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54)
54화
“하일 님은 언제까지 놀고먹으며 의탁하실 셈이오? 남의 작업터에서.”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흑발의 남자가 차분히 차를 따르며 물었다.
“풀떼기 식단 맛도 없구먼. 주기적으로 농땡이를 부리는 어떤 불량 신관보다는 낫지, 흥.”
하일은 툴툴거리며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아아아악! 흐브브 퉤, 내 혀, 혀가 까진다!”
“뜨거운 차를 단번에 마시는 멍청이가 어디 있소.”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나쁜 늙은이 같으니. 내가 지오르베니 자네보단 나아!”
하일은 대륙에 있는 신전들을 돌며 정찰을 끝낸 후, 한 왕국에 위치한 동료 원로의 별채에 와 있었다.
“이번엔 지오르베니 자네도 같이 가는 거지? 참나, 아무리 약초가 좋다 해도 대륙을 떠돌며 도감을 만드는 괴짜가 어디 있는지.”
대답 없이 웃자, 하일은 성을 내며 다리를 꼬았다.
덥수룩한 모습의 지오르베니는 3대 원로 중 마지막 한 명으로, 다른 둘과는 오랜 친우 사이였다.
하일은 아예 응접실 소파에 제집처럼 누웠다.
그리고 집안을 식물로 도배한 지오르베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가만히 보면 가장 한량이야. 우리 원로 중에 제일 일을 열심히 하는 듯하면서도 안 해. 자네는 말이 출장이지, 매년 갖는 합법적 휴식 아닌가.”
하일은 지상 대륙의 작은 소왕국에 위치한 지오르베니의 별장에 와 있었다.
천혜의 자원이 풍부한 이곳은 지오르베니의 주 분야인 약초 연구에 최적인 환경이었다.
그러니 휴식하기에 적합한 환경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하일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하아아아―”
“왜 그러시오? 갑작스럽게 방문한 이유도 말하지 않더니.”
“누가 알아줄까. 이 몸의 충심을.”
“성하께서 반려도 맞으셨겠다, 우리 원로에겐 나쁠 것이 없지 않소.”
“그게 문제네.”
“문제라니, 왜?”
“아니, 아니오.”
지오르베니의 물음에 하일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요이델을 생각하면 여러 감정이 떠올랐다. 귀여운 애제자다. 인정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솔직히 아기님 이름 후보 다이어리를 보며 쓴맛을 곱씹는 면도 있었다.
지오르베니가 은근히 물었다.
“반려가 누구인지 찾으셨소?”
“어떤 분이 반려이신지는 성하의 입으로만 나올 말이지 일개 원로인 내가 논할 게 아닐세.”
목소리가 단호했다.
아무리 요이델의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들, 비밀을 흘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기야 하일 님의 말이 맞소.”
“그보다 그 더러운 수염이나 어떻게 해 보게. 자네는 덥지도 않은가?”
“하일 님이 나이를 먹어도 정정한 모습으로 잔소리를 해서 새싹 신관들의 기피 대상 1순위인 것과 같은 맥락이오.”
“내가 언제 그랬다고 참, 농담도 잘해.”
하일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도 자신에게 어떤 소문이 붙는지쯤이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군. 자네, 약재 도감은 챙겼나? 자네는 연구를 위해 특별히 외출을 허락하신 거니, 잘해야 하네!”
그는 미소 짓는 지오르베니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 곰탱이 같은 모습도 어떻게 좀 하고!”
“허허. 알겠소.”
지오르베니는 하일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선물로 준 조명등을 두드렸다.
“그런데 크리온 광물의 쓰임새는 어떻게 알게 된 것이오? 신기해서 그러오.”
“아아, 신수를 관리하는 한 신관의 의견이었지. 아주 쓸 만한 신관일세.”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오. 뛰어난 학자 가문 출신인 거요?”
“브리칼트 제국의 기적이지. 그 똥멍청이들에게서 난 인재라고나 할까.”
지오르베니는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브리칼트 출신의 신관이라.”
━━━━⊱⋆⊰━━━━
“마르셀리나 님! 지난번에 반지는 정말 감사했어요.”
“어머나, 이런 답례는 안 줘도 괜찮은데.”
말과 다르게 마르셀리나는 쿠키 꾸러미를 덥석 받아 챙겼다.
“내가 달달한 거에 약한 건 어떻게 알고, 아유 참. 이러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차랑 먹을까요? 우유랑 먹을까요?”
“따뜻한 홍차로 부탁드릴게요!”
마르셀리나는 한가득 쌓인 책을 발로 대충 밀어 치우고 티 테이블을 차렸다.
그녀의 칠판에는 반지를 연구한 흔적이 가득했다.
“내가 해낸 게 아니라서 받아도 될지 모르겠어요, 요이델 군. 아, 조심하는 차원에서 군이라고 부르겠어요.”
갑자기 변장이 풀렸던 건 선물 더미 사이에 있던 상자에서 나온 강력한 어떤 힘 때문이었다. 그러나 브리칼트의 마법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이번 일로 코엘은 함부로 확인도 않고 위협적인 상자를 전달한 죄로 일주일의 근신을 받았다.
