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요이델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암살자보다 빠르게 걸었다.
“성후님! 성후님이셔!”
기절하듯 잠들고 일어났을 뿐인데 모든 게 바뀌어 있었다.
환각 반지는 언제 깨졌고, 자신의 머리는 왜 길어졌으며, 눈은 왜 유독 따갑지?
파멜라의 예언은 완전히 맞아 들어 순식간에 자문이 밀려들었고, 요이델은…….
“요이델 신관님! 신관님! 어디 계세요!”
사실 여자고, 성하의 반려였다는 게 알려져 대신전 안의 모두가 기절할 듯 놀랐다.
몇 신관은 신원을 속였단 사실을 지적했으나, 다른 신관들에게 끌려갔다 오더니 너덜너덜한 모습이 되어 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성하를 만나러 가시나요, 성후님?”
숨만 쉬어도 들어오는 질문에 식은땀이 났다. 내가 왜 성후가 되어 있는 거지? 언제부터?
천 년이 넘어서 탄생한 경사에 성국 안팎 할 것 없이 요이델을 찾아 댔다. 지상으로 파견됐던 신관들은 대신전에서 교육을 받겠다고 물밀 듯이 신청서를 밀어 넣었다.
“성하께서는 침실에서 쉬고 계십니다.”
“오늘 계획된 다른 일정은 없으니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평소 근엄하던 성궁의 근위기사와 보좌신관마저 속닥거리고 아무 말도 안 한 척했다.
“곤란해 보이시는군요.”
율리시스는 병문안을 온 요이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성하, 몸은 좀 괜찮으세요?”
“당신 덕분에 아주 좋습니다.”
“저…… 그런데,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으세요?”
그의 기억 속에는 요이델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무의식 속에 다녀왔다는 건 주위를 통해 전해 들었다.
“그곳에서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무의식 속에서 엄청 솔직한 성하를 만났어요.”
그 말에 율리시스의 안색이 묘하게 어두워졌다.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솔직했습니까? 당신에게 제 의견만을 관철시킨다든가, 혹은 당신에 대해 어떤…….”
그의 안색이 특히 초조해 보였다. 성하가 왜 저러지? 무의식에서 깨어난 뒤 춥다더니, 감기 기운이 있나.
하긴 남이 자신의 무의식을 봤다는데 걱정될 수도 있지. 요이델은 방긋 웃었다.
“걱정 마세요! 막 훑어보지는 않았어요. 그냥 무의식의 성하는 엄청 어렸고, 짜증 난다는 말도 많이 하고, 되게 툴툴거리고 쌀쌀맞아서 무서운 느낌이었을 뿐이에요.”
“아…… 무의식이 그쪽으로 솔직했다는 뜻이었습니까.”
“갈기를 세운 아기 사자 같았어요. 송곳니도 엄청 세우고요.”
율리시스는 안심한 듯 다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기울어진 고개를 따라 은발이 청초하게 흘러내렸다.
“어차피 그런 모습은 요이델 님께 들킨 지 오래이니 상관없습니다.”
“그럼 다른 모습도 있나요?”
“……글쎄요.”
“어쨌든 조그마한 성하는 엄청 귀여웠어요! 막말을 잘하시고, 음, 축복 마법을 보고 이상한 마법이라고 하면서 검을 엄청 열심히 잡았고요.”
“제 어릴 때가 확실히 맞군요.”
그는 자신의 과거를 인정했다.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네요?”
“그때의 저를 보셨으니 지금의 저를 더 좋게 보실 것 아닙니까.”
“네?”
“과거의 망나니를 보셔서 외려 다행입니다. 덕분에 지금의 제가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 같군요.”
율리시스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요이델을 응시했다.
“다른 일은 없으셨습니까?”
“아! 맞아요, 레일루스도 만났는데요, 엄청 귀여워서 어린 성하랑 잘 어울렸어요.”
“조금 더 큰 모습을 보셨다면 좋았을 텐데. 당신의 마음에 들었을 겁니다.”
“성하의 큰 모습은 지금 많이 보고 있는걸요?”
“아니요, 레일루스의 큰 모습 말입니다.”
“하지만 레일루스는 습격에서 성하를 보호하다…… 어린 나이에 죽었다고 했잖아요?”
“제가 그랬습니까?”
율리시스는 의아한 듯 잠시 고민했다.
“습격으로 죽은 것은 맞지만, 성마가 된 후의 일이었습니다.”
“……네?”
“오랜 시간이 흘러 기억은 뚜렷하지 않지만, 어떤 침입자가 위험을 한 번 막아 준 일이 있었습니다.”
