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367
#367화
파앙-!
샌드백이 훌쩍 멀어진다.
바람 소리를 내며 다시 돌아오는 샌드백을 옆으로 돌아 피한다.
뻐엉!
그리고 발차기를 내지르자, 다시 한번 샌드백이 몸을 비튼다.
“후웁.”
전신의 근육에 혈액이 공급되며, 강하게 수축한다.
퍼버버버벅-!
샌드백을 터뜨려버릴 기세로 쏟아낸 연타.
하지만 오래 가진 않았다.
“푸하……!”
더 지속하면 근육이 심하게 파열될 것 같아 주먹질을 멈췄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백기준이 물었다.
“…뭐하냐?”
“뭐하긴. 훈련, 수련.”
“네가 뭐, 고무고무 인간이냐?”
“뭔 소리야.”
알 수 없는 소리에 되물으니, 백기준은 나를 향해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였다.
“쯧쯧. 문화생활 좀 해라.”
“너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까 어이가 없네.”
나는 그대로 지하실로 내려가는 백기준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뜬금없이 샌드백을 마구잡이로 친 이유는, 강한 놈들과 싸울 때 느꼈던 묘한 감각 때문이었다.
움직임에 한계가 없어지고, 생각이 뻗어 나가는 대로 신체가 따라가는 느낌.
그것 때문에 이번 생엔 큰 부상 없이 아직 멀쩡할 수 있었던 거다.
‘전생에선 배랑 등짝에 흉터만 한가득이었는데 말이지.’
일단 전생에선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라, 과거로 돌아오면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긴 한데…….
처억.
평범한 상황에선 나오지 않는 걸 보면, 그냥 내 감정이나 호르몬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일 수도 있다.
각성제 빤 놈들이 고통도 못 느끼고 달려드는 것처럼.
“쓰읍.”
시간을 좀 투자해서 이 현상에 관해 탐구해 볼 생각이었는데, 적과 싸우는 게 아니면 그 감각이 느껴지질 않았다.
대련도 해봤는데 안 되더라고.
그렇다고 누구 하날 잡아 와서 갑자기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직원들이 너무 유능한 탓에 현장을 자주 나가질 않으니 원.
슥슥.
수건으로 땀을 닦고 훈련실을 나섰다.
그러자 손에 들고 있던 옷에서 진동이 울렸다.
우웅-.
확인해 보니, 청도에 도착했다는 부장님의 연락이었다.
일행이 떠나기 전 마종석에게 얘기를 하나 들었는데, 녀석과 친분이 있는 게 꽤 거물이었다.
그놈을 통하면 목적을 이루는 것도 한결 편해질 거다.
“행님-!”
그때, 복도 저 멀리서 달려오는 덩치가 눈에 들어왔다.
다급하게 뛰어온 녀석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소, 손님이 찾아오셨으예.”
“손님? 누군데.”
“그, 어떤 할밴데…. 조 실장이라 카면 알 거라고…….”
그 말에 나는 표정을 굳혔다.
“지금 어딨어?”
“일단 프론트 누님이 응접실로 모셨십니더. 혹시 뭐 잘못되기라도…….”
“아냐, 아냐. 가서 일 봐라.”
대통령비서실장, 조병철.
대한민국의 실권을 쥐고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자, 민지훈과 가까운 관계였을 거라고 예상되는 인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까다로운 놈이었다.
이번에도 어쩐 일로 찾아온 건진 모르겠지만….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였다는 건, 가벼운 용건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에휴.”
나는 한숨을 내쉬고 걸음을 옮겼다.
.
.
.
응접실로 들어가니, 조병철은 소파에 앉은 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오, 왔구만.”
“웬만해선 본론만 듣고 싶은데, 용건부터 말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조병철은 내 냉랭한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일단 앉지. 서서 들을 건 아니지 않나.”
그에 나도 일단 놈의 맞은편에 앉았다.
후룩.
나는 시선을 돌려, 조병철의 뒤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선배님?”
“엉?”
김정우가 흠칫하며 나를 쳐다봤다.
