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313
#313화
레이븐, 유현은 골목의 틈에서 조심스럽게 나왔다.
‘……돌아갔나 보군.’
임기응변으로 겨우 따돌리긴 했으나, 뒤에서 미친 듯이 쫓아올 때는 순간 모골이 송연했다.
이주혁. 손을 나눈 건 잠깐이었다.
하지만 그의 수준이 범상치 않다는 것은 명확히 알게 되었다.
유현은 객관적으로 본인이 상위권의 실력자라고 생각한다.
글라자 내에서도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은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니까.
그런데 이주혁은 그런 그와 거의 동등하게 맞섰다.
‘거기서 계속 싸웠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맨손 격투를 한 것도, 제대로 승부를 내지 못한 것도 오랜만이었다.
유현은 모텔 침대에 털썩 앉으며 생각에 잠겼다.
원래는 그 사투리를 쓰는 이들에게 고상미의 행방을 물어보려고 했으나, 의도치 않게 이주혁과 마주쳐 버렸다.
사실 SA시큐리티에서 고상미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이주혁일 것이다.
‘바로 어제도 만났을 테니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이주혁에게 접근할 순 없었다.
고상미에게 자기도 모르게 살기를 내뿜었으니, 분명 그녀도 느꼈을 터.
실수로 속내를 내보인 이상 고상미나 SA시큐리티에게 우호적으로 다가가긴 틀렸다.
“후…….”
어차피 대화로 곱게 끝낼 생각도 아니었다.
유현은 이내 목을 뚜둑 꺾으며 침대에 몸을 누였다.
푹.
“…….”
벌떡.
다시 몸을 일으킨 유현이 바닥을 딛고 섰다.
꾸욱.
그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유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왜 이기지 못했지?’
내심 근접전은 자신 있었다.
고상미와 지옥 훈련을 하며 배운 만큼, 압도하진 못하더라도 져 본 적은 없다.
누군가한테 질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이주혁과의 싸움에선 분명 자신이 밀리는 느낌이었다.
물론 전력을 다한 건 아니었다지만, 그대로 끝까지 갔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
유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레이븐’은 단 한 번도 의뢰를 실패한 적 없는 킬러였다.
죽여야 할 사람을 죽이지 못한 적도 없다.
그러나 고상미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난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유현의 자부심과 자존심이 긁힌 것이다.
파앙!
침잠한 눈빛으로 침묵하던 유현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의 눈앞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원래 항상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고상미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후우…….”
파앙-!
유현은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유연하게 발차기를 연속으로 날렸다.
하지만 상상 속의 이주혁은 여유롭게 움직여 공격을 피해 냈다.
머릿속으로 아까 상대의 움직임을 그리며, 유현은 가상 대련을 이어 갔다.
훅!
대련은 긴 시간 동안 이어지진 않았다.
묵고 있는 방이 좁을뿐더러, 잠깐의 공방이었기에 데이터가 적었다.
‘승률은…… 5할 정도인가.’
썩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현은 다음번에 마주했을 땐 확률을 7할까지 올릴 자신이 있었다.
몸에 들어갔던 힘을 푼 유현은 머리를 흔들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날 후로, 그에게 휴식은 사치였다.
* * *
다른 일을 하기 전, 난 우선 치료를 받고 온 애들을 찾아갔다.
“해, 행님.”
“어휴.”
돼지랑 난쟁이는 거의 멀쩡했다.
그렇게 많이 맞진 않았으니까.
다만 덩치 이놈은 좀 신기했다.
“하하하. 제가 좀 튼튼하다 아입니꺼.”
“이 새끼…….”
듣기론 막 허공으로 날아갈 정도로 처맞았다던데, 어디 부러진 데도 없고 멍만 잔뜩 들었다.
몇 시간도 안 돼서 걸어 다니기까지 하는 걸 보니, 확실히 나이가 깡패다.
“진짜 괜찮은 거 맞지?”
“하모예. 부장님 빤치가 더 매웠지, 금마는 암것도 아이라예.”
이 새끼, 통영 통 자리는 어떻게 먹었나 했더니.
하여튼 맷집 하나는 좋은 놈이다.
어느 정도 타고난 것도 있지만, 녀석 말대로 부장님한테 특별 교육을 받으면서 많이 성장한 모양이다.