율리시스는 요이델을 지그시 응시하며 덧그리듯 손으로 하얀 뺨을 쓸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처럼 따스했던 것 같기도 하군요. 아주 이상한 기억이었습니다.”
무의식이 아니었나? 요이델이 혼란을 느끼던 때. 율리시스가 옆에 놓인 수프 쟁반을 들고선 침대 위로 가볍게 떨어뜨렸다.
“……?”
“손목이 아픕니다.”
요이델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이렇게 그릇을 사뿐하게 착지시키고 손목이 아프다고?
“도저히 식사를 할 수 없겠습니다.”
“배가 많이 고프세요?”
“아무것도 먹지 못하여 견디기 힘듭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어쩔 수가 없군요.”
“그럼 보좌신관님을 불러올게요!”
탁.
율리시스는 나가려는 요이델의 손을 붙잡았다. 그는 위를 보며 유혹하듯 비뚤게 미소 지었다.
“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면서 도망치시는군요.”
직설적인 말에 요이델의 뺨이 붉어졌으나 유약한 환자의 투정을 내세울 수 있게 된 율리시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픕니다.”
“그렇지 않을걸요? 엄청 건장해 보여요.”
그는 혈색도 창백하지 않았고 눈빛도 불타오르고 있었다. 저게 어디가 아픈 사람의 태도야. 요이델이 곤란함에 시선을 피하자 율리시스는 곧장 안색을 바꿨다.
“제가 그리 싫으시다면…… 알겠습니다.”
그는 슬퍼 보이는 푸른 눈을 아픈 듯 찌푸렸다.
“콜록, 콜록.”
“성하 감기 아니잖아요.”
율리시스는 잠시 멈칫하고 미열조차 나지 않는 이마를 짚었다.
“어지럽군요.”
“…….”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몸이지만 식사조차 할 힘이 없으니 굶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
“저는 괜찮습니다. 가서 저보다 그리 중요하고 소중하고 아까우신 일부터 해결하십시오. 바쁘신 것 같은데.”
율리시스는 몇 번 콜록거리다 힐끔 시선을 들었다.
“이렇게 아파도 안 됩니까?”
“역시 안 아픈 거 맞잖아요!”
“아프다고 치고 한 번쯤은 떠먹여 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감기 걸렸을 때 한 번 해 드렸잖아요?”
“무엇이든 한 번이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니 두 번은 괜찮지 않습니까.”
그는 가여운 아기 고양이 같던 표정을 집어던지고 솔직히 불만을 토로했다.
‘시간이 없는데.’
요이델은 시계를 잠깐 확인한 후 율리시스를 바라보았다.
“알겠어요, 그럼 30분만이에요.”
요이델은 수프를 휘저어 온도를 식힌 후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침대에 기대어 가련하게 식사를 하는 율리시스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런데 율리시스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침울해 보였다. 이번엔 또 뭐가 문제야.
요이델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찰나, 율리시스가 음식을 향해 눈짓했다.
“전엔 뜨겁지 않게 입으로 불어서 식혀 주시더니, 사람이 변하셨습니다.”
“정말, 성하―!”
“언성을 높이시니 머리가 울리고 어지럽습니다.”
“……알겠어요.”
요이델은 어이없음을 꾹 참고 호호 불어서 먹여 주었다. 율리시스는 얌전하게 앉아서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흘리고 먹지? 꼭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입에 떠 넣어 주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그의 입가에 음식이 묻었다. 뱉으면서 먹나? 율리시스는 냅킨을 들다가 아픈 표정으로 툭 놓았다.
“천도 못 들 정도는 진짜 아니잖아요!”
“어떻게 이렇게나 매정해지십니까. 그전에는 원치 않아도 친절하게 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제가 당신의 안중에 없다 하여도, 다시 한번 확인받으니 힘들군요.”
율리시스는 실망한 기색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가벼운 차림에 유독 청순한 모습 탓인지 꼭 요이델 자신이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아, 아니, 잠시만요. 그건―”
“콜록.”
“좋아요! 알았어요.”
요이델은 냅킨으로 그의 입가를 톡톡 가볍게 닦아 주었다. 율리시스의 코끝에 그녀의 향기가 느껴졌다.
요이델이 목표 달성에만 집중한 사이, 율리시스는 촘촘히 깔린 그녀의 속눈썹과 피부에 닿는 손길을 보며 충분한 행복을 느꼈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숨결마저 닿는다는 걸 그녀는 알까.