그걸로 인해 요이델이 아팠다고 전달받은 코엘은 훌쩍이며 사과했다.
“그 반지는 성분이 특이하더군요. 브리칼트의 돌도 성국의 광물도 아니랍니다. 요이델 군, 누가 준 반지인지 기억이 나나요?”
“부모님이셨어요.”
아마도.
확실하진 않지만 여기 올 때부터 끼고 있던 거라면 다른 사람이 줬을 리가 없다.
“요이델 군의 부모님이라면 브리칼트의 요보힐데 공작 부부?”
요이델은 일부러 그 이름을 숨기지 않았다. 아는 게 있다면 듣기 위해서.
예상대로 요보힐데 공작 내외의 이름을 들은 마르셀리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괜찮아요, 마르셀리나 님.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부모님께서는 항상 남자로서 살라고 하셨는걸요.”
“아아, 요이델.”
와락.
마르셀리나의 품에 요이델이 폭 들어가 안겼다.
“혹시라도 가문의 힘이 필요하면 말해요. 내가 얼마든지 양녀로 들여 줄 수 있어요.”
“네?”
“요이델 군이 성년이기는 해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훨씬 많을 거예요. 예를 들면 부모라거나.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꼭 내게 말해 줘요.”
마르셀리나는 요이델을 마구 쓰다듬으며 바라보았다.
“성국의 성직자는 결혼도, 아이를 호적에 들이는 것도 모두 가능하니까요. 알고 있죠?”
“그렇지만―”
함부로 얘기하기엔 너무 중대한 사항이었다.
“정말이에요, 요이델.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성국에서는 꽤 괜찮은 가문이랍니다.”
그건 요이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니다. 마르셀리나의 가문은 대대로 학자를 배출한 명망 높은 가문이었으니까.
보통의 나라로 치면 공작가에 준했다.
“말씀만으로도 힘이 막 솟아나요.”
“말만이 아니랍니다. 언제든 환영이니 공적인 힘이 필요하거나 누가 괴롭힌다면!”
마르셀리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꼭 말해요. 알았죠?”
“말씀드리면 어떻게 되나요?”
마르셀리나의 웃음이 문득 섬뜩하게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생물과 금술 마법엔 살아 있는 실험체가 종종 필요하답니다. 호호호! 어머, 나도 참. 이런 농담을 하다니!”
요이델은 삐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그거, 농담이 아니다.
절대 그녀와 척을 지지 말아야지.
마음속으로 깊이 새겼다.
━━━━⊱⋆⊰━━━━
손수건을 주고 난 후에도 율리시스의 눈길은 어딘지 이상했다.
그때도 이상하게 봤지만 여전히 이상하다. 그래도 손수건을 주고 난 직후에는 뭔지 모를 화가 누그러진 게 아닐까 싶었는데…….
“저, 손수건이 문제였나요?”
“뭐가 말입니까.”
“성하께서 요즘 저를…… 노려보셔서요.”
“특별히 다정하게 본 적도 없지 않습니까.”
“……알고 계시네요?”
알면서도 저런 시선으로 봤다는 거지. 요이델은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역시 휴가를 받아 놓고 축제에 참가하지 않아서 그런가?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야. 요이델은 얼른 사회생활 머리를 돌렸다.
아, 그것 때문이구나!
“성하의 멋진 모습을 뵐 수 없어서 너무 아쉬웠어요!”
이게 아닌가?
그는 떨떠름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율리시스는 그 여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강렬한 폭죽이 터져 빛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없는 의료신관. 말도 안 되는 의구심이 드는 건 이 햇병아리가 유난히 어디서든 눈에 걸려서 그런 것인가.
“아닙니다. 그저 당신과 닮은 누군가가 떠올라서.”
뜨끔 놀란 요이델은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아! 저희 부모님이요? 낳아 주셨으니까 당연히 닮지 않았을까요?”
그쪽은 전혀 안 닮았다.
언뜻 본 눈동자는 주홍색에서 붉은색, 갈색 혹은 흑색으로 추정됐다.
그림자를 감안한 추정이었다.
드러난 하얀 목과 손은 그의 기억 속에 똑똑히 존재했다. 그런 피부를 어디서 본 적이 있다는 것도.
멀리서 일에 집중한 요이델의 얼굴을 살며시 손으로 가려 보았다.
‘역시 닮았다.’
하지만 그 여자에게선 인위적인 변형 마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 준하는 능력을 지닌 자는 원로들, 혹은 미숙하지만 요이델.
율리시스는 저와 눈이 마주치면 바삐 시선을 내리는 작은 신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상하군.’
괸 턱을 몇 번이고 고쳤다.
‘두 성기사에게서 올라온 보고서.’
일전에 명령을 내렸었다. 보고를 받은 게 오늘.
형제 관계는 없고 친척 관계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은 없었다.
당연히 여자 형제도 없을 터인데 그 여자와 닮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일말의 연관도 없는 타인이거나 혹은…….’
본인이거나.
그의 눈이 집요한 빛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