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280
#280화
후웅-!
마체테가 거칠게 공기를 갈랐다.
더벅머리 남자의 정수리를 노린 공격이었지만, 그는 옆으로 움직여 가볍게 피했다.
춘식은 남자를 따라가며 연속으로 마체테를 휘둘렀다.
목을 노리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공격하면 상체를 틀어 피한다.
그러자 춘식은 잠시 손을 멈췄다.
“와. 빠르네, 빨라.”
“……?”
미간을 찌푸리는 남자를 보며 춘식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필리핀으로 들어가기 전, 대만에서 잠깐 지냈었다.
그 탓에 입말로는 중국어를 대강이나마 할 수 있었다.
“너, 뭐 하는 놈이냐?”
더듬더듬 뱉은 중국어에 남자가 반응했다.
“우리 말을 할 줄 아나 보군.”
“어? 어. 뭐, 그렇지.”
“악감정은 없지만, 신세를 지고 있던 터라 밥값은 해야 해서.”
“야. 말을 좀만 천천히…….”
탓!
순식간에 달려들어 간격을 좁힌 남자가 연타를 날렸다.
탁! 타다닥!
춘식은 다급하게 칼 면과 팔뚝으로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무슨 홍콩 영화야?’
몸을 확 틀며 숙인 춘식이 뒤차기를 날렸다.
터억-!
남자는 발을 손바닥으로 막아 냈다.
그 틈을 타 빠져나온 춘식은 주변을 슬쩍 둘러봤다.
다들 박 터지게 싸우느라 이쪽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단 한 사람이 이쪽을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저기요. 보고만 있으시게?”
불만 섞인 말에 마종석이 입술을 비죽이며 대꾸했다.
“왜?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혼자 상대한다고 하지 않았나?”
“크흠.”
춘식은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상대하다간 한참 후에나 결판이 날 듯했다.
그렇다고 이런 장소에서 진심을 내고 싶진 않았다.
“내가 할까?”
“아,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손을 털던 남자는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예의가 부족하군.”
그리고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마종석은 그걸 보며 자신도 싸움에 참여했다.
퍽! 콰악!
남자는 춘식을 공격하고, 마종석은 그런 남자에게 발차기를 꽂는다.
춘식은 매섭게 날아오는 주먹을 막고 쳐내다 보니 얼떨결에 2대 1로 격투가 펼쳐지게 됐다.
처음 합을 맞추는 거였지만, 둘 다 기본적인 실력은 있었기에 상대를 효과적으로 압박했다.
퍼억-!
“큭.”
뒤로 밀려난 남자가 작게 신음을 뱉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삼합회의 조직원들은 거의 다 쓰러진 상태였다.
남자는 욱신거리는 팔을 툭툭 털며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빚이 있으니 싸우긴 했는데, 지금 남아서 이 두 사람과 맞서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죽을 수도 있겠어.’
좌우를 한 번 더 살핀 남자가 몸을 출구를 확인했다.
타다닷!
이내 그곳을 향해 달려 나갔다.
“어?”
출구가 반대쪽이기도 했고, 남자의 속도가 워낙 빨랐기에 춘식과 마종석은 곧바로 쫓아가지 못했다.
그걸 본 미우라가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잡아!”
그 말에 야쿠자들이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뒤쫓았다.
하지만 남자는 비교적 작은 편인 체구에 걸맞게 순식간에 멀어졌다.
탁! 타닷!
“이야. 벽도 잘 타네.”
춘식은 손을 눈썹에 대고 여유롭게 말했다.
그 옆에 선 마종석이 인상을 구겼다.
“저런 놈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이러면 의뢰 실팹니까?”
“그건 아니지. 의뢰 내용은 어디까지나 이 야쿠자들을 돕는 거였으니까.”
한 명을 놓친 건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툭.
미우라가 들고 있던 삼합회 조직원을 내려놓으며 다가왔다.
그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젠장.”
“거, 안타깝게 됐수다. 엄청 잽싼 놈이네.”
미우라는 구기고 있던 인상을 천천히 피며 고개를 저었다.
“한 놈을 놓친 건 아쉽긴 하지만…… 오늘의 도움은 감사했습니다.”
“아, 예.”
“이주혁 씨에게 안부 전해 주십시오. 그럼.”
그 한마디를 남긴 미우라가 수하들을 향해 뭐라 지시하며 멀어졌다.
