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88)
88화
아슈레오는 서재 안에서 왔다 갔다 분주히 움직였다.
“정말로 내가 될지 모르겠어.”
“할 수 있어요! 아슈레오 씨!”
“응원은 고맙지만 다음은 투표인걸.”
그 말에 요이델의 힘찬 파이팅이 멎었다. 아직 아슈레오 씨는 책임감 없이 일을 때려치우고 나간 사람으로 낙인찍혀 있긴 하지.
요이델은 차마 직접 물을 수 없었다.
과거에 나간 게 괴롭힘 때문이냐고 묻는 건 상처를 들쑤시는 행위니까.
“……제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요이델 씨가?”
아슈레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일단 그 벙벙한 머리부터 어떻게 해 보세요. 첫인상도 중요하니까요. 안배의 공간은 동그랗게 생겨서 엄청 무섭다고요.”
안배의 공간은 본관에 있는 거대한 홀로, 다른 말로는 재판장이라고 불렀다.
이런 특수한 선거가 있을 때에는 그곳에서 중요 안건이 결정되곤 했다.
“아슈레오 씨, 사람을 싫어하신다고 했죠. 그래서 눈도 가리고 다니신 거고요.”
“응…….”
“하지만 대신전은 계단이 많아서 굴러떨어질 수도 있어요. 발목이 다치고 멍들고, 그럼 아프잖아요?”
요이델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제가 시야가 트이게 해 드릴게요.”
“저, 정말이지?”
“이제는 사람들과 대면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슈레오 씨도 그렇게 결정하신 거니까, 응원해 드릴 거예요.”
요이델은 가위와 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사실 저는 아슈레오 씨를 이용하고 있어요.”
“으응? 나를? 내가 이용할 데가 있나?”
“저는 아슈레오 씨가 원로 자리에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아슈레오 씨가 꼭 투표에서 많은 표를 얻으시길 바라요.”
“하, 하지만 나는…….”
아슈레오는 부들거리며 요이델의 팔을 저지했다.
“괜찮아요, 아슈레오 씨는 충분히 해내실 수 있을 거예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요이델 씨.”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요이델의 가위를 바라보았다.
“잘 자를 수 있는 거…… 맞지?”
아슈레오의 걱정은 그쪽이었다. 아무리 혼자 살다 나왔어도 미적인 기준은 살아 있었던 것이다.
“걱정 마세요, 제가 이런 건 잘하거든요.”
잠시 후, 아슈레오는 요이델의 말대로 감탄하며 거울을 감상했다.
“곱게 자란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요이델 씨 솜씨가 좋구나!”
“훨씬 시야가 넓어지셨죠?”
“응!”
얼핏 거대 털 뭉치로 보일 정도였던 아슈레오는 단정하고 귀여운 인상의 작은 곰으로 변신했다.
요이델은 전생에서 돈이 부족해 스스로 머리를 다듬곤 했다. 이 잔재주가 이럴 때 쓰일 줄이야.
아슈레오는 눈을 반짝이며 계속 감탄했다.
“나 같지가 않아, 아가씨.”
“아슈레오 씨는 원래 멋지고 귀여웠어요! 갈색 눈이 특히 예뻐서, 한눈에 부친이신 르를타 주교님을 알아본걸요?”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자 아슈레오는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르를타 씨도 잘 계세요. 성하께서도 아슈레오 씨가 원로가 되시길 바라고 있으니까, 절대 위험한 일은 없을 거예요. 면회도 매일 가능하니까―”
“괜찮아. 다 알고 있어, 요이델 씨.”
아슈레오의 미소에 요이델은 안심했다가 불현듯 뭔가를 깨닫고 경악했다.
“아슈레오 씨, 그런데 왜 아까 저를 아가씨라고 부르셨어요?”
“……앗차!”
거울을 보던 아슈레오는 정처 없이 눈동자를 굴렸다.
“내가 안에서 고립되다 나와서 사람을 잘 구분하지 못해서 그렇…… 지? 이런 식으로 변명하면 안 속아 줄 거지?”
“알고 계셨어요? 언제부터요?”
“미, 미안해, 요이델 씨. 계속 말실수 안 하려고 ‘아가씨가 아니다, 아가씨라고 부르면 안 된다.’를 되뇌었는데 그만 튀어나와 버렸네.”
아슈레오는 미안한 듯 본인이 더 울먹거렸다.
“어머니의 피 덕분에 오감이 발달했어. 페로몬으로 처음부터 알았는데…… 미안해. 정말 알려고 그런 건 아, 아니야.”
