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egal Alien Cult RAW novel - Chapter 589
590 – 축제. 시간. 꿈. # 1
엘프리데가 빛나는 두 개의 달 빛 아래 말했다.
자신의 행복한 결말에 나를 넣어주겠다고.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장면을, 얼마 없는 페이지를 너에게 할당해 주겠다는 거야. 영광스럽게 생각해도 좋아.”
“….”
무슨 말로 대답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무척 기쁘고, 또 부끄러우면서도 낯설었으니까.
어둡고 추운 밤의 서늘한 공기가,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는 화롯불이, 엘프리데의 얼굴에 신묘한 음영을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내 마음을 뒤 흔들어서 말들을 잊게 만든다.
동화 속의 완벽한 남자들이라면 이런 때에도 척척 멋진 대사로 답변하겠건만.
엘프리데의 말대로 나는 멋진 왕자님은 절대 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사람 부끄럽게,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봐.”
“어….”
엘프리데의 재촉에 나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러나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것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 웃는 요정 엘프리데.
“역시 넌 왕자가 되기는 글렀다. 아무 말이든 좋으니, 멋진 말이라도 해야지.”
“그, 뭐냐. 그래도, 무척 감동 받았어. 고맙다고 생각해. 네 중요한 장면에 날 끼워 넣어 주는 거.”
“그게 뭐야. 그래도, 뭐, 애초에 기대치가 낮았으니까 그럭저럭 합격점을 줄게.”
“고맙다, 야.”
“아무튼, 여기 일은, 모두에게는 비밀로 해. 루나에게도, 히폴리테에게도, 시끄러운 요정 패러노이에게도.”
“그래.”
“모두와 함께 있는 것도 좋지만. 너랑 나만의 비밀 하나 정도는 있어도 되잖아. 그래도, 너랑 내가 제일 오래 알고 지냈는데.”
“그렇지. 이제 거의 3년째니까.”
“3년인가-. 천 일. 벌써 그렇게 됐네.”
엘프리데의 회상이 입김이 되어 뿜어졌다. 하얗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입김을 엘프리데가 계속해서 내뱉는다.
“핫산, 너와 내가 다른 식으로 만났더라면. 우리의 관계는 지금과 달랐을까? 내가 하얀 머리의 엘프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글쎄…. 그런데 엘프리데. 가정하는 건 좋지 않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어?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있다는 게 중요한 거라고 했잖아.”
“그건 그래. 지금 순간이 중요한 거지. 너와, 나. 이렇게 다른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이. 이 자리에서 둘 만이 남게 된 이 순간-.”
엘프리데의 말에 나는 우리의 만남과 그 모든 인연들이 기적 같다고 생각 되었다.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아왔던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헤어지고, 재회하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되는 걸까.
만약 다시금 기회가 주어져서, 과거로 돌아가 우리들의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우리들의 최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숱하게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을 헤집고 있을 때, 엘프리데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래서-. 언제 해줄 거야-.”
“해줘-?”
“키스 말이야, 멍청아. 지금 내 삶에서 엄청 중요한 장면이라고 했잖아. 이런 장면에는, 입맞춤이 있어야 한다니까.”
“아-.”
부끄럽구만.
나는 엘프리데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곧 엘프리데의 몸이 추위 때문인지 혹은 그것도 아니면 여러 복합적인 감정 때문인지 작게 떨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녀석은 울고 있었다.
“핫산, 우리들의 만남은, 정말 이게 최선이었을까? 서로를 못살게 굴고, 폭언하고. 욕설과 폭력을 반복하고. 그런 기억밖에 없어.”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닦는 엘프리데. 엘프리데 또한 이 묘한 밤의 마력에 감정이 북받쳤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녀석의 눈물을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닦아줬다.
“멍청아, 다른 좋은 기억들은, 이제부터 만들면 되는 거야. 너는 긴 수명의 요정이고, 나는 무한한 삶을 사는 신이니까.”
“신-.”
“그래. 우리들의 과거가 까마득한 세월로 뒤덮여서, 잊혀질 만큼-.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잔뜩 그려서, 힘들었던 시간들을 뒤덮는 거야.”
“핫산 주제에, 나름 멋있는 말 했네. 그렇지만 역시 키스는 못하겠다. 나 얼굴, 눈물로 완전 엉망이고.”
그렇게 말하며 엘프리데는 내게서 두 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내가 울어서, 중요한 장면을 망쳐버렸네. 원래, 나는 눈물 같은 거 잘 안 흘리는데. 그냥 좀, 싱숭생숭했어.”
“….”
눈물을 흘리는 엘프리데는 무척 예뻤지만.
아무리 연인에게라도 예쁘다는 말을 쉽게 할 만큼 나는 신경이 두껍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이 말 만큼은 하고 싶었다.
“엘프리데, 나는 지금의 널 좋아해. 앞으로도 좋아할 거야.”
“뭐래-. 겨우 좋아하는 것 뿐?”
살짝 코가 맹맹해진 소리로 퉁명스레 답한 엘프리데. 녀석이 손수건으로 얼굴을 마저 닦아내며 한 마디 덧붙였다.