“깔끔한 양반이구만.”
“음.”
잠시 그를 지켜보던 춘식은 뭔가 떠올랐다는 듯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설마 저거 하나 처리 못 했다고 대표님한테 까이는 건 아니겠죠?”
“설마…….”
마종석은 그의 말을 부정하려다 멈칫했다.
이주혁과 그 동료들의 지옥 같은 갈굼이 떠오른 탓이었다.
왜 놓쳤냐, 그걸 못 잡냐, 병신이냐 등등…….
“……지금이라도 찾아볼까요?”
“……그러지.”
마종석과 춘식은 굳은 표정으로 미우라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마종석, 춘식과 맞붙었던 더벅머리의 남자.
그는 삼합회의 아지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건물 옥상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어디냐!”
“저쪽으로 갔다!”
아래에선 야쿠자들이 혈안이 된 채로 그를 수색하는 중이었다.
남자는 옥상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주위가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그렇게 삼십 분, 한 시간이 지나고.
야쿠자들이 사라진 걸 확인한 남자는 조심스럽게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꾹. 꾹.
“어르신.”
전화 너머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어떻게 됐나.
“의탁하고 있던 조직이 일본 놈들에게 당했습니다.”
-그렇군. 지금쯤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신이 나 있겠지.
삼합회 홍콩지부장이자 선생과 손을 잡은 명운제약의 사장, 장쉬안이 만족스러운 듯은 투로 중얼거렸다.
남자는 그런 그에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생각보다 강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저도 당할 뻔했습니다.”
-……장룡. 네가 강하다고 평가할 정도란 말이냐? 몇 명이나?
“세 사람 정도였습니다.”
그 말에 장쉬안이 침음성을 내며 중얼거렸다.
-흐음……. 그자에게 그 정도의 전력이 있었나.
“하지만 그의 수하라고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더 알아보고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좋다. 몸조심하거라. 내 아들아.
“예. 어르신.”
뚝.
전화를 끊은 장룡은 표정을 굳혔다.
‘얼굴, 기억했다.’
너클을 끼고 있던 놈과 마체테, 그리고 멀끔하게 생긴 남자까지.
셋 중에 최소한 둘은 죽여야 수지타산이 맞으리라.
***
“여기 있습니다.”
“제대로 세탁한 거지?”
“예. 그렇습니다.”
내 물음에 중년의 남자가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이놈은 DS컴퍼니 한국지부의 위장회사인 동성유통의 사장, 오주찬이었다.
어쩌다 보니 나랑 경호대가 같이 지부의 시설을 박살 냈고, 그로 인해 오주찬은 여러모로 목숨을 위협받는 신세가 되었다.
팔랑.
나는 오주찬이 건네준 통장을 받아 들고 액수를 확인했다.
“오. 꽤 많네?”
“그렇습니다.”
어쨌든 높으신 분들에게 청부 의뢰를 받던 놈이다.
그 사실로 조금만 압박해 주면 돈이 쭉쭉 나왔을 거다.
“꿍쳐 놓은 거 좀 더 있을 것 같은데?”
“아, 아닙니다.”
넌지시 던져 주니 오주찬이 손사래를 쳤다.
“에이. 네가 세탁해서 본사로 보냈을 텐데.”
“그러니까 더 안 되죠. 금액 빠지면 다 걸립니다.”
“흠. 그래?”
탁.
“어쨌든 좋아. 오주찬 사장.”
“예.”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오주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DS컴퍼니도 열받았을 테니 죽이고 싶을 테고, 경호대로 추정되는 놈들도 자살로 위장해서 제거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나도 오주찬을 보호해주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돈을 뜯어낸 거고 말이다.
“음……. 일단 목숨 부지하려면 신분부터 갈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러고 해외로 나가든지 해야겠네. 아는 사람한테 말해 둘 테니까 조용한 데서 기다려.”
“알겠습니다.”
오주찬은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사장실을 떠났다.
“이러면 돈은 됐고…….”
각계의 고위층을 엮으려면 최소한의 성의는 필요한 법.
내가 박광훈과 함께 만났던 놈들에게 뿌릴 돈은 이걸로 어느 정도 충당이 될 거다.
아마 지금쯤 박 터지게 싸우고 있을 야쿠자들한테도 조금 뜯어낼 예정이고.
