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321
#321화
라세흠은 데릭을 데리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데릭은 옆구리에 닿어 있는 총구를 느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어디로 가는 겁니까.”
“조용히 따라와.”
“넵.”
그렇게 한참을 걸어 두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눈앞의 건물이 어디인지 깨달은 데릭이 침음성을 냈다.
“여긴…….”
“들어가자고.”
데릭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표정을 한 채 SA시큐리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부장님! 오셨…….”
주말이라 프론트에서 일을 보던 강예원이 발랄하게 인사하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라세흠과 어깨동무하고 있는 데릭을 보며 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분은 누구……?”
“내 손님.”
그리 말하는 라세흠의 얼굴이 어쩐지 살벌했기에, 강예원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혁, 대표님한테는 뭐라고 전달할까요?”
“외국에서 노란 머리 손님이 왔다고 전해.”
“네. 알겠어요.”
저벅저벅.
라세흠은 데릭을 끌고 대련실로 향했다.
벌컥!
이내 문을 연 뒤, 불량한 학생에게 끌려가는 선량한 학생처럼 위축되어 있던 데릭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윽……?”
휘청대던 데릭은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에 우뚝 멈춰섰다.
“뭐야? 외국인?”
“부장님. 누굽니까?”
“거, 잘생겼네. X바…….”
의심과 호기심, 왠지 모를 적대감이 담긴 눈빛들이 쏟아졌다.
데릭은 긴장한 채로 라세흠을 돌아봤다.
“기준이는?”
“대표 따라갔잖습니까.”
“아, 맞네. 씨.”
머리를 벅벅 긁은 라세흠이 데릭을 향해 말했다.
“야.”
“예?”
“어디서 보냈어?”
당황한 데릭이 주변을 살폈다.
데려와서 심문이라도 하려나 싶었는데, 고작 험악한 남자들 한복판에 던져 놓고 노려보기라니.
데릭은 참신한 압박 방법에 놀라면서도 머리를 굴렸다.
“자. 노란 머리 친구. 네가 지금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있는 건, 아직 아군인지 적군인지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
“신중하되, 솔직하게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잠시 고민하던 데릭이 침착하게 답했다.
“아군이라고 확실히 말씀드릴 순 없지만, 아군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확실히 적은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그 말에 팀원들이 술렁거렸다.
“오, 한국말 잘하는데.”
“그러게. 부장님. 어떡할까요?”
주먹을 들며 말하는 팀원에게 손을 내저은 라세흠이 데릭을 노려봤다.
“질문에 대답해. 누가 보낸 거지?”
“저는 누가 보낸 사람이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그럼 질문을 바꿔서. 소속이 어디냐?”
순간 데릭의 말문이 막혔다.
아까부터 상황에 자꾸 끌려다닌 탓에 제대로 된 생각과 판단이 쉽지 않았다.
“잔머리는 집어치워. 어차피 조사하면 다 나오니까.”
데릭은 머릿속에 떠오른 여러 개의 계획을 폐기했다.
애매한 거짓말은 저 인간에게 간파당할 것이다.
“사실 저는 시장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입니다.”
“시장 조사?”
“예. 우리 쪽 사람이 활동할 수 있는지, 고객은 있을지…… 이런 것들을 조사하는 겁니다.”
설명을 들은 라세흠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누굴 바보 병신으로 아나.”
분위기가 안 좋아진 걸 느낀 데릭이 입술에 침을 발랐다.
“말하면 살려 주는 겁니까?”
“어.”
“하…….”
결국 데릭은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는 조직보단 본인이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
“호오. 그러니까, 네가 그 킬러 놈들에게 한국의 정보를 제공한단 소리지?”
“맞습니다.”
데릭이 털어놓는 말을 잠자코 듣던 라세흠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라세흠은 데릭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친절한 얼굴로 물었다.
“오케이. 그럼 너는 됐고.”
“예?”
씨익.
“나머지는 어디 있냐?”
* * *
블라디보스토크 근교의 한 저택.
