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35)
35화
요이델의 말뜻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정체가 모호하던 오르비스 상단 측에서 자신들도 후보군으로 올려 달라는 청을 해 왔다.
‘미켈레와 오르비스의 주인이 동일인이라.’
처음 그가 알현을 청했을 때는 천장화의 일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미켈레 사야, 오르비스 상단의 주인으로서 성하께 인사올립니다.”
“오랜만이군요.”
“천장화를 시작할 때 한번 찾아뵌 적 있는데, 기억해 주신다니 영광입니다.”
하긴 성황께서 사람들을 일일이 기억할 리가 없다. 그날은 사람도 많았으니까. 미켈레는 설명을 덧붙이고 빙긋 웃었다.
그러나 율리시스는 그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전에 그대가 신전에 있었을 시기를 말하는 겁니다, 미켈레 경.”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미켈레는 진심으로 놀랐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신전에 지냈던 이들도 미켈레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수만, 수십 만의 신관을 봤을 성황께서 자신을 기억해 주시다니.
“제가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어 성하께 깊은 인상을 남겨 드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만은 아닙니다. 그대는 예전부터 그림에 능숙했으니.”
미켈레는 그의 기억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런 것까지 기억해 주실 줄이야.
“하지만 상단주로서의 재능은 뜻밖이었습니다.”
“하하…… 저희 가문에서 반대를 하여 숨기고 있는지라. 먼저 찾아뵙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미켈레는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간의 이야기와 어떻게 요이델에게 들켰는지, 어떤 거래를 했는지에 대해 모두 고했다.
결국 게르암과 연이 있던 상단을 자른 자리에는 오르비스 상단이 들어오게 되었다. 율리시스로서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사야 가문이라면 신원도 확실하다.’
이전의 일이 되풀이될 가능성은 현저히 적다는 얘기였다.
비록 상단주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여 대리인을 세워 놓아야 하겠지만.
어쨌든 미켈레의 입장에서도 나쁜 거래가 아니었다.
사야 가문 구성원들이 성국을 위하는 마음은 그도 잘 알고 있다.
이로써 미켈레가 나중에 부모에게 자신이 상단주임을 털어놓아도, 성국을 위한 유통을 맡기도 했으니 지탄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미켈레는 자리를 떠나기 전 율리시스를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요이델 신관은 제 어린 시절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영민하고 다정했습니다.’
그런 말을 남기고서.
이번 일은 율리시스로서도 예상지 못한 성과였다.
설마 그 까다로운 오르비스 상단주와 거래를 할 줄이야.
‘무엇을 거래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남은 1년이 기대되는군.’
율리시스가 맨 처음 요이델에게 내 건 기한은 1년이었다.
그 안에 자신의 신뢰를 살 것.
그의 사적인 평가와는 별개로 요이델은 놀라운 발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룬 것들로만 치면 직위를 더 올려 준다고 해도 반대할 이가 없을 정도로 썩 훌륭하다.
똑똑.
“성하, 요이델 신관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조심조심 열리고 분홍색 머리카락이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왜 죄지은 사람처럼 오시는 겁니까?”
“성하께서 갑자기 부르시면 무서워서요.”
“진짜 저를 두려워하신다면 그런 대답도 하지 못하셔야 맞습니다.”
“앗, 그, 그런가요?”
어색하게 웃던 요이델은 잠시 율리시스를 바라보다가 집무실 끄트머리에 섰다.
몸만 돌리면 금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전거리라 이건가.’
율리시스는 요이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더 가까이 오십시오.”
“앗, 네!”
“더 오십시오.”
“……이만큼요?”
“더.”
율리시스의 표정이 슬슬 싸늘해지자 요이델은 후다닥 다가가 앞에 섰다.
“오늘은 당신께 중한 임무를 맡기려 합니다.”
“네?”
“대원로의 음험한 추적을 떨쳐 드렸으니 저도 마땅한 보답을 받아야 맞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는 요이델도 동의했다. 덕분에 마르셀리나의 집착 증세가 훨씬 줄어들었으니까.
“거기 앉으십시오.”
율리시스는 요이델에게 소파를 내주었다.
‘마법이 걸린 소파일까? 성하께서 왜 푹신한 소파를 내어 주시는 거지?’
율리시스의 표정이 퉁명스러워서 일단 요이델은 시키는 대로 했다.
지금 요이델이 조마조마한 이유는 하나였다.
‘미켈레 씨와의 일이 잘못됐나?’
성하와 미켈레 씨의 자리를 자신이 알선하고 난 뒤였으니, 뭔가가 잘못됐을까 봐 걱정됐다.
율리시스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요이델은 율리시스의 눈짓 하나에 화들짝 놀랐다.
‘쭈그려 앉아야 할까?’
율리시스의 날카로운 눈매에 요이델은 어깨를 둥글게 말았다. 그러자 율리시스의 표정이 더욱 험상궂어졌다.
‘이, 이게 아닌가?’
요이델은 다시 어깨를 들고 주먹 쥔 두 손을 무릎 위에 놓고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그러자 율리시스의 표정이 나아졌다.
