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87)
87화
겨우 진정한 아슈레오는 멋쩍음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핫, 신수님이셨군요. 실물로 처음 뵈는지라 실례를 범했습니다.”
성하는 급하게 뒤따라온 경비병들에게 그의 신원을 보증해 주었다. 아슈레오는 무려 경비병을 괴력으로 밀치고 들어왔다.
그 소란을 피웠지만, 성하는 의외로 아슈레오 씨를 크게 질책하지 않았다.
그가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큰 소리를 내는 것 아니었나? 게다가 아슈레오는 대신전에서 한 번 도망갔었다.
‘그때 성하는 마뜩잖아하시는 기색이 보였는데, 지금은 아니야.’
그래도 설원에서 한 번 봤다고 익숙해진 건가? 요이델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뷰.”
플로테스는 대형 곰 인형 같은 아슈레오를 친근하게 느끼며 팔다리를 꼼지락 움직였다.
“퓨우.”
“아슈레오라고 합니다, 신수님.”
“아퓨!”
곰 같은 그는 플로테스가 해 달라는 대로 계속 놀아 주다가 진이 쭉 빠져 뻗어 버렸다.
“아슈레오 씨, 일부러 여기까지 와 주신 거예요?”
“편지를 받고 아무래도…….”
“걱정해 주신 거예요?”
“다행이야, 요이델 씨는 잘할 줄 알았어.”
아슈레오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이렇게 나와도 괜찮나?
외부와의 접촉을 꺼리는 걸 알기에 당연히 와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의문을 눈치챈 아슈레오는 머쓱한 듯 길게 자란 앞머리를 들췄다.
“급한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편지는 늦고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와 버렸지 뭐야. 아하핫.”
말은 그렇게 하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부러 용기를 내서 와 준 거다.
역시 원로로서 적합하다.
‘학문을 좋아하고.’
“어허허, 제 생각이 틀렸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입니다. 고서까지 모두 훑어본 보람이 있군요.”
‘특별히 출중한 능력치가 있고.’
“이제 조금은 신수님들의 말을 알아듣게 됐다고 요이델 씨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했었습니다. 푸핫, 신수님들이 단순 근육통이라고 알려 주시더군요.”
‘지오르베니처럼 타락하지 않을 것. 진실되게 선량할 것.’
“그럼 저는 무사한 것을 확인했으니 돌아가겠습니다. 결례를 끼쳤습니다.”
아슈레오는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요, 아슈레오 씨.”
“으응? 내가 뭔가 잘못 말한 거야?”
하지만 자신감은 부쩍 떨어져 있다.
원로로서 적합하다고 해도 본인이 싫다면 거부할 수 없는 일. 하지만 르를타 신관은…….
―성하.
요이델은 마음속으로 말을 전했다. 하지만 율리시스도 이미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아슈레오를 살피는 그의 눈빛이 탐색하듯 고요했다.
―엘타샤의 주교 르를타 신관을 처벌할 때 많은 논의가 오갔던 것 알아요. 성하께서도 쉽게 결정하실 수 없으셨겠죠. 하지만 성하께서는 과거보다는 미래를 먼저 생각하시는 분이잖아요. 저를 살려 주신 날, 제게 그렇게 해 주셨듯이요.
말을 들은 율리시스의 눈가가 가늘게 좁혀졌다.
―아슈레오 씨의 해박함은 대신전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를 살려 주신다면 저분의 성격상 마음의 족쇄가 되겠죠.
미안하지만 가족의 연만큼 떼어 내기 어려운 건 없었다.
아슈레오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은 더욱.
원로에게 부여되는 사면의 기회는 자신이 아닌 혈연을 위해서도 쓸 수 있었다.
율리시스를 감정적으로 움직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런 것으로 사리 판단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어린 나이에 아슈레오가 집필한 수많은 서적들은 교과서로 쓰기에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르를타는 죄인이지만 수십 년간 엘타샤를 지킨 데다 지금도 그의 처벌을 감해 달라는 수많은 탄원서가 올라올 정도로 훌륭한 지도자였다.
엘타샤의 새 주교를 발탁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기존의 반발심을 누르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릴 테니까.
지오르베니와 브리칼트의 일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지금, 피로도가 상당한 상태겠지.
‘성하는 즉결 처분도, 반대로 사면도 해 줄 수 있어.’
타당한 명분이 있다면 그도 사면을 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슈레오 씨라면 지오르베니처럼 쉽게 배신하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 원로가 되려 하시겠죠. 그래야 아버지를 살릴 수 있으니까요.
율리시스는 제 팔을 잡고 단호하게 쳐다보는 둥근 눈을 내려다보았다.
이럴 때면 꼭 순한 눈이 아니라 뾰족한 짐승의 눈처럼 누구보다 영민하고 날렵해 보인다. 율리시스는 그 눈을 좋아한다.
떨리는 손을 보면 주저하는 본심이 뚜렷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아닌 척한다.
햇병아리의 용맹함 앞에서는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들어주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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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을 들은 아슈레오는 처음에는 못 하겠다고 한사코 거절했다.
하지만 성하와의 대담을 마치고 르를타를 만나고 온 이후, 그는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은 듯했다.
‘……해 볼게.’
눈동자가 반쯤 가려질 정도로 팅팅 눈이 부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 가능했다.
‘그런데 내 말투 안 이상하니, 요이델 씨? 요즘 유행 말투는 어떤 게 있어? 나 나이 든 말투야?’
자격 검증과 과거 추문에 대한 해명을 하러 갈 때까지 아슈레오는 그런 걱정을 했다.
‘신성력도 충분하다고 하니까 그건 걱정이 안 돼. 하지만 최종 투표는 어려울 거야. 아슈레오 씨는 오래전 신전을 떠났고, 호의적으로 보는 눈이 많지 않을 테니까.’
