간하면 기분 좋기 마련이었지만, 승원이 주는 건 조금 더 특별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음…. 향수 같은 거? 먹을 거도 좋긴 한데 좀 오래 쓸 수 있고, 쓸 때마다 선물해 준 사람 생각나는 게 좋아.”
“아아.”
“쌤 저희 왔어요!”
교무실에 도착한 재은이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너무 대놓고 눈치를 준 게 아닌가 싶어 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자…. 그동안 다들 고생했다. 다들 긴장하지 말고, 평소 실력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시험 잘 치기를 바란다. 사랑한다. 얘들아.”
“으, 쌤! 오글거려요!”
“이것들이 덕담을 해줘도 진짜.”
그렇게 서로 눈치 주기 바빴던 일 년이 흐르고, 수능 날이 다가왔다.
“수능 잘 봐.”
“너도.”
같은 고사장으로 배정된 승원과 재은이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 *
“망했어…. 재수 각이야.”
“난 잘하면 턱걸이 아니면 재수…. 너네 둘은 물어볼 필요도 없지?”
“재은이는 수시 붙었잖아. 수능은 최저만 맞추면 되고.”
“난 그럭저럭 최저만 넘겼고, 잘 본 건 승원이지.”
수능이 끝나고, 고3의 희비가 갈렸다. 승원과 재은은 희, 영운과 재경은 비였다.
“됐어! 이제 수능 얘기 금지! 이제 다른 얘기 하자. 우리 어디 갈까?”
학교에 모인 네 사람이 놀러 갈 곳에 대해 떠들었다. 수능을 잘 봤든 못 봤든 우선은 자유의 몸이었다.
“놀이공원 갈까?”
“사람 너무 많지 않을까?”
“수능 끝나서 어딜 가던 사람 많은 건 똑같을걸?”
“아, 하긴.”
여기보다 저기, 저기보다 여기. 한참을 떠들던 네 사람은 결국 가장 첫 후보였던 놀이공원에 가기로 결정 내렸다.
“이럴 거면 우리 토론 왜 한 거냐.”
“그러게. 그냥 처음부터 놀이공원 골랐으면 진작에 예매까지 끝났겠다.”
“어차피 수험표 들고 가야 할인돼.”
삼십 분에 가까운 토론의 의미가 없는 시간이었다. 재경과 영운이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셈~”
“날짜 정하고 있어!”
“웅.”
재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가 승원을 불렀다.
“반장~ 밖에 누가 너 찾는데?”
“누가?”
“몰라 2학년 같은데? 여자야.”
다른 학년, 이성. 승원이 교실 밖으로 나가자 재경과 영운의 눈이 마주쳤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그거 같지?”
“맞지?”
“곧 졸업하니까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인 건가?”
작년까지만 해도 매달 행사처럼 찾아오던 고백타임. 그러나 올해는 승원이 고3이라서인지 도통 보이지 않았는데, 수능이 끝나니 또 이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오승원은 좋겠다 맨날 고백받고~”
영운의 한탄에 재경이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너는 고백받을 생각 할 게 아니라 고백할 생각을 해야지.”
“응?”
“너 재은이 좋아하잖아. 아니야?”
기지개를 켜던 영운이 그대로 굳었다. 재경은 설마 그것도 모를 줄 알았냐는 듯 생글거릴 뿐이었다.
“아…. 이놈의 학교는 1년을 다녀도 여전히 모르겠어. 또 길 잃어버렸네. 넓지도 않은데 대체 왜 이러나 몰라.”
“승원 오빠, 저 오빠 좋아해요!”
화장실에서 나오다 길을 잃어버린 재은이 누군가의 고백에 얼른 숨었다.
“어…. 그게, 채원아.”
“1학년 때부터 좋아했어요. 오빠 때문에 학생회도 가입했고, 수능 방해될까 봐 내내 지켜만 봤어요.”
빼꼼 눈을 내밀어 바라보니 역시나 승원이 맞았다. 후배의 뒷모습과 난처한 듯 머리를 넘기는 승원이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복도 한구석에 있었다.
“거절하실 거 알아요. 오빠가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누구 고백받아준 적 없는 것도 알아요. 그냥 제 마음이 그렇다고 말 하고 싶었어요. 오빠 졸업하고 나면 이제 진짜 볼 일 없잖아요. 저희.”
고백하는 후배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얼마나 큰 용기를 내고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였다.
“음. 미안해.”
더 듣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은 느낌에 재은이 살금살금 자리를 피했다. 아니, 피하려고 했다.
“나는….”
분명 피하려고 했을 뿐인데 재은 쪽을 바라보고 있는 승원과 눈이 마주쳤다. 난처하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넘기던 승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직 누군가를 사귈 생각이 없어.”
* * *
승원을 보낸 뒤, 차에 탄 재은이 그가 준 쇼핑백을 노려봤다.
“재경이도 안 챙긴걸. 왜….”
졸업 후 연락 한번 하지 않았던 그가 지금까지 그녀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이렇게 생일 선물까지 챙겨 줄 줄은 몰랐다.
슬쩍 쇼핑백을 들춰보자 그 안에는 예쁘게 포장된 상자 하나가 들어있었다.
“열어…. 말아….”
한참 동안 고민하던 재은이 포장을 풀어 대충 조수석에 던진 뒤 상자를 열었다.
“이건….”
목도리, 장갑, 귀걸이, 지갑, 향수. 그리고 다섯 개의 카드까지. 상자를 열어본 재은이 다급하게 재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경아. 너 승원이 전화번호 알아?”
― 누구? 오씅? 걔 번호 안 바뀌었을걸?
“고마워!”
― 근데 오씅 전화는 왜….
재경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은 재은이 승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년째 핸드폰을 바꿔도 저장되어있던 번호. 차마 지울 수 없었던 번호였다.
― 응. 재은아.
“너…!”
약간 취한 듯 나른한 승원의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난 줄 어떻게 알았어?”
번호를 바꾸지 않은 승원과 달리 재경은 꽤 여러 번 번호를 바꿨다. 동창 중 그녀의 최신 번호를 알고 있는 건 재경밖에 없었다.
― 다 아는 방법이 있지.
승원이 눈을 감고 푸스스 웃었다. 매번 재은의 번호가 바뀔 때마다 재경에게 번호를 받아왔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 잘 가고 있어? 이따 포항 내려가야 한다며.
“너 때문에 아직 출발도 못 했어.”
― 진짜?
“너 이게 대체 뭐야.”
재은의 손이 잘게 떨렸다. 한 개도 아닌 다섯 개. 그리고 그들이 서로 만나지 않은 지도 5년째. 이건 누가 봐도 그동안의 생일 선물이란 뜻이었다.
― 뭘까?
하지만 승원은 계속해서 묻기만 할 뿐 재은의 말에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보다 못한 재은이 한숨을 쉬었다.
“너 어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