부장님이랑 같이 임무 나가던 사이였다고 들었는데, 이 양반도 내가 김용수 습격 사건의 용의자로 두고 있는 사람이었다.
모임 내부 인원 중, 그 정도의 실력이 있는 사람은 몇 없거든.
하지만 지금 그 일에 관해 추궁할 타이밍은 아니었기에,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잠깐 나가주시겠습니까. 조 실장님과 둘이 할 이야기가 있어서.”
김정우가 슬쩍 쳐다보자, 조병철이 손을 휘휘 저었다.
“나가 있어.”
“예.”
허락이 떨어지니, 김정우는 순순히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고, 조병철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입을 열었다.
“가끔 먹는 이 자판기 커피에도 풍미가 있단 말이지. 설탕이랑 프림이 들어가 달면서도, 오묘하게 남은 커피 향이 마음에 들어.”
뭔 개소리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일단 잠자코 들었다.
“싸구려여도 가끔은 여흥이 된다는 소리일세.”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그 야쿠자.”
꿈틀.
“내가 지시한 걸세.”
미사여구가 붙진 않았으나, 의미는 곧장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암살자를 보낸 게, 조 실장이었단 거군.’
내 예상이 반쯤은 들어맞은 셈이었다.
“이유가 듣고 싶군요.”
“이유라.”
탁.
조병철이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싸구려 놀음은 그만두자는 말일세.”
“…….”
“자네가 쥐고 있는 패, 대충 짐작이 가. 특전사 출신의 수하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본.”
자기 머리를 가리킨 조병철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또, 자네 머릿속에 든 것도 마찬가지. 나로선 상당히 탐이 난다네.”
“그래서, 급이 달리는 자들을 쳐내려고 한다. 이 말입니까.”
“요약하자면 그렇지.”
아마 ‘모임’에 핵심 인원만 남기고 다 쳐내자는 소리 같은데.
그들은 전부 각자의 조직에서 한가닥 하는 양반들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병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2년 뒤가 대선이네.”
“…….”
“그 전에 미리 판을 깔아두는 게 낫지 않겠나?”
씨익.
조병철이 웃었다.
“자네는 알고 있잖아.”
내가 본 놈의 미소 중, 가장 짙은 미소였다.
나는 머리가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대답했다.
“…대책은 있습니까?”
그 정도의 거물들이 한 번에 갈려 나간다면, 그 여파도 생각해야 했다.
그런 내 질문에 조병철은 가볍게 대꾸했다.
“사건이야, 만들면 그만 아니겠나.”
고위 공무원들을 날려버릴 사건을 직접 만들겠다는, 실로 오만한 말.
하지만 조병철은 그 말을 당당히 뱉을 만큼의 힘이 있었다.
“그럼, 하나만 대답해 주시죠.”
“해보게.”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뭡니까.”
“음.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군. 나에 관해 어떻게 알았느냐, 이런 걸 물어볼 줄 알았는데 말이야.”
조병철이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글쎄. 내가 원하는 건… 진실이라고 해야 하나?”
“진실?”
“그래. 진실. 자네와 선생만이 경험한, 그 신비에 관한 진실.”
조병철의 눈빛은, 70을 바라보는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난 그게 궁금하다네.”
오늘의 대화로 확신할 수 있었다.
조병철. 이 노망 난 영감은 절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 * *
한편, 중국의 칭다오靑島시.
라세흠 일행은 비행기를 타고 그곳에 도착했다.
“후.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오냐.”
공항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한 피켓이 보였다.
그리로 향하자, 일전에 만났던 30대 정도의 여성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남소영이라고 해요. 오늘 여러분들을 안내할 가이드랍니다.”
영혼 없는 인삿말을 건넨 남소영이 손짓했다.
“가실까요?”
왠지 군말 없이 따라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일행은 그녀의 뒤를 쫓았다.
라세흠은 앞장서 걸어가는 남소영을 향해 물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에 남소영은 기다렸다는 듯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네. 엄청요. 질 나쁜 놈들이 손을 뗀 건 좋지만, 소문을 듣고 공급처가 엄청 늘어서 일손이 모자라거든요. 그쪽 대표님이 주신 투자금으로 어떻게든 충당하고 있긴 한데,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그만큼 제가 영업을 뛰어야 되는 상황이라서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고민거리를 들은 라세흠은 질문한 걸 살짝 후회했다.
