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97
096화
20년 전, 임유나는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국, 가기 싫은데…….’
며칠 전, 임유나의 아버지가 당분간 미국에서 살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도우미 아줌마랑 정도 들었고, 동네 친구들도 몇 명 생겼는데 갑자기 여길 떠나라니.
임유나는 아버지에게 서운한 나머지 지금껏 말도 걸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삐진 티를 팍팍 내면서 말이다.
‘취소할 때까지 아빠랑 말 안 해야지.’
더 이상 이사 가는 것도 질렸다.
동네만 옮겨도 적응하기 힘든데, 이제는 미국이라니?
만약 가게 되면 영어도 공부해야 할 텐데, 그건 정말 싫었다.
임유나가 속으로 다짐하던 그때, 운전대를 잡고 있던 기사 아저씨가 깜짝 놀라며 중얼거렸다.
“어? 어어! 이런 씨……!”
“아저씨. 왜 그…….”
콰앙-!
.
.
임유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아윽……!”
그러다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작게 비명을 질렀다.
“아, 아저씨.”
고개를 들어 운전석을 보니, 기사 아저씨는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 몰려오는 공포에 임유나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저씨이……. 일어나 봐요.”
훌쩍이던 임유나는 이내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고 차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다.
덜컥.
“이익……!”
하지만 사고 때문인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당황한 임유나의 눈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보닛이 들어왔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빨리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덜컥. 덜컥!
“왜 안 열리는 거야…….”
다리는 아프고, 기사 아저씨는 상태가 이상하다.
다리라도 빼내 보려고 했지만, 좌석 사이에 꼈는지 당겨도 아프기만 했다.
‘누가 좀……!’
임유나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던 그때,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칠 수도 있으니 뒤로 조금만 물러나 보겠니? 얼굴은 가리고.
“네, 네…….”
그 목소리의 말대로 몸을 젖히고 팔을 들어 올리자, 쾅 소리와 함께 차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자기 들어오는 빛 때문에 눈을 찌푸린 임유나에게 한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헉……, 후. 괜찮니? 움직일 수 있겠어?”
멍하니 그를 쳐다보던 임유나가 고개를 저었다.
“다리……가 아파요.”
“뭐?”
남자는 깜짝 놀라며 임유나의 다리를 확인했다.
다행히 상처는 없는 걸 확인한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뼈는 멀쩡하구나. 다리를 빼낼 건데, 조금 아플 수도 있어. 잠깐만 참아 주겠니?”
“네. 괜찮아요…….”
“착하지……. 자. 하나, 둘!”
끼이익- 덜컥!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임유나의 다리가 빠져나왔다.
“윽.”
“잘 참았어. 위험하니 멀리 떨어지렴. 저쪽 신호등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이분도 구해 가마.”
“알았어요.”
부드럽게 말하곤 있지만, 남자의 표정이 워낙 다급해 보여 임유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절뚝이며 길가의 신호등으로 향했다.
이제 보니, 주변의 행인들이 웅성대며 사고가 난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서는 사람은 남자 한 명뿐이었다.
임유나는 무표정하게 그들을 바라보다 차로 시선을 돌렸다.
“흡……!”
남자가 입술을 깨물며 운전석에서 기사 아저씨를 끄집어내고 있었다.
차의 앞에서 어느새 불이 난 것처럼 피어오르는 검은색 연기를 보며 임유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저씨, 빨리……!”
그 순간, 차가 붉은 화염과 함께 폭발했다.
퍼엉-!
***
“다행히 주혁 씨 아버님과 기사님은 무사했지만, 폭발 때문에 화상을 입으셨다고 들었어요.”
“아…….”
어릴 때 아버지와 목욕할 때 등의 흉터에 대해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커다란 화상 자국이 있어서 궁금해해도 항상 대답해 주지 않으셨는데, 이런 사연이 있었다니.
아버지는 그때부터 위험한 상황에도 나서서 사람들을 도왔구나.
하여튼 남 일 그냥 지나치지 못하신다니까.
“그런데 얼마 전 돌아가셨다니……. 아직 감사 인사도 못 전한 게 너무 후회되네요.”
“본인 신상 숨기면서 사례는 됐다, 이랬겠죠. 항상 그러셨으니까요.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지도 그걸 원하진 않으실 거예요.”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던 임유나가 고개를 슥 들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다음에 아버님 찾아뵈러 가실 때 저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실례라니요. 아버지도 좋아하실걸요?”
“그러실까요…….”
내 말에도 임유나는 마음이 불편한지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나는 혹시 하는 마음으로 허공을 올려다봤다.
‘아버지. 거기 계세요?’