온전히 제게만 집중해 주는 독점적인 관심이 사랑스럽고 좋았다. 이전에 동정은 싫다고 했지만, 이런 다정함이라면 나쁘지 않은 듯했다.
당분간 아픈 척하면서 살까.
“성하…… 앗, 깜짝이야.”
위로 고개를 든 요이델은 깜짝 놀라서 굳어 버렸다. 마주친 시선이 가깝고 그의 눈길이 짙었다. 두근두근 뛰는 그의 심장 소리가 자신에게까지 전달됐다.
“심장이 너무 건강한 거 아니에요?”
“누가 잘 챙겨 주셔서 회복된 듯합니다.”
“이제 다 드셨죠? 전 정말 가 볼게요.”
그는 대답 대신 입매에 호선을 그리며 요이델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손안에 쏙 올라간 작고 하얀 손이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그의 시선이 요이델을 훑다가 잠시 멎었다.
“어쩐지 심히 어지럽군요.”
“갑자기요?”
“네.”
율리시스는 뻔뻔하고 당당한 얼굴로 요이델의 손에 이마를 기댔다.
그는 열도 조절할 수 있나 보다.
손에 닿은 얼굴에 미미한 열 기운이 있었다. 아까는 없었던 것 같은데?
요이델이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자 율리시스는 다시 아픈 척 고개를 돌렸다.
“열이 있긴 있네요…….”
“그렇습니다.”
“정말 아프신 거예요?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셨으니까 아픈 곳이 있으면 바로 말해 주셔야 해요.”
조금 황당했지만 그래도 이제 실감이 났다. 다행이다. 성하가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깨어나지 않으실까 봐 무서웠어요.”
“당신이 구해 주신 몸이니 안 깨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기력이 없어서, 회복할 힘이 조금 필요할 듯합니다.”
“회복이라면…… 아!”
순간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요이델이 말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율리시스가 페어링으로 힘을 나눠 받길 원한다는 걸.
‘아무리 생각해도 아픈 척 같은데, 정말 조금은 아프신가?’
하긴 자신을 막아 주다가 다쳤으니까.
요이델은 그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자신을 여러 번 도와준 그였으니까,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다.
……조금 떨리지만.
“그럼 잠깐만이에요.”
요이델은 율리시스의 고개를 돌려 뺨에 살짝 뽀뽀했다.
“……?”
“왜, 왜요?”
율리시스의 얼굴에 당혹과 의문이 피어났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당황했다.
아니, 설마. 이게 아닌가? 의문을 눈치챈 요이델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였다.
“……소, 손잡는 거 말하는 거였어요?!”
말도 안 돼! 요이델은 당장 쥐구멍에 숨어 버리고 싶었다.
“제가…… 변태였나 봐요…….”
차라리 울까? 당연히 손이었겠지, 왜 그쪽이 당연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어떡해!
율리시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본인의 손에 묻었다.
“이, 이이, 잊어 주세요. 아셨죠? 지금 이건 잊는 거예요. 저는 진짜 창피해서 미, 미칠 것 같단 말이에요……! 제발요.”
염소처럼 떠는 요이델이 몸을 돌린 순간, 그가 요이델을 붙잡았다.
“당신이 원하시면 불가능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새파란 눈동자가 마치 푸른 불꽃 같았다. 그는 형형한 눈빛과 달리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요이델을 올려다봤다. 사람을 홀릴 듯한 분위기였다.
“어차피 저는 당신의 것인데.”
낮은 목소리가 요이델의 귓가에 속삭였다. 간질간질한 부드러운 목소리에 요이델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걸 이제 모두가 알고.”
율리시스는 요이델의 뺨을 제 손으로 살짝 감쌌다.
그의 따뜻한 품이 가까이 있었다.
요이델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 숨을 죽였다. 자신의 손보다 훨씬 큰 손은 힘이 들어간 탓인지 뼈마디가 도드라지고 온기가 따스했다.
떨림과 설렘이라는 묘한 기분에 요이델도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의 심장박동 만큼이나 빠르고 기쁘게.
내 심장이 왜 이럴까? 그의 눈빛을 바라보다 느낀 찌릿한 심장의 통증에 천천히 숨을 쉬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생각이 얼기설기 얽혔다. 자신의 뺨을 감싼 그의 손을 향해 시선을 옮기자 율리시스의 고개가 미약하게 틀어졌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요이델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역시 손보다 이쪽이 확실히 기운을 주실 수 있는 듯합니다.”
그의 입술이 요이델에게 포개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