솔직히 부패한 놈들한테 내 생돈 쓰긴 아깝잖아?
꾹. 꾹.
그렇게 고세운에게 가짜 신분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려던 그때.
우웅-
“음?”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뭐지?’
이젠 이 표시만 봐도 느낌이 조금 쎄했다.
이런 전화를 받고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다고 또 무시할 순 없지.
“여보세요?”
-이주혁 씨 전화 맞습니까?
“예. 제가 이주혁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대통령비서실입니다.
“?!”
상상도 하지 못한 말에 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대통령비서실이 일개 시민에게 전화라니. 무슨 일입니까?”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음.”
거기서 연락이 왜 왔나 했더니, 내가 새로 주도한 모임에 관련된 문제였나.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불러 드리는 주소로 오시면 됩니다.
“쩝. 예.”
마음 같아선 네가 오라고 말하고 싶지만, 비서실 정도 파워면 아직 막 나갈 순 없다.
나는 전화 너머의 남자가 말해 주는 주소를 받아 적었다.
무슨 일로 직접 전화까지 걸어서 나를 불러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 민정수석인 민기형이 VIP와도 커넥션이 있었던 만큼 아마 중요한 사안일 것이다.
“지금 바로 갑니까?”
-3시간 뒤에 방문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흐음…….”
나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민기형과 민지훈이 죽거나 실종되었으니, 그놈들과 결탁하고 있던 높으신 분들은 몸이 달았을 거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나한테 접근한 거겠지.
절로 한숨이 나왔다.
‘3시간이라.’
날 담그려고 부르는 건 아니겠고, 내 뜻을 떠보려는 것 같은데.
내가 그래도 언더커버 짬이 있긴 하지만…… 그 능구렁이들 사이에서 실수하지 않고 잘 빠져나올 수 있을까.
드륵-
‘고민해서 뭐 하냐.’
일단 부딪혀 봐야 알겠네.
어차피 내가 교묘한 구라를 치는 것 같다고 생각할 순 있어도 그걸 증명할 방법은 없다.
선생이 직접 튀어나와서 해명할 리는 만무하니까.
덜컥.
사무실 문을 닫고 나온 뒤, 핸드폰을 열어 마종석에게 일은 잘되고 있나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잠시 신호가 가다 통화가 연결됐다.
-뭐냐.
“끝났어?”
-그래. 네 말대로 씨가 말랐다. 한 명이 도망치긴 했지만.
“도망갔다고?”
마종석에 춘식이, 스가와라의 오른팔인 미우라까지.
어지간한 깡패 나부랭이들은 찜 쪄먹을 인간이 셋이었는데 하나를 놓쳐?
-강자였다. 특히 발이 엄청나게 빨랐다.
“그래서 놓쳤다?”
-……면목이 없군.
“쩝.”
아니 뭐,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데.
“됐다. 일단 마무리하고 돌아와. 한 놈은 그쪽에서 알아서 해결하겠지.”
-알았다.
미우라도 자존심이 있으니 우리가 뒤처리까지 다 해 주는 걸 바라진 않을 거다.
전화를 끊고 나는 다른 생각에 잠겼다.
대통령비서실에서 다이렉트로 연락이 왔다면 아마 수석비서관이나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의 오더일 텐데.
그놈들은 나를 알지만, 난 놈들에 관한 정보가 많지 않다.
고세운을 통해 신상을 털어 볼 순 있어도, 단순한 사실보단 조금 다른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광철이 아저씨한테 말씀을 드려 봐야 하나?’
같은 행정부에 속해 있던 사람이니만큼 아저씨도 아시는 게 있지 않을까.
박광훈도 정보가 있긴 하겠지만, 이런 걸 물어볼 정도로 그놈한테 신뢰가 있는 건 아니다.
탁.
회사 바깥으로 나와 내 차에 올랐다.
광철이 아저씨는 마침 나한테 안부도 물을 겸 볼일이 있다며 온다고 하셨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내가 먼저 모시러 갈 생각으로 시동을 걸던 그때.
‘……이것들 봐라.’
내 차에서 10m 정도 떨어진 뒤쪽에 선팅을 짙게 한 검은색 세단 하나가 서 있는 게 백미러를 통해 보였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는 기어를 후진으로 바꿨다.
철컥.
그리고 액셀을 콱 밟았다.
씨익.
기선제압부터 들어가야겠네, 이거.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