만약 날 과거로 돌려보내 준 존재가 정말 아버지라면, 지금 이 모습도 보고 계시지 않을까.
그렇다면 꼭 유나 씨의 모습을 봐 주셨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구한 아이가 이렇게 잘 컸습니다.’
같이 살던 집에 유나 씨를 데려왔다는 걸 아셨으면 날 엄청나게 놀리지 않았을까.
-이야, 아들! 네가 집에 여자친구를 데려오는 날도 오는구나!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하하. 우리 주혁이 잘 부탁드립니다!
상상만 해도 웃음이 튀어나오는 장면이었다.
‘제가 며느리로 잘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미소를 지으며 옆을 돌아보다 라세흠 부장과 눈이 마주쳤다.
“뭐, 뭐에요?!”
“허공 보면서 실실 웃고 있길래 뭔가 해서 보고 있었다.”
“깜짝 놀랐네…….”
하여튼, 분위기 깨는 데는 도사야.
“식사 나왔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유나 씨의 얘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주문한 라면이 나왔다.
치즈, 크림……. 이런 허연 것들만 보다가 달걀이 둥둥 떠 있는 새빨간 국물을 보니 벌써 속이 편안해지는 기분이다.
면도 꼬들꼬들한 게, 아주 내 취향이구만.
달걀을 풀지 않는 센스까지. 마음에 들어.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먹읍시다.”
후루룩-!
“크으…….”
이 매콤짭짤한 맛이 그리웠다.
그릇을 들어 뜨끈한 국물을 내 배 속에 집어넣었다.
꿀꺽!
“아, 이거지. 이거야.”
“라면을 자주 먹는 편은 아닌데…… 확실히 타지 음식만 먹다 보니까 정말 맛있게 느껴지네요.”
“그렇죠?”
나는 좌석 너머로 우재성을 힐끔 돌아봤다.
“?”
스테이크를 우아하게 썰던 우재성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 겁니까.”
“그런 눈이라뇨. 그냥 본 겁니다.”
우재성은 시선을 돌려 가니쉬를 찍어 먹었다.
나는 이 녀석을 일단 어디 투입해야 하나 생각했다.
우선 고생하고 있을 난쟁이 밑에 붙이긴 할 건데, 과연 자존심 강한 우재성이 얌전히 있을까?
능력이 있다고 위로 올려 버리면 난쟁이 기가 죽을 테고, 그렇다고 밑으로 넣으면 둘의 트러블이 문제다.
“흠…….”
뭐, 이건 나중에 생각하고.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건 돈 귀신들과 서해결 검사다.
돈 귀신들은 GPS를 달아 놨으니 큰 걱정은 없긴 한데…….
문제는 서해결 검사였다.
한국에 있는 애들한테 들어 보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요새 내 뒤를 캐고 있단다.
오해가 있으면 해명하고, 날 보내 버리려는 거면 대비를 해야겠다.
“쯧.”
편 먹기 참 힘든 양반이네.
한국에 들어가서 일단 서해결 검사를 만나 봐야겠어.
***
“감사합니다.”
“예. 조심히 가십시오.”
저벅.
서해결 검사는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SA시큐리티 본사 건물을 나섰다.
‘사무실에도 없나.’
일을 마치고 이주혁과 만나기 위해 들렀지만, 출장 때문에 부재중이라는 말만 듣고 얻은 소득은 없었다.
“후…….”
사실 이 건에 대해 그만 파야 하나 고민했다.
현재 이주혁은 강남파 축출에 도움이 되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몰라도 서해결 검사와 가는 길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순 없었다.
현재 추정되는 이주혁의 자금은, 한창 성장하던 시기의 강남파와 거의 엇비슷했다.
만약 이주혁이 강남파와 뜻을 같이하고 있거나, 제2의 강남파가 되기 위해 움직인다면…….
‘강남파를 뿌리 뽑아도 의미가 없어.’
게다가 이주혁은 강남파와는 달리 합법적으로 서울 내의 영향력을 늘리고 있다.
서해결 검사는 뭐든지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다스토리를 금지한 건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배성복 서장을 구속한 건 그가 죄를 저질렀다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그리고 서해결 검사는 지금 이주혁과 함께해도 되는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우웅-.
[김 사무관]‘부탁한 게 나왔나.’
전화를 받자, 지검 사무관의 피로에 전 목소리가 들렸다.
-검사님. 출국 기록 조회 결과 나왔습니다. 이주혁 씨 지금 미국으로 출국한 상태입니다.
“미국?”
하도 안 보여서 어디로 갔나 했는데, 그 먼 땅에 있었나.