“그래. 걱정할 필요 없겠네. 쉬어라.”
“아, 행님!”
질척대는 녀석들을 떼 놓고 다시 복도로 나왔다.
큰 문제는 없다니 일단 다행이었다.
탁.
문을 닫고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민지훈에게 글라자 내부 사정과 유현이란 놈에 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왠지 모르는 게 있을 때마다 민지훈을 도라X몽처럼 이용하는 느낌이지만…….
‘그놈만큼 뒷세계를 잘 아는 놈이 또 없지.’
배후자 클럽에서 나름 잘 나가던 놈이었으니 정보도 당연히 많을 거다.
꾹. 꾹.
나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
언제든지 연락해도 좋다고는 했는데, 그놈도 지금쯤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테니 연락이 될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다르게, 신호음이 채 다섯 번을 울리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됐다.
-오, 이주혁 씨.
“바로 받네. 요새 한가한 모양이다?”
-하하. 그럴 리가요.
쓴웃음을 흘린 민지훈이 조금 잠긴 목소리로 설명했다.
-이주혁 씨한테 알려 준 번호는 내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핸드폰 번홉니다. 어지간하면 금방 받을 수 있죠.
“그럼 내가 네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겠군.”
-이제 한배를 탄 사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한배를 타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라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지금으로선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라 일단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한마디를 다시 삼켰다.
-그래서, 어쩐 일로?
“좋아. 피차 바쁠 테니 용건만 말하지. 글라자의 내부 정보와, 그곳 소속의 유현이라는 놈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다.”
-흐음. 그건 왜 궁금한 겁니까?
그동안 군말 없이 내 충실한 정보 셔틀 임무를 수행하던 민지훈이 의문을 표했다.
하긴, 민지훈은 글라자 놈들을 족치기 위해서 나한테 사건을 일으켜서 시선을 끌어 달라고 한 거다.
그런데 자신이 목표로 하는 놈들의 정보를 달라고 하니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하겠지.
“네 계획에 간섭할 생각은 아니고, 그쪽에 소속된 놈 하나가 우리 측 인원이랑 안 좋게 엮인 게 있어서 물어보는 거다.”
-그렇군요.
민지훈은 이내 납득했는지 긍정의 의사를 내보였다.
-무리한 부탁은 아니네요. 대신 시간은 좀 걸릴 수 있습니다.
“얼마나?”
-글쎄요. 확답은 못 드리겠네요. 그래도 유현? 그 사람에 관해선 알아봐 드리죠.
“그래. 알았다.”
바로 답이 나오지 않는 건 좀 아쉽긴 해도, 어쨌든 알려는 준다니 다행이었다.
-근시일 내에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하고,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으려다 멈칫했다.
유현의 정보를 넘기며 조사를 부탁했는데, 그에 대한 답장이 와 있었다.
꾹.
[해커 – 입국 기록을 다 확인해 봤는데, 유현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얼굴도 내가 기억하던 거랑 많이 달라져서 모르겠고. 러시아 출국 기록은 나도 뚫는 데 시간이 걸려.] [수고했다. 계속 찾아 줘.]답장을 보내고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소식을 전했을 때, 고세운은 예전에 같이 살던 놈이 킬러의 길로 빠졌다는 걸 알고 복잡한 감정을 보였었다.
고상미한테 물어보니 동생에게는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진 않았다더라고.
어쨌든, 민지훈의 답이 돌아올 때까진 시간이 남아 있었다.
‘연락에 답이나 해야겠군.’
며칠 전, 스가와라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야붕이 너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더군.
일본 3대 야쿠자 조직 중 하나, 스미요시카이의 수장이 나에게 관심을 가졌다.
좋은 일인 건진 모르겠지만, 어떻게 보면 기회일지도 모른다.
무슨 의도인가 싶긴 한데, 아마 나쁜 뜻으로 대화를 요청한 건 아닐 테니까.
‘어쩌면…….’
‘서클’에 접근하는 첫 번째 발걸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 *
블라디보스토크 근교의 한 커다란 저택 안.
뚝.
전화가 끊긴 걸 확인한 민지훈이 핸드폰을 닫고 책상 위에 올려뒀다.
그의 얼굴에 미미하게 띄워져 있던 미소는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그런 민지훈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경호대장, 육진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주혁이 정보를 요청한 겁니까?”