그의 걸음이 성큼성큼 다가와 요이델의 지척에 섰다.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요이델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꽁꽁 얼어붙어 덜그럭거리는 고개를 기름칠도 못 한 양철나무꾼처럼 터덕거리며 돌렸다.
‘그동안 너무 편하게 생각했다고 화가 났나?’
요이델은 율리시스를 바라보고 어색하게 헤헤 웃었다.
“어깨를 내리십시오.”
요이델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지만 곧장 승모근까지 힘이 들어간 어깨를 내렸다.
“펜을 쥐시고.”
“페, 펜이요? 네, 쥐었어요.”
“그럼 이걸.”
쿵.
율리시스는 자신이 처리하고 남은 잔업 서류를 요이델의 앞에 내려놓았다.
“잘 처리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네?”
“어려운 일들은 아닐 겁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했고 남은 업무일 뿐이니.”
요이델은 어안이 벙벙해서 율리시스를 바라보았다.
“제가 쉬는 동안 요이델 님께서 처리해 주시면 됩니다.”
“……네?”
요이델은 잘못 들었다는 듯 토끼눈을 뜨고 계속 되물었다.
“……예?”
“네.”
“……어어?”
당황스러운 물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 성하가 뭐라고 한 거지?
“이건 제 일이 아니에요.”
“압니다.”
“아시면요?”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게 아니라. 제가 왜, 아니, 어, 어떻게 성하의 업무를 해요?”
그러거나 말거나, 율리시스는 피곤해진 눈꺼풀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모든 게 피곤했다.
율리시스는 지금껏 제대로 쉬어 본 적도, 남에게 자신의 자잘한 일을 시켜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 햇병아리는 잘 배우게 하면 쓸 만할 것도 같았다.
“다섯 시가 되거든 깨워 주십시오.”
“너무하세요, 성하. 미켈레 씨와의 일이 잘 안 됐나요?”
그래서 이런 과한 일을 시키는 건가.
요이델이 염소처럼 부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제 자리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율리시스가 피식 웃었다.
“상단주는 당신을 칭찬하더군요.”
“미켈레 씨가요?”
목소리가 금방 들떴다.
‘하여튼 단순하군.’
그 변화가 너무 극명했다.
자신을 보고는 죽을 듯한 목소리를 내더니, 타인에게 칭찬받았다고 금세 기뻐한다.
“아주 영민하다고 감탄하더군요. 그리고 요이델 님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부 말했습니다.”
“미켈레 씨도 정말 좋은 분이세요.”
“그런 듯합니다. 햇병아리 신관을 철석같이 믿고 정체를 드러내려던 걸 보면.”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하지만 불쾌함을 눈치 못 챈 요이델은 밝게 웃었다.
“천장화는 언제 완성될까요? 분명 예쁠 거예요.”
“아마도 겨울이 지나고 완성될 겁니다.”
“지금이 가을이니까 계절이 하나 더 지나야겠네요.”
율리시스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요이델은 역시 ‘성하는 나쁜 사람 중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야.’ 하는 말을 다시 한번 속으로 되뇌고 잔업을 시작했다.
“그전에 문지기가 문을 두드리거든 차후에 전달하라고 해 주십시오. 피곤해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집무실 앞의 근위기사가 문을 두드렸다.
과연 햇병아리가 할 수 있을까.
그가 알기로 웬만한 부탁도 거절 못 하는 인간인데.
그가 요이델을 굳이 집은 이유는, 아침에 움직이는 성실성을 봤기 때문이다.
‘금방 하다 말 줄 알았더니 끈기도 있고.’
대신전의 아침은 원래도 일찍 시작된다.
그중에서도 율리시스는 조금 더 하루를 일찍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요이델이 있었다.
저 햇병아리 신관은 부지런히 대신전을 청소했다. 누가 보면 시종으로 고용된 줄 알 정도로.
똑똑.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린 누군가의 등장에 요이델이 한참을 주저하는 게 느껴졌다.
율리시스는 일부러 뒤척이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인간은.
“성하께서는 신수님과 관련된 중요 사안으로 저와 의견을 나누고 계십니다. 차후에 다시 언질을 주세요.”
역시 의외라서 흥미롭군.
율리시스는 입꼬리에 호선을 그리며 안온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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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율리시스는 대신전의 결계를 점검했다.
이전에 느꼈던 의아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상은 없군.’
성국의 결계는 몇 겹으로 둘러쳐져 거대한 반원형을 이뤘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그의 마법과 성국의 기둥이 되는 신성 마법석에 거대한 힘을 담아 유지하는 결계였다.
그러나 걸리는 점이 있었다.
‘일전에 요이델 신관의 모습이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던 적이 있었다.’
그의 눈이 그 정도의 피로를 느꼈던가 생각해 보면, 그만큼은 아니었다.
그런데 율리시스는 분명 요이델을 여자로 착각했다.
‘마법이 있다면 감지하지 못할 리 없고.’
요이델이 특별히 지니고 다니는 아티팩트도 없었다.
장신구 정도야 있었지만, 기껏해야 반지가 전부였다.
‘……반지.’
하지만 어떤 특수 마법이 걸려 있다면 그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그래도 어딘지 석연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