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32)
32화
“하, 뭐 하나 잘하는 게 없구나.”
겨우 깨달았다. 여긴 꿈속이구나.
포악한 공작 부부는 자신을 쉴 새 없이 힐난했다. 시엔델이 죽고 나서는 더했다.
“안 되겠군. 오늘 저녁 식사는 없어. 거기서 네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쿵!
창문 하나 없고 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는 무섭고 깜깜한 공간. 요이델은 문을 쿵쿵 두드리며 애원했다.
“열어 주세요! 무서워요, 엄마 아빠. 다, 다시 할게요. 더 열심히 공부할게요, 저도 시엔델처럼…….”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한파가 몰아친 어느 겨울날에는 고열로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다.
사용인들은 그런 자신을 도우려 했으나 공작 부부의 명으로 손끝 하나 댈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이델을 돌봐 줬던 단 한 명.
몰래 약을 챙겨 주고 밥을 먹여 주고 씻겨 주었던 유모가 있었으나,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때부터 깨달았다. 버둥거릴수록 그나마 있던 자기편도 사라진다는 걸.
그래서 요이델은 얌전히 있었고, 춥고 좁은 방에서 천둥과 번개를 보며 훌쩍였다. 그런 날들이 꿈에서 몇 번이고 반복됐다.
그리고 13살 생일이 지난 어느 날.
“너는 곧 성국으로 가게 될 거다. 거기서 시엔델 몫을 대신해서 살 거라.”
“시, 싫어요! 전 시엔델로 살 수 없어요.”
“못 하겠다는 거냐? 누구 때문에 시엔델을 잃었는데! 너만 아니었어도…… 아니, 시엔델이 아니라 네가……!”
나는 시엔델이 아니란 말이에요.
악몽인 걸 알지만 과거의 기억으로 끌려 들어간 것처럼 긴 꿈이 끝나지 않았다.
누가 좀 도와줘, 무서워. 제발 여기서…… 나는 다른 사람으로 살기 싫어요.
“엄마, 아빠……!”
“누가.”
그때 따뜻한 손길이 부드럽게 요이델의 눈을 덮어 주었다.
흘러들어오는 치유 마법의 기운.
손이 걷히며 흐릿한 시야 사이로 푸르게 빛나는 창공이 보였다. 그건 사람의 눈동자였다.
아주 맑고 파랗고 강인한.
“누가 당신의 한심한 부모라는 겁니까.”
은빛 실타래가 요이델의 볼을 간질였다. 타인의 낮은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그 비루먹은 작자들을 제게 붙이시는 건 아니실 거고.”
“이번엔 성하의 꿈이구나. 하지만 성하 꿈도 꾸기 싫은데. 무섭단 말이야…….”
그 말에 푸른 눈이 갑자기 가늘어졌다. 가늘어져?
딱!
그때 이마에 뭔가가 딱, 하고 짜릿하게 부딪혔다.
“아얏!”
쏜살같이 일어난 요이델은 벽에 철썩 달라붙었다. 맙소사, 진짜잖아?
“서, 성하께서 왜, 왜왜 제 방에 계세요?”
“요이델 님이 아주 싫어하실 것 같아서 남의 방에 함부로 와 봤습니다.”
그 말에 요이델의 피가 차차 식어 갔다.
미쳤나 봐, 뭐라고 말했지? 꿈에서도 보기 싫다고 말한 것 같은데.
요이델은 딱밤으로 얼얼해진 이마를 가리고 더 들어갈 곳도 없는 벽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악몽을 꾸시길래 염려했는데, 정신이 지나치게 제대로 드셨습니다.”
율리시스는 가볍게 손을 털어 내며 시선을 흘겼다.
역시 제대로 들었구나. 요이델은 자신의 입술을 말아 물며 자책했다.
“죄, 죄송해요.”
“꾸웅!”
그때 율리시스의 품이 크게 들썩이더니 뭔가가 퐁! 튀어나왔다.
“플로?”
그건 짧고 통통한 팔다리를 가진 은백색의 신수였다.