“네.”
간결한 대답에 육진모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여기가 흥신소도 아니고, 자꾸 건방지게 구는군요.”
그 말을 들은 민지훈이 작게 웃음을 지었다.
“뭐, 별수 없죠. 서로 이용해야 한다면, 이 관계가 끝나기 전까진 최대한 협조해야 하지 않겠어요?”
“으음…….”
“아, 그리고 이주혁이 알아봐 달라고 한 건 글라자의 내부 정봅니다.”
“예?”
“육 대장님의 역할이 중요하단 소리죠.”
글라자 안으로 들어가 정보를 캐내는 게 경호대의 이번 역할이었다.
육진모는 어쩐지 경호대의 성과가 이주혁에게 그대로 흘러 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럼, 원래 주제로 돌아가서. 그들과 만나는 게 내일이지요?”
“그렇습니다.”
미하일과 만난 이후, 경호대는 글라자의 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거기서 새롭게 합류하게 된 경호대를 소개하고, 내부 사정을 대충 눈으로 확인하라는 미하일의 의도가 들어간 것이었다.
“따로 명심해야 할 게 있겠습니까?”
육진모의 물음에 민지훈이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글쎄요. 미하일의 태도를 보면 곧바로 적대적으로 나올 것 같진 않네요. 그도 글라자 안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니까요.”
“최대한 말을 좋게 전해 주겠다고 하긴 했습니다.”
“일단은 회의에 참가하되 다른 사람이 어떤 의견을 내는지, 성향은 어떤지 파악하시면 될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더 이상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육진모는 민지훈의 곁에서 오래 보필한 만큼, 그의 의중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만 가서 쉬세요. 내일 움직이려면 미리 휴식하는 게 좋겠습니다.”
“예.”
자리에서 일어난 육진모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나섰다.
그도 생각할 게 많았기에 기꺼운 지시였다.
탁.
민지훈은 그가 나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글라자…….’
끼익.
몸을 일으킨 민지훈이 생각에 잠긴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가칭 ‘첫 번째 삶’에서 봤던 글라자의 행적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민지훈이 ‘서클’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원래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였다.
‘그때 글라자는 이미 와해 직전이었지.’
여러 사정이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금전적 문제였다.
그럼에도 상황과는 별개로 그들이 가진 무력 탓에 서클 내에서 퇴출당하진 않은 상황이었다.
물론 내부적으론 주축이 되는 이들은 하나둘씩 다른 세력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이빨이 빠진 호랑이도 호랑이라는 듯, 글라자는 최후의 수를 던졌다.
바로 다른 나라로 손을 뻗치는 것이었다.
‘동북아시아가 혼란에 빠졌던 거대한 암투였다.’
순간 민지훈의 표정이 굳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번 생엔 일어나지 않을 사건이었으니까.
우선 현재 글라자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금전적 문제였다.
정확히는 분쟁을 지양하는 마피아들의 분위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마피아들의 사업 모델은 꽤 다양하다.
그나마 떳떳한 사업으로는 카지노나 사기를 곁들인 사업 등이 있지만, 바닥에는 마약이나 무기의 밀수. 또는 인신매매나 입에 담지 못할 것들이 많았다.
그 상황에 얼마 전, 부산으로 무기와 마약을 밀매하던 마피아 일당이 검거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다 싶은 한국 정부는 민지훈을 등에 업고 러시아에게 경고를 날렸다.
그 탓에 러시아 정부의 단속은 심해졌고, 거물 마피아 하나가 본보기로 체포당하는 일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주혁 때문에 3년은 앞당겨졌으니…….’
결국 마피아들의 회동에선 당분간 몸을 사리자는 의견이 나왔고, 서로 간의 분쟁도 쥐 죽은 듯이 사라졌다.
그 분쟁 과정에서 적잖은 이득을 취하던 글라자 입장에선 난감한 상황이었다.
원래는 후로 이 교착 상태가 유지됐기에 글라자도 활로를 찾기 위해 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나, 민지훈은 잠적하기 전 꽤 많은 자금을 챙겼다.
한 마디로, 글라자를 흔들기 충분한 ‘힘’을 경호대의 손에 쥐여 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턱.
방 안을 배회하던 민지훈이 테이블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오늘 이후로, 글라자에게 있어 경호대는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