“아슈레오 씨도 저의 비밀을 알아 버리셨네요.”
“정말 미안해, 요이델 씨!”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그를 더 다그칠 수도 없었다. 대신에.
“뭐, 뭔데?”
“저랑 친구 하는 거요.”
아슈레오는 입을 크게 벌리더니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그리고 곧장 튕겨 일어나서 요이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좋아! 나는 좋아, 요이델 씨!”
“저희는 친구니까, 이제 저도 아슈레오 씨를 도와도 되는 거죠?”
“응?”
요이델은 자신보다 작은 그에게 맞춰 무릎을 굽혔다.
“아슈레오 씨가 대신전을 떠났던 진짜 이유. 그걸 들려주셔야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어요.”
“…….”
“물론 진짜 이유는 말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대비가 필요해요. 대신전의 신관들은 자부심이 강해서, 한 번 나간 사람을 달가워하지 않죠. 그러니까 방법을 구상해야 돼요.”
“하지만 말하면…….”
아슈레오는 우물쭈물하고 고개 숙여 고민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친구가 있었어.”
아슈레오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하다가 결심한 듯 차츰 진지해졌다.
━━━━⊱⋆⊰━━━━
‘미켈레 씨가 아니라 본인이 파면 처리된 줄 알고 있었다니.’
아슈레오가 해 준 얘기는 공식 기록과 달랐다. 그는 대신전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본인이 파면된 줄 알았다고 얘기했다.
‘설원에서 같이 떠나지 않은 이유가 더 있었던 거야.’
아슈레오가 먼저 정식신관이 되고, 미켈레는 수련신관으로 남으면서 사야 집안의 압박을 받은 미켈레와 사이가 틀어졌다고 했다.
이후에는 수인족의 특징이 남은 외형 때문에 질 나쁜 몇의 따돌림 시작. 아슈레오보다 먼저 들어온 정식신관이라 당해 낼 힘이 없었다. 밀고했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고.
‘상황을 그렇게 몰아간 건 지오르베니였겠지. 아슈레오 씨가 동관으로 가려다가 신수를 관리하는 한직으로 방향을 바꾼 것도 그래.’
요이델의 작은 주먹이 울었다.
괴롭힘당하는 사정을 알게 된 친구가 한 짓이 뭐였는지는 아슈레오도 자세히 모른다고 했다. 확실한 건 나쁜 짓이었고, 그 뒤로 미켈레는 혼자 끙끙 앓았다고.
하지만 자신을 몰래 도와준 미켈레가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아슈레오는 모두 자신이 했다고 거짓 편지를 쓰고 대신전을 나갔다고 했다. 아슈레오가 아는 건 그게 전부였다.
그 당시에는 도와주는 이가 하나도 없는 대신전에 애증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지오르베니의 소행일 수도 있다는 걸 안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는 이미 대륙적으로 유명하니까.
‘할 수 있을 거야.’
요이델은 며칠 전 아슈레오가 해 준 이야기를 되새기며 본관 앞에 다다랐다.
중앙의 입구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뻗은 거대한 기둥들. 오늘 이곳에서 원로가 결정된다.
“우아?”
“응, 플로. 부탁한 대로 해 줄 수 있지?”
“우웅마! 웅!”
신수 상태인 플로테스는 요이델과 나온 게 좋아 방방 뛰며 웃었다.
“요이델 군! 여기예요, 이쪽으로 와요. 내 옆으로.”
“마르셀리나 자네는 상도덕도 없는가? 내가 먼저 가르쳤네. 당연히 내 제자일세!”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누구한테나 존칭을 써야 한답니다, 학습 능력 없는 하일 원로.”
마르셀리나와 하일은 요이델을 보자마자 서로 물어뜯을 듯 싸웠다.
그들도 원로 선출 찬반에 대한 투표를 위해 재판장에 자리했다.
“고마워요, 마르셀리나 님, 하일 님.”
“흐흠.”
그들은 헛기침을 하며 뿌듯해했다. 아슈레오의 허락을 받고, 이전의 사연은 모두에게 알려졌다. 그걸 도와준 게 두 원로였다.
두 사람의 입으로 퍼졌으니 아슈레오는 두 원로에게도 어느 정도 지지를 받고 있다는 뜻이 되었다.
덕분에 모의 투표에서 그렇게 반대가 우세하지는 않았지만…… 애매하다.
이렇게 되면 상황이 장기전에 돌입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이 적기였다.