“그, 그렇군요.”
“그래도 대표님이 투자금을 넉넉하게 주셔서 이 정도 여유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거지, 아니었으면 마중 나오지도 못했을 걸요?”
저벅.
공항 바깥으로 나온 남소영은, 그녀가 준비해 둔 차로 일행을 안내했다.
“타세요.”
탁.
세 사람이 차에 오르자, 운전석에 앉은 남소영이 시동을 걸었다.
뒷좌석에 있던 마종석이 그녀에게 물었다.
“밀항 루트는 안전한 게 맞나?”
“허풍은 싫어하는 성격이라 솔직히 말하자면, 꽤 높은 확률로 안전해. 아는 놈들이 그쪽을 통해 몇 번 오가는 걸 봤거든.”
남소영이 룸미러로 마종석을 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반말은 네가 먼저 했다?”
“그건 알아서 해라.”
“어. 알아서 할 거야.”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남소영이 라세흠을 돌아보며 설명했다.
“어쨌든 100% 안전하진 않겠지만, 보수만 제대로 쥐여주면 알아서 잘 해 줄 거예요.”
“뭐, 바다 한가운데서 배를 멈추는 것만 아니라면야.”
부웅-.
한동안 이동하던 차량은 한 부두에 도착했다.
어업에 종사하는 몇몇 사람들이 그물을 걷고 있었다.
“이쪽이요. 트렁크에서 상자 챙기고요.”
차를 댄 남소영은 익숙한 듯 한쪽으로 향했다.
“선장.”
“음?”
그곳에서 배가 툭 튀어나온 중년 사내를 만날 수 있었다.
“저 사람이 그 선장인가 본데.”
“정말 돈 밝히게 생겼네요.”
라세흠과 춘식이 잠시 잡담하는 사이, 남소영이 라세흠을 불렀다.
“부장님.”
“예.”
“상자 넘겨줘요.”
스윽.
선장이라고 불린 남자에게 상자를 건네자, 그는 곧바로 박스를 열어 안에 든 지폐를 확인했다.
그리고 남소영에게 물었다.
“이 세 사람이 다야?”
“응.”
“알았다. 거기, 손님들은 이쪽으로.”
일행을 향해 손짓한 선장이 자신의 배로 걸음을 옮겼다.
라세흠은 그리로 향하며 남소영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도움 고맙습니다. 남소영 씨.”
“뭘요. 뱃삯만 제대로 계산해 줘요.”
“그러죠.”
라세흠과 마종석, 춘식은 선장의 배에 올랐다.
“어떻게, 바로 출발하면 되겠소?”
선장의 물음에 라세흠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예.”
“뱃멀미하는 사람은 없고?”
일행을 둘러보자 다들 고개를 저었다.
한 명은 군인, 한 명은 용병. 다른 한 명은 킬러 출신이다.
다들 배 타는 건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없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겠수다.”
선장은 흔들리는 뱃살과 함께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라세흠이 일행을 보며 말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곧바로 마종석 네가 말한 사람을 찾아갈 거다.”
그들의 목적지는 르자오시.
지금 있는 곳에서 남서쪽으로 이동하면 나오는 도시였다.
마종석이 말한 ‘도움을 줄 만한 인물’이 거기 있기에 찾아가는 것이었다.
턱.
배의 난간을 짚은 라세흠이 마종석에게 물었다.
“근데 말이다. 마종석.”
“뭐지.”
“네가 말한 그 사람, 진짜 엄청 강하냐?”
마종석은 질문에 담긴 의도를 눈치채고 미간을 구겼다.
“가서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아니, 그냥 궁금해서.”
“날 바보로 아나.”
“씁. 너무 티 났나. 그래서 얼마나 센데.”
마종석은 잠깐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내가 용병 일을 배운, 스승 같은 사람이다. 무기술의 달인이지.”
“아, 그으래?”
라세흠의 눈빛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한번 보고 싶네.”
강렬한 투기와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