그곳의 서재에서 한 남자가 책을 읽고 있었다.
여기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책이 많진 않았지만, 그가 보고 있는 건 러시아어 관련 서적이었다.
기초는 알고 있었지만, 심화 과정이 조금 부족했기에 공부가 필요했다.
사각. 사각.
남자가 메모해 가며 현지 언어를 공부하던 도중, 누군가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들어와요.”
그의 허락에 문이 열리고, 복면을 쓴 채 무장한 군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군인은 남자의 앞으로 다가가 꼿꼿이 선 채로 말했다.
“선생님.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대원의 말에 남자, 민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놓고 가요.”
“예.”
스윽.
민지훈은 대원이 서재를 나가는 걸 보고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놨다.
그리고 그가 두고 간 종이를 집어 내용을 살폈다.
[레이븐이 움직였습니다.]그 한 줄을 읽은 민지훈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러시아로 넘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실 이미 작업하고 있던 일이 있었다.
삼합회를 입맛에 맞게 바꾸면서, 글라자의 영향력을 대폭 축소한 뒤 잡아먹겠다는 계획이었다.
여러 세력이 엮인 탓에 설계 과정이 복잡했으나, 운이 좋게도 계획의 키Key가 되어 줄 인물이 존재했다.
‘그 덕에 순조롭게 준비할 수 있었지.’
이주혁에게 이미 알고 있던 글라자의 정보를 일부만 말해 준 것도 그 일환이었다.
아무도 그가 꾸미는 일을 알아선 안 됐으니까.
스윽.
자리에서 일어난 민지훈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에 종이를 던져 넣었다.
타닥. 탁.
불씨가 튀며 종이가 사그라들었다.
민지훈은 날리는 재를 바라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만간 성과가 나오겠군.’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 * *
중국, 허베이성.
유현은 그곳에 있는 공항에 도착했다.
“흠…….”
간소한 위장용 짐을 챙기고 공항 바깥으로 나가자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리고 슬쩍 눈치를 보더니, 걸음을 옮기는 유현의 옆에 따라붙어 뭔가를 건넸다.
턱.
그가 건넨 작지만 묵직한 가방을 캐리어 안에 넣었다.
끄덕.
유현은 남자와 헤어진 뒤 메모해 둔 주소를 확인했다.
허베이지부장이 비행기를 탈 일이 잦아서 그런지 지부는 공항 근처에 있었다.
저벅.
저 멀리 보이는 전통 양식의 커다란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그리 발전된 지역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화려하게 꾸며진 건물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카지노로 꾸며 놨으나, 실상은 그 지하에서 여러 불법적인 일이 자행된다고 들었다.
그쪽으로 향하다 보니 점점 편의시설이나 숙박업소가 늘어나는 게 느껴졌다.
카지노를 찾는 관광객들의 존재로 인해 근처 상권이 활발해진 것이다.
“…….”
유현은 자신의 복장을 점검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차림.
다른 사람들이 보면 수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스윽.
결국 유현은 조용한 건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재킷 없는 흰 셔츠에 정장 바지.
구두는 챙겨 오지 않아서 신지 못했지만, 이렇게만 해도 평범한 카지노의 손님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게 유현은 오가는 손님들 사이에 자연스레 섞여 들었다.
“5!”
“이런. 또 잃었군.”
의뢰를 위해 중국어를 공부해 둔 덕에 사람들이 하는 말은 적당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유현은 환전소에서 칩을 받은 뒤 발걸음을 옮겨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툭.
룰렛에 가볍게 베팅하며 상황을 살폈다.
유현이 노리는 것은 VIP 공간이었다.
카지노는 일반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공간과 분리된, 가진 칩이 많은 사람을 위한 곳이 존재한다.
그리고 여기, 삼합회에서 관리하는 카지노에선 VIP들을 위한 쇼가 펼쳐진다.
‘일명 투기장.’
콜로세움같이 생긴 원형의 공간에 두 사람을 넣어 놓고, 하나가 죽거나 항복할 때까지 싸움을 붙인다.