요이델이 이름을 부르자 플로테스는 눈을 반짝 빛내며 아장아장 걸어와 그녀의 품에 폭 안겼다.
“그 알덩이가 당신의 방에 가야 한다고 보채더군요. 제법 쓸 만하지 않습니까. 제 주인을 위해 상관의 잠까지 깨우고.”
“꾸우우웅.”
플로테스는 내가 악몽을 꾼 걸 알아줬구나. 아니, 그보다 잠시만.
내 손에 반지가 있었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변장시켜 주는 반지, 그게 없으면 들키고 말아!
“아, 휴우.”
다행히 반지는 제대로 손가락에 붙어 있었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네.
율리시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수상한 모양새를 지켜보았다.
“그 반지 말입니다.”
“유품이에요!”
“사연을 묻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렇군요. 퍽 소중하시겠습니다.”
왜 그렇게 펄쩍 뛰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제 발이 시큰할 정도로 저린 요이델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당황하지 않은 척했다.
하지만 율리시스의 눈에 요이델의 떨림이 포착되지 않을 리 없었다.
‘반지에 유독 과하게 반응하는군.’
“꾸웅―”
그때 플로테스가 부러 소리를 크게 내며 율리시스의 시야를 흐트러뜨렸다.
“안 돼, 플로. 성하의 얼굴을 함부로 만지면 못써.”
“꿍.”
“나쁜 꿈 꾼 걸 어떻게 알았어, 플로? 우리 플로는 대단하네.”
“꿍!”
“고마워. 덕분에 정말 든든해.”
율리시스는 훈훈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떨떠름하게 지켜보았다. 괘씸한 한편, 제법 쓸 만한 짐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햇병아리 신관의 곤란은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게 대부분이었으니까. 요보힐데 공작가는 더욱 그랬다.
‘제국이 잠잠해서 더욱 수상하군. 잠잠히 있을 이들이 아닐 텐데.’
예지 능력을 다시 발휘해 보라고 요구해야 하나.
어쨌든 지금은 적기가 아니었다. 저 창밖에 뜬 샛별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으니까. 동이 튼다. 곧 다른 이들도 깨어날 시간이었다.
“한낱 짐승에게 이용당한 기분이군요.”
율리시스가 피로함에 잠시 얼굴을 쓸던 그때, 어떤 온기가 가슴팍에 와 닿았다.
요이델이 율리시스의 나이트가운을 쥔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 그게 옷이 너무 그래서 조금.”
“……미치셨습니까?”
“그, 그게 아니라요, 성하. 제 과거가 있긴 하지만 이건 정말, 음, 성하의 옷, 옷자락이 자꾸 벌어져서 어쩔 수 없었단 말이에요!”
벌어진 가운 사이로 자꾸 살결이 보여서 여며 주었을 뿐이다.
세 친구를 걸고 맹세하건대, 절대로 성하의 살을 만지려던 게 아니었다.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절대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하지만 살에 바람이 들어가면 감기에 걸린단 말이야. 요이델은 정말 결백하고 억울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 눈을 살짝 뜨고 봤더니, 요이델의 손이 닿은 부분만 두드러기라도 난 듯 빨갛게 부어올랐다.
“……성하?”
그의 몸에서 손을 떼자 두드러기가 가라앉았다.
“혹시 접촉을 싫어하시는 게 아니라, 피부가 예민해서 꺼리시는 거예요?”
율리시스는 허를 찔린 표정으로 불쾌한 듯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아닙니다.”
“하지만 성하께서 가끔은 그냥 손을 대셨는데…… 그런데 본인이 만져지는 건 왜 두드러기가…….”
만지는 건 되면서, 만져지면 두드러기가 난다니. 주관이 뚜렷한 몸이다. 팔은 괜찮고 몸은 안 되는 건가?
요이델은 눈을 빛내고 메모지를 들었다.
“혹시, 또 다른 불편한 부분도 있으세요? 뾰족한 게 무섭다든가, 높은 곳이 싫다든가 하는 거요.”
“제 약점을 캐물으시려는 겁니까.”
“네.”
