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60
060화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예약하신 분 성함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도현으로 예약되어있습니다.”
주석이 이정을 불러낸 곳은 100% 예약제로 운영되는 한정식집. 주석의 알려준 이름을 말하자 직원이 잠시 확인을 하더니 그를 안내했다.
“확인되었습니다. 안쪽으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따로 밖에서 먹을 수 있는 공간 없이 전부 룸 형태로 되어있는 곳이라 이정도 종종 민혁과 온 기억이 있는 곳이었다.
“어, 이정 씨. 왔어?”
종영 이후 처음 보는 주석이 여전한 얼굴로 이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건강하셨어요?”
“나야 뭐, 이번 드라마 끝나고 놀기만 했으니까. 우리, 종방연 이후론 처음인가?”
술을 좋아하는 그답게 이정을 부른 자리에는 이미 술이 한가득 깔려있었다.
“네. 벌써 그렇네요. 제가 먼저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아무리 주석이 빈말로 출연 제의를 하는 성격은 아니라지만, 정식 계약도 되지 않은 작품을 그가 먼저 나서서 일정을 묻기엔 민망한 경향이 있었다.
“됐어. 내가 조만간 연락해 주겠다고 하고 늦은 건데. 그래서, 다른 촬영들은 다 끝났나?”
“네. 끝났습니다. 지금 당장 잡힌 촬영은 하나도 없어서 원하시면 언제든 들어갈 수 있어요.”
지금은 무명 감독이어도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전 세계적으로 흥행하는 작품을 만들 송계나 감독의 작품이었다. 기대되지 않는다면 거짓이었다.
“엄청 적극적이네 이정 씨? 내가 하자고 할 영화가 뭔 줄 알고.”
게다가 한주석 역시 영화 보는 눈이 좋기로 소문난 배우라 더욱 기대됐다.
“선생님이 보시기에 좋은 작품이실 테니까요.”
주석이 고른 영화들은 모두 수월하게 손익분기점을 넘는 것은 물론, 영화 내에서 새롭게 화제가 되는 배우들이 많았다.
“타이트하게 찍고 바로 개봉될 영화는 아니라서 지금 뒷심으로는 조금 부족할 수 있는데도?”
“그래도요.”
“얼마 나오지 않는 조연이라도?”
“그래도요.”
그렇기에 안하무인 그 자체였던 강현이 잠시나마 제 자존심을 꺾어가며 주석에게 잘 보이려고 한 것이었다.
“말은 청산유수네. 일단 밥부터 좀 먹자고.”
“제가 굽겠습니다. 선생님.”
“아니야. 이 집은 타이밍 못 맞추면 영 맛이 없어서 누구랑 오든 항상 내가 구워.”
이정의 만류에도 주석은 직접 집게를 들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조연은 농담이고, 서브쯤 될 거야. 메인 옆에 붙어 다니는 놈. 오늘은 비즈니스보단 이런저런 얘기도 좀 하고, 술 한잔도 하고 싶어서 불렀는데. 매니저 아직 밖에 있나?
“아뇨. 매니저 형한테는 말만 하고 혼자 왔습니다.”
이정을 통해 RW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되는 우재는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그와 달리 회사에 맞춰야 할 부분이 많았다.
“잘했어. 나도 도현이 보고 마냥 기다리라고 싫어서 들여보냈거든.”
식당을 예약한 사람이 누군가 했더니 주석의 매니저인 듯했다.
“지금 일하고 있는 매니저 형이랑 같이 회사에 들어가게 돼서 형이 할 일이 좀 많아서요.”
“힘닿는 데까진 혼자 해보고 싶다더니. 계약하고 싶은 회사가 생겼어?”
“예. 염두에 뒀던 소속사가 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계약하게 됐습니다.”
“어디인데 그래?”
주석이 적당히 익은 고기를 이정의 앞접시에 올려주었다.
“RW라고…. 처음부터 개인적인 친분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신생이라 말해도 잘 모르실 거예요.”
“음, 그래? 일단 먹으면서 말해.”
“아, 감사합니다.”
타이밍이 중요하다며 집게를 넘겨주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때깔 고운 고기였다.
“어지간히 똑 부러져 보이니 알아서 잘했겠지만, 계약서 잘 썼지?”