르를타는 이미 나이가 많아서 빠른 사면이 필요했고, 시간을 더 끌면 아슈레오의 안타까운 사연에 대한 심적 효과가 떨어진다.
“선출을 다시 한번 미뤄야 하는지…….”
“재판장님, 아슈레오 후보에 관해 한마디만 드려도 될까요?”
요이델의 목소리에 재판장 산드로는 안타까운 눈길을 보냈다. 어차피 뒤집어엎기는 힘들 텐데.
“발언하십시오.”
퐁!
그 순간 플로테스가 모두의 앞에서 인간으로 변신했다.
“아니, 어떻게!”
“신기루인가? 환영 마법인가? 진짜 시, 신수님?”
장내가 경악과 흥분으로 술렁거렸다.
“아슈레오 님은 플로테스 신수님이 인간화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어요. 저와 주고받은 편지들이 증거입니다.”
“마, 맙소사.”
“신수들에 관한 자료를 총망라한 것도 바로 아슈레오 님이셨죠.”
플로테스가 인간화를 할 수 있는 지금이 가장 시각적 효과가 컸다.
진짜 투표를 앞두고 계획한, 일종의 쇼였다.
“저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아시다시피 신수님을 곁에서 보필하는 사람이고, 아슈레오 님은 전대 관리자셨어요. 이전에 길을 잃어 아슈레오 님을 만났을 때, 신수님들의 혼령이 이분을 지켜 주시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기도 했습니다.”
“위증은 벌을 받습니다.”
“증거는 있어요.”
엄밀히 따지자면 증거까지는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좌중이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신수의 결정, 즉 현재 성수의 보석 자리를 대체한 그 신성한 물건이 증거입니다. 아슈레오 님께서 신수님들의 비호를 받았기 때문에, 저도 쉽게 보석을 얻을 수 있었어요.”
“우웅.”
플로테스도 맞다는 듯 끄덕였다. 사람들의 얼굴이 감탄과 혼란으로 뒤덮였다.
플로테스는 겉과 속이 모두 어리긴 했지만 300년을 잠든 세월이 있었다.
본인의 주관은 이미 형성되었단 뜻이었다. 요이델을 자신의 보호자로 택했듯이.
그런 신수가 아슈레오의 공을 인정한 것이다.
중도에 머물러 있던 이들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다.
━━━━⊱⋆⊰━━━━
시간이 흘러 최종 개표 결과.
“기권표를 제외한 찬성표의 우세로 아슈레오 신관이 원로로 선출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땅, 땅, 땅.
재판장이 봉을 두드리고 투표가 종료됐다.
요이델의 든든한 지원군이 한 명 더 늘어난 순간이었다.
‘다행이야, 정말 잘됐어.’
본관에서 나오는 길.
아슈레오는 울며 고맙다고 한 뒤 르를타 주교를 보러 달려갔다.
“요이델 군!”
그때 저 멀리 있던 마르셀리나가 다가와 한껏 미소 지었다.
“요이델 군, 우리가 했던 약속 기억하나요?”
“아! 물론이죠, 마르셀리나 님. 그런데 그 약속일이 오늘이었나요?”
“일이 있어서 당겨졌답니다. 오늘 시간 괜찮은가요, 요이델 군?”
마르셀리나는 아슈레오에 대한 오해 해명에 힘을 실어 주는 대신, 자신의 종손을 한 번만 만나 달라고 했다.
조카의 아들이라니, 마르셀리나의 실제 나이에 조금 놀랐지만 일단 수락했다.
‘엄청 귀여운 아기겠지? 신관을 동경한다니,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 다행이야.’
마르셀리나의 말에 따르면 그 아이는 대신전에 관심이 많고, 성품이 나긋하니 대화가 잘 통할 거라고 했다.
‘자, 요이델 군. 아니, 요이델 양. 이왕 자유로운 외출이니까 이 마르셀리나가 맞춰 온 귀여운 옷을 입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뭔지 모를 의욕이 넘치는 그녀에 의해 깔끔하면서도 귀여운 새 옷을 선물받았다.
“오늘 마르셀리나 님은 조금 이상했어.”
요이델이 탄 마차가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자, 한 남자가 다가와 그녀를 맞이해 주었다.
“요이델 신관님?”
“아…….”
“처음 뵙겠습니다. 마르셀리나 님의 친척, 카렐로 엘파임입니다.”
그 ‘아이’라고 했잖아요?
요이델의 눈앞에 나타난 건 저녁의 어스름한 빛 속에서도 자체 발광하는 미모를 가진 다정한 얼굴의 청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