구경하는 이들은 그들의 승패를 점쳐 베팅하고, 결과를 맞히면 배당률에 따라 건 돈을 받는다.
물론 거긴 검증된 사람만 참여할 수 있다.
신분이 확실하며, 삼합회와 연이 있는 인물들이 주다.
유현은 그곳으로 잠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태론 불가능했다.
그것도 오늘 입국한 수상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VIP가 아니어도 다른 루트는 있었다.
슬쩍.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서 그런 건가.’
최대한 일을 빨리 처리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더 걸릴 듯했다.
짤랑. 달그락.
유현은 적당히 환전한 돈을 적당히 베팅하며 시간을 죽였다.
그렇게 있다 보니 해가 점점 넘어갔다.
낮부터 카지노에서 상주하고 있던 인간들이 울상이 된 채 떠나고, 새로운 얼굴들이 자리를 채웠다.
그러던 중, 고급스럽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건장한 남자들을 대동한 채 어디론가 이동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저건가.’
온갖 정보를 알고 있는 미하일이 말해 준 것이니 어지간하면 틀린 건 없을 터.
드륵-
유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이 찾던 남자의 얼굴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그 남자는 어쩐지 초조한 듯한 모양새로 좌우를 살피며 서성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가 중국어로 말을 걸었다.
“이봐요.”
“어, 어? 무슨 일이오.”
“혹시 용병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유현의 말을 들은 남자의 퉁퉁한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 그건 어떻게…… 아니. 당신은 누구요?”
“보아하니 상황이 좀 곤란한 것 같은데, 나도 돈이 필요합니다.”
“……투기장이 돌아가는 사정은 대충 아는 모양이지만,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소?”
“그게 중요합니까? 어차피 구색만 맞추면 될 텐데.”
VIP들은 각자 투기장에서 싸울 사람을 데려온다.
아닌 사람도 있긴 하나, 대개는 그렇게 한다.
자신의 부하나 고용한 자가 우승을 차지하게 되면, 그 명예와 상금 일부는 본인의 것이 된다.
그런다 해서 꼭 자기 부하가 우승할 필요도 없었다.
투기장은 어디까지나 유희를 위해서 만들어진 공간이니까.
“증명이 필요하다면 하지요.”
“으음.”
살찐 중년의 남자는 유현을 위아래로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됐소. 내가 보는 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당신 정도면 충분히 체면치레는 하겠지.”
고개를 저은 남자가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자신이 고용한 자가 갑자기 사라진 탓에 반쯤 포기한 상황이었다.
그로서도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당신이 이겨서 얻은 상금은 가지시오. 대신,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각오해야 할 거요.”
그렇게 두 사람은 직원에게 다가갔다.
남자가 배지를 꺼내 보여 주자, 직원은 고개를 숙이며 둘을 어디론가 안내했다.
저벅.
직원을 따라가면서도 남자는 계속해서 당부했다.
“절대로 문제 일으키지 마시오. 그리되면 나한테도 책임이 돌아올 수 있으니.”
“예.”
유현은 적당히 대답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투기장으로 가지.”
“이분은 참가자입니까?”
직원의 물음에 남자가 살진 얼굴을 끄덕였다.
그러자 직원 한 명이 더 붙어 유현에게 말했다.
“참가자 대기 장소로 모시겠습니다.”
“음.”
유현은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며 직원의 뒤를 따랐다.
들어가면 갈수록 어쩐지 익숙한 분위기였다.
미하일의 권유로 글라자에 소속되기 전, 유현은 지하경기장에서 싸우며 돈을 벌곤 했었다.
평생 겪은 실전의 절반은 그 시절에 경험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미친 듯이 싸우던 시절이었다.
저벅.
감회가 새로운 걸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부모님의 죽음을 사주한 리신페이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투기장은 VIP들의 메인 이벤트이니만큼, 카지노의 관리자가 자리할 것이다.
어쩌면 지부장 본인이 직접 참석할지도 모르고 말이다.
유현은 순간 올라오려는 분노를 삼키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일단 우승부터 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