“네 그럼요.”
“뭐, 듣자 하니 춘배랑도 아는 사이라더니만, 하여간 그 친구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기가 막혀.”
“서 교수님을 아세요?”
주석은 서 교수와의 친분이 퍽 깊은지 자연스럽게 그녀의 본명을 불렀다. 미처 몰랐던 친분이었다.
“춘배랑 나랑 대학 동창이야. 한국대 연영과. 얼마 전에 동기 모임에서 잠깐 얼굴 좀 봤어.”
“두 분이 동창이신지는 몰랐네요.”
“춘배야 활동 일찍 접고 교수하기 시작했고, 내가 뜨기 시작한 건 그 이후니까 사실 활동기는 그렇게 겹치지 않지.”
까드득, 잔잔하게 깔려있던 배경음이 순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주 까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자. 한잔 받아. 다른 사람들은 여기 오면 보통 정종 같은 거 마시는데 난 그냥 소주가 편해서. 그쪽이 좋으면 하나 시켜줄까?”
“저 술 안 가려요. 괜찮습니다.”
정확히는 딱히 좋아하는 술이 없다. 뭘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회귀 전엔 여러 이유로 술을 입에 대는 날이 드물었다. 회귀 후 대본 리딩 회식 때 먹은 술이 회귀 전 39살 인생을 통틀어 마신 술과 엇비슷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그래? 저번에 보니까 잘 마시긴 하더니만.”
역시나 주석은 주는 대로 받아마시던 이정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어딘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학교 다닐 때도 춘배는 이미 인기스타였고, 나는 아직 데뷔도 못 한 연기자 지망생이었지만 어쩌다 꽤 친하게 지냈거든.”
“서 교수님은 아역으로 데뷔하셨으니까요.”
“그렇지. 뭐.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번에 모임 가서 이런저런 얘기 하다가 에 아는 신인이 있다길래 누군가 했더니 이정 씨더라고.”
넓고도 좁은 게 이 연예계라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렇게 지인이 있었다.
“서 교수님 덕분에 바로 주연급으로 데뷔할 수 있었죠.”
“원래 재민 역은 속 빈 강정이었잖아?”
주석은 그 역할을 꽉 채운 것은 다름 아닌 이정의 힘이었다며 그를 칭찬했다.
“나중에 성연이에게 전해 듣고 얼마나 기가 찼는지, 좋은 쪽으로 풀린 게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 날뻔한 거야.”
“운이 좋았습니다.”
“운은 무슨, 성연이 그 애가 그 정도도 설명 안 했을까 봐?”
이정이 강현에게 맞았을 때 열불을 토해내던 성연답게 아주 미주알고주알 전부 말한 듯했다.
덕분에 적당히 겸양의 말을 내뱉던 이정이 머쓱해졌다.
“자기 분량 챙기는 거 보면 욕심이 없는 것도 아니고, 머리도 잘 굴러가는 게 사람이 왜 이렇게 순해?”
“제가요? 선생님?”
“그럼, 여기 있는 게 이정 씨랑 나밖에 더 있어?”
고등학생, 대학생 때는 물론 회귀 전 사고 이후에도 이정은 줄곧 악바리라는 별명을 달고 산 사람이었기에 순하다는 평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저 진짜 빈말이 아니라 순하다는 말 태어나서 처음 들어봐요.”
“너무 순해서 주변에서 말 못 한 건 아니고?”
“절대 아니고요….”
이정은 주석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 건지 약간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강현한테 그냥 당해줘서 그런가?’
방송 초반 협찬을 빼앗겨도 딱히 화내지 않고 가만히 있고, 얻어맞았을 때도 아주 제대로 뒤엎을 생각에 가만히 있었더니 필요 이상으로 그를 착하게 보는 듯했다.
“순하지 않으면 강현 그 모자란 놈이 그렇게 하고 다닐 때 가만히 있어?”
“그건….”
역시나, 주린과 성연이 그렇듯 강현 문제에 부딪히지 않은 탓인 듯했다.
‘어차피 몇 년 안에 꼬꾸라질 놈이라 신경 안 쓴 거뿐인데….’