요이델은 순순히 끄덕거렸다.
“제 빈틈을 알아서 어쩌실 셈입니까. 약점으로 쥐어 저와 저래라도 하고 싶으십니까.”
“네?”
“설사 그대가 제 약점을 발설한다 한들 그 누가 믿어 주겠습니까.”
잠시 당황하던 요이델은 멍하게 입을 벙긋거렸다.
“……제 눈앞에 계신 성하께서요.”
“…….”
“성하께서는 허무맹랑할 수 있던 게르암의 이야기도 일단 수용해 주셨어요. 신수의 알이 움직였다는 말도요. 성하께서는 전부 믿어 주신걸요?”
요이델은 당혹으로 굳은 율리시스를 보며 방긋 웃었다.
“그렇죠?”
“하…….”
“오해하게 해서 죄송하지만, 그런 날카로운 말을 들으면 저도 속상해져요. 다른 취약점을 여쭌 건…… 제가 지금처럼 또 실수할까 봐서예요.”
요이델은 우물쭈물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똑바로 전달했다.
“그래야 성하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실수로라도 하지 않죠. 주의하고 싶었어요.”
조막만 하게 줄어드는 목소리에 율리시스는 반쯤은 어이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이젠 제법 제 눈을 똑바로 보고 말씀하시는군요. 그 전처럼 떨지도 않으시고.”
“정말요?”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달빛 속에서도 또렷이 보이는 파란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저, 눈싸움도 잘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요이델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점점 바다처럼 윤슬이 반짝이고 한낮의 하늘보다 맑은 파란 눈을 보며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감탄했다.
“우와…….”
“…….”
상대의 얼굴이 잘 들여다보인 건 율리시스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천진난만하게 놀라는 요이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요이델은 둘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꺅!”
요이델은 깜짝 놀라서 후다닥 떨어졌다.
“아하하…….”
율리시스는 어색하게 웃는 요이델을 보고 피식 웃었다.
“눈싸움에는 제가 이긴 듯합니다.”
“그, 그러게요.”
깜짝 놀라서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율리시스는 파닥거리는 햇병아리를 보고 아까의 상황을 떠올렸다.
신수를 따라 이곳에 왔을 때는 이미 끙끙 앓는 신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이런 일이라면 지금 같은 악몽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천둥 번개를 보고 본능적인 두려움이 들었으니, 아마 평소에도 그랬겠지. 꿈속에서는 나쁜 날씨와 호통 소리, 매질이 꼭 같이 등장했다.
“아마도요.”
요이델의 대답에 율리시스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언가 가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알겠습니다.”
━━━━⊱⋆⊰━━━━
휘스테론이 싱글벙글 웃으며 요이델에게 다가왔다.
“델, 우리 이제 옆방 이웃이야.”
“아래층이다.”
“시끄러워, 라이오스. 어쨌든 델, 너무 좋다. 그치?”
율리시스는 곧장 두 호위기사의 거처를 요이델이 사는 곳으로 옮겨 주었다.
저번처럼 악몽에 시달려 업무 효율이 떨어지면 곤란하다는 이유였다.
“정말 둘도 여기서 사는 거야?”
“그렇다니까! 성하께서 델을 더 열심히 지키래. 이제 24시간 보호할 수 있어. 반갑다, 델.”
“잘 부탁드립니다, 신관님.”
이제 로사리움에 요이델 외의 사람이 둘이나 생긴 거다.
라이오스와 휘스테론은 기사니까 시중을 들 필요도 없어서 방에 들어올 일도 없고, 층은 다르니까 가끔씩 응접실에 만나 적당히 얘기를 즐길 수도 있다.
‘너무 좋아.’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요이델의 작은 심장이 두근두근 설렜다.
“그런데 델, 오늘은 마르셀리나 할멈의 수업을 듣는다니. 머리 엄청 돌려야겠다.”
휘스테론의 얼굴이 어딘지 안 좋았다.
“마르셀리나 님이 왜?”
“기준이 엄청 깐깐하거든. 하일 할아범보다 더해. 아마…… 우리 델, 울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