-그리고 추가로 말씀하신 임유나 씨의 목적지도 같았습니다.
서해결 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둘은 이유는 몰라도 같이 한국을 떴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야근이었거든요.
“아…….”
-검사님은 요새 일찍 퇴근하시던데, 혹시 애인이라도 생기셨습니까?
“그, 그럴 리가요. 그럼, 고생해요.”
-네. 내일 뵙겠습니다.
뚝.
“후…….”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어. 왜, 한결아.”
-여보세요. 차 안이야?
“응. 한 시간 전에 퇴근했어.”
그 말에 서한결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퇴근을 했어? 부럽네……. 요새 우리 존나게 바쁘다.
“바쁘다고? 강남파 때문에?”
-응.
한숨을 푹 내쉰 서한결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새로 부임한 서장이 강남파 수사에 더 집중하라면서 쪼아 댄다. 그거 때문에 좀 늦었어.
“서장이라면…… 박민구?”
-어. 실적만 보면 눈에 불이 켜지던 양반이라 그런가, 지는 하는 것도 없으면서 우리만 굴린다니까.
“흠…….”
주철수 및 강남파 잔당의 체포.
박민구 서장이 그 일을 강력하게 진행한다라.
‘그런 쪽에 관심 있는 사람인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박민구 서장에게 시선을 돌리기엔 이 일부터 마무리할 필요가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다.”
-퇴근은 글렀지. 그래도 조만간 좋은 소식 있을 거 같긴 해. 가닥이 잡히고 있거든.
“그래? 다행이네.”
-아, 딴 얘기로 빠졌네. 그거 때문에 연락한 거야.
“음?”
서한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요새 대대적으로 강남파 놈들 수사하느라 그런 건지, 뒷골목 분위기가 흉흉하더라고.
“그렇긴 하지.”
그의 말대로,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으슥한 골목 안에 모여 있는 무리가 보이곤 했다.
-아직도 이주혁 씨 조사한다면서? 용의자도 아닌데. 중요한 거 아니면 적당히 하고, 밤길 조심해.
“그래야지.”
-슬슬 들어가. 특히 형은 몸도 말랐는데 검사 티도 안 내고 다녀서 더 위험하다니까.
뭔가 말이 이상했지만, 어쨌든 걱정하는 말이다.
서해결 검사는 동생의 말에 피식 웃었다.
“알았어. 나도 곧 들어가려고 했어.”
-오케이. 그럼 난 슬 가 볼게. 나중에 조카들이나 좀 봐줘. 얼마나 활발한지, 밤마다 죽을 맛이야.
“힘내라. 주말이나 해서 너희 가족이랑 한번 보자.”
-좋지. 연락해.
“그래.”
전화를 끊은 서해결 검사는 차를 세웠다.
그리고 거치대에서 핸드폰을 꺼낸 뒤 내려 눈앞의 주택을 훑어봤다.
‘여기가 이주혁 씨 집인가…….’
혹시 여기 있을까 해서 찾아왔는데, 미국에 있을 줄은 몰랐다.
‘정말 여행을 갔다고?’
서해결 검사는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차에 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 골목 안의 누군가와 눈을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뭐지?’
서해결 검사는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탄 뒤 문부터 잠갔다.
이어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키려는 순간.
“……!”
바깥에서 차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벙거지를 눌러 쓴 음울한 표정의 중년 남자였다.
서해결 검사는 기절할 정도로 놀랐지만, 애써 가슴을 진정시키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냥 지나가지 않고 운전석의 창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무슨…….’
어딘가 섬뜩한 상황에, 서해결 검사는 그를 무시하고 액셀을 밟으려고 했다.
그 순간, 남자가 팔꿈치로 창문을 깨부쉈다.
쨍그랑-!
“으악……!”
튀는 유리 파편에 서해결 검사가 얼굴을 가리는 사이, 남자는 창문 안으로 손을 넣어 잠금을 풀어 버렸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서해결 검사의 말에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운전석에서 끌어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쿠당탕!
“윽.”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서해결 검사를 어느새 나타난 다섯 명의 남자가 둘러쌌다.
“…….”
그중 안경을 쓴 중년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물었다.
“이 집 주인이랑 아는 사이니?”
“대답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뭐, 말하게 될 기다. 같이 가자.”
서해결 검사는 자신의 직업을 방패로 당당하게 나섰다.
“나 대한민국 검삽니다. 이렇게 건드리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아, 검사?”
안경 중년은 비웃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손짓했다.
“그럼 같이 갑시다. 검사 양반.”
이번 생은 빌런이다
지은이 : 글빌런
발행인 : 손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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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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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949-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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