이정으로선 만 끝나면 영영 다시 볼 일 없으니 대충 넘어갈 생각이었지만, 남들이 보기엔 마냥 당하는 호구로 보여도 할 말은 없었다.
“그게 순한 거야.”
안타깝게도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주석이었지만 이정은 이 이상 어떤 말을 해도 변명으로만 들릴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혀 들을 생각이 없으신데.’
주석의 눈에서 이미 이정을 향한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랑 촬영할 때는 그런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말고. 많이 먹어. 그렇게 비리비리하면 촬영할 때도 힘들어.”
객관적으로 이정은 전혀 비리비리하지 않았다. 주석이 유독 이정을 마음에 들어 한다 싶었더니 약간의 측은지심이 섞인 마음이었다.
“하하….”
“그렇다고 내가 착하다고 퍼주는 사람은 아니고. 이정 씨 4화 촬영 때 기억나?”
“옥상 씬이요?”
“몇 달 후인가, 몇 년 후인가 파노라마식으로 옷 갈아입은 그 씬 있었잖아.”
“네. 옥상 씬 맞아요.”
아직 이정이 환상 유지 조건을 깨닫기 이전의 일이었다. 민혁에게 빌려온 옷을 꾸역꾸역 갈아입으면서 촬영했던 날.
그리고 주석과 유일하게 촬영이 겹쳤던 날이기도 했다.
“그때 연기 보면서 이정 씨랑은 꼭 한번 작품해야겠다 싶었어. 그게 데뷔작인 배우라고는 믿기 힘든 표현력이었거든.”
환상 유지를 못 할 때라 주변을 전혀 둘러보지 못했는데 주석이 그런 생각을 했을 줄은 몰랐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연기 얘기야 앞으로도 할 날 많을 거니까 오늘은 그냥 실컷 먹고, 갈 때 이거 챙겨 가.”
주석이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시나리오랑 계약서. 그리고 이것저것 좀 챙겼어.”
이정이 쇼핑백 안을 힐끗 보자 그의 말대로 서류철과 함께 이것저것 잡다한 것이 들어가 있었다.
“회사랑 계약한 줄 알았으면 회사로 보냈을 텐데. 이왕 가지고 온 거 일단 가져가고, 회사에서 이쪽이랑 연결해 달라고 하면 안에 끼워둔 명함 주면 돼.”
“선생님이랑 저 외에 캐스팅된 다른 배우분 계세요?”
“에이, 오늘은 일 얘기 하지 말자니까.”
당장 시나리오를 꺼내 읽지 않는 것만으로 이정이 충분히 주석의 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주석은 툴툴거리면서도 설명을 더했다.
“지금 확정된 건 훈진이 정도? 이정 씨처럼 계약서에 사인만 안 했지 그냥 하기로 한 거라고 생각하면 돼.”
주훈진 배우. 이정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당장 떠오르지 않는 정보에 잠시 생각에 잠기자 주석은 그 표정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손을 휘휘 저었다.
“걔가 소문만큼 그렇게 살벌한 놈 아니니까 이정 씨도 너무 무서워하지 마. 강현 같은 쓰레기는 절대 아니야.”
훈진을 꽤 잘 알고 있는지 주석은 걱정하지 말라며 거듭 이정을 안심시켰다. 물론, 이정은 전혀 걱정 없는 상태였다.
‘주훈진 배우라면…. 그 사람이잖아?’
이정이 매니저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극도의 낯가림을 고백한 배우.
데뷔 초부터 그래온 탓에 오해도 많이 받았고, 욕도 많이 먹어 이제는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나왔다고 말한 바로 그 배우였다.
‘주석 선생님이 왜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는지 알겠네.’
방송 이후 훈진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달라졌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도통 웃거나 말하는 일이 없어 굉장히 무서운 선배로 통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괜찮습니다. 안 무서워요.”
그의 속사정을 알면 무서워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배우로서의 훈진을 퍽 좋아했던 이정은 벌써 그와의 연기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로 일 얘기 그만하고 먹자고. 내가 콜 불러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셔. 자 짠 하자 짠!”
작은 유리컵 두 개가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비록 내일이 조금 두려운 속도이긴 해도 오늘만큼은 더 없이 기분 좋은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