요이델은 인간화가 풀린 플로테스를 바라보았다.
놀라운 성장이었으나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적었다. 하루에 10분 정도가 최대치였다.
“플로, 박하 잎이야.”
“아므앙.”
“싫어? 그럼 카롯 열매는 어때?”
“아웅, 뭉.”
플로테스는 입맛을 다셨다.
요이델은 요즘 플로테스의 변화를 기록했다. 신수의 모습이라도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사람과는 아예 다른 구강 구조를 생각해 봤을 때 놀라운 능력이었다.
‘보통 신수가 사람의 언어를 할 때는 생각을 전달하는 방식을 쓴다던데.’
어쩌면 플로테스는 천재가 아닐까?
요이델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율리시스와 플로테스의 관계는 인간화 이후 미약하게 나아졌다.
‘그래, 플로테스. 지난번에 아팠던 플로테스를 살려 줬던 게 아슈레오 씨라고 말하면 표를 얻을 수 있어.’
아직 플로테스가 인간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공표되지 않았다.
살려 줬다는 표현은 조금 틀렸지만 선거에서는 약간의 과장이 필요한 법이다.
‘실제로 아슈레오 씨가 준 자료 때문에 플로테스를 돌보기 훨씬 수월했고. 신수의 보석을 얻은 것도 그의 덕이 컸어.’
플로테스의 안전과 보호에 힘썼던 게 아슈레오라는 사실을 밝힌다면 해 볼 만하다.
게다가 르를타가 성수의 보석을 훼손했지만, 그보다 더 강대한 보석을 채워 넣을 수 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아슈레오의 공로가 컸다.
“델, 무슨 생각해?”
“응? 아, 아냐, 아무것도. 그런데 둘은 무슨 생각 했어?”
“우리? 우리가 뭐? 우리 뭐 했지?”
휘스테론은 라이오스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로사리움에 머무는 셋은 똑같이 멍한 상태였다.
요이델은 아슈레오를 원로로 만들기 위해서, 둘은 요이델의 ‘힘’을 채취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요이델의 능력을 얻어 낼 수 있을까.’
휘스테론은 자신의 의구심에 대해 절반의 확신을 가졌으나 절반은 모호했다. 시기가 맞지 않는다. 클레멘타인 요보힐데는 당시 이미 임신 중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유모는 진짜 어디 간 거지.’
휘스테론과 라이오스는 그 평범한 여자가 악명 높은 공작가를 피해 도주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사한바 요보힐데 공작가는 마법을 쓸 줄 아는 이를 사용인으로 들이지 않는다고 했다.
‘뻔하지 뭐. 힘이 있으면 마음대로 윽박지르거나 짓밟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 공작가도 찾지 못할 만한 곳이 하나, 딱 한 곳 있긴 했다.
자신들의 고향, 메디아.
그러나 시기상 대륙을 폐쇄한 이후였다. 평범한 여자가 출입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번에 같이 말해 놔야지.’
성과도 없는 놈들이 무슨 부탁만 많이 하냐며 갈궈 댈 게 뻔했지만, 중요한 단서다.
“델, 있잖아…….”
“응?”
“히, 힘 좀, 아니다. 미안.”
아무리 낯짝 두꺼운 휘스테론이라도 갑자기 힘 좀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이상한 부탁이 어디 있나?
“야, 라이오스. 넌 돌이야?”
“신관님께 그런 이상한 말을 할 수 없다. 네가 하도록.”
“지만 멋진 척하네.”
둘은 속닥거리면서 다퉜다.
요이델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아서 무슨 말을 하기도 민망한데.
일단 신체 일부는 로사리움 청소를 명목으로 머리카락을 확보했다. 남은 건 자신들의 문제였다.
“휘스, 어디 아파?”
“속이 안 좋나 봐. 하하.”
“정말이야? 이리 와 봐.”
요이델은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치유 마법을 걸어 주었다.
아픈 곳 하나 없었지만 어쩐지 몸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잠깐만. 바로 이거야.’
휘스테론은 자신의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눈부시게 새하얀 손수건을 꺼냈다.
“와, 이건 내가 줬던 손수건이네!”
요이델은 깜짝 놀라며 기뻐했다. 휘스테론이 약속대로 손수건을 소중히 간직해 준 듯했다.
“맞아, 델. 네가 준 거야. 그런데 기억해?”
“어떤 걸?”
“연무장에서 다른 흉흉하고 텁텁한 동료놈들한테 축복 마법 걸어 줘서 네 칭송이 일주일 내리 울려 퍼졌던 날. 그날 쓰러져 버려서 기사놈들이 병문안 선물 들고 줄지어 왔던 거.”
요이델은 그때의 장관을 떠올리며 살짝 눈을 찡그렸다.
휴가를 받아 쉬고 있던 요이델에겐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물론 기뻤다.
사람들의 호의는 신기하고 좋았으니까. 그런데 밤을 넘어서 새벽까지, 하루 이틀 사흘 이어지면서 조금 곤란해졌다.
그 뒤로 요이델은 북관 쪽으로는 절대 걸음 하지 않았다.
“응, 기억나. 무슨 일인데, 휘스?”
“그 축복 마법. 나는 못 받았잖아.”
“……!”
휘스테론의 말에 옆에 있던 라이오스도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축복 마법, 혹시 내 손수건에 걸어 줄 수 있을까?”
축복 마법은 가장 기초적인 힘. 근본적인 신성력을 그대로 덜어 주는 마법이었다.
이 손수건을 메디아로 보내면 될 것이다.
“응, 해 줄게.”
요이델은 활짝 웃었다. 그를 본 두 호위기사도 함께 미소 지었다.
이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