“그렇다고 치고, 그럼 내 어떤 점이 좋은데.”
“…글쎄, 폭력적인 점. 그렇지만, 뒤로는 이렇게 눈물도 흘릴 줄 안다는 점. 몰라-. 그냥 좋으니까 좋은 거지.”
“누구를, 울보로 알고 있네. 이제 네 앞에서 울 일 없어.”
엘프리데는 코를 픽-풀어낸 뒤에 손수건을 불태웠다.
그리고는, 쓰레기장에 널브러져 있는 모든 잡동사니와 엘프리데 자신이 그려냈다는 과거의 그림들을 전부 불로 지져서 태워버렸다.
내가 물었다.
“지워도 되겠어? 나름 추억들 아니야?”
“앞으로, 길고 긴 미래들을 그릴 거라며. 그럼, 예전 기록들은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것들을 그려야지. 핫산, 단검 좀 줘봐.”
내게 허리춤의 단검을 요구하는 엘프리데.
그것을 뽑아 녀석에게 건네자, 엘프리데는 그것으로 까맣게 그을린 쓰레기장의 벽에 그림을 새겨 넣었다.
스슥, 파스슥, 스스슥-.
그 내용을 보며 나는 웃었다.
“내가 그렇게 할 거 같아?”
“하게 될 걸. 이 그림처럼, 엘프리데 님을 사랑한다고. 모두의 앞에서 고백하게 될 거야. 이건, 나의 예언이야.”
“그렇구만. 이뤄질지 어떨지 지켜봐야겠네.”
그것으로 엘프리데와 나의 야간 데이트는 끝이 났다.
서로의 방으로 돌아가며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잡고 있다가-.
방문 앞에서 아쉬운 듯이 놓았을 뿐.
“다 왔네.”
“그러게.”
“내일은, 축제 때문에 바쁘지 너-?”
“그렇겠지. 바쁠 거야. 많이. 그럼-.”
엘프리데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한다.
“아-. 손수건 태워서 미안. 대신, 나중에 네가 울고 싶을 때, 내 가슴을 빌려줄 테니까 거기서 울어.”
아까 자신이 코를 풀고 태워버린 손수건이 신경 쓰인 듯하다.
다만 나는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내가 울 일이 뭐가 있겠어.”
“하긴, 아무리 괴롭히고 때려도, 너는 전혀 눈물하나 보이지 않았지. 겁쟁이에 울보일 것 같았는데.”
“남자는 우는 거 아니라고 그랬거든.”
“그래-?”
“그래.”
“그렇구나.”
그런 나른한 대답을 끝으로 엘프리데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방문 앞에서 한참 서성거리다가, 이내 녀석이 잠들어 새근새근 내는 숨소리가 들린 이후에야 나의 방으로 돌아갔다.
* * *
세계수를 불태우는 것으로 어째서 저승의 문이 열리는가.
그것은 세계수의 가지와 뿌리가 온갖 세계를 향해 뻗어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계수가 불타며 만들어내는 마력과 공간의 그을림 같은 것이, 뿌리와 가지에 연결되어 있는 세상을 비틀어 입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나.
자세한 원리 같은 것을 설명해주었으나 그냥 그렇구나-라는 정도로만 이해하게 됐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고대하고 있던 축제의 날이 밝았고.
오늘 밤, 두 개의 달이 교차하는 순간에 엘프리데가 큰 불을 피워 올려 세계수의 줄기를 태우는 것이었으니까.
“나무를 전부 불태우는 건 아니었구나-!”
축제의 설명을 들은 루나가 감탄했다.
“나는 이 거대한 나무를 전부 불태우는 건 줄 알았는데-!”
그 말에 답하는 패러노이.
“이 거대한 님프 친화적인 나무는, 심장부처럼 하나의 중심이 되는 줄기가 나무 전체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입니닷…! 그 줄기만을 태우면, 나무 전체가 죽게 되는 것입니닷….”
패러노이는 이 세계수가 무척 마음에든 듯했다.
“아마도 서서히 죽어갈 것입니닷…. 이렇게나 멋진 나무를 죽여야만 한다니, 아쉬운 것입니닷….”
그러나 오늘 이 거대한 나무의 수명도 끝이다. 엘프들의 신전 회랑, 그 중심에 놓여 있는 예언의 줄기를 엘프리데가 불태운다.
그것으로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나무의 수명은 끝이 날 것이고.
거기서 발생한 에너지가 알브하임의 저승, 더 나아가 혼돈의 영역으로 향하는 ‘문’을 열게 될 터.
그 문을 넘어서서.
나는 내 나름대로의 진실을 마주해 결말을 낸다.
그게 내 계획이었다.
그러나 히폴리테와 글로리아는 상당히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이렇게나 거대한 나무를 죽인다니. 그 여파가 어디까지 뻗을지 상상이 되질 않는군. 우리가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저승의 문을 연다는 것도 좀 그래. 거긴 문지기도 없다며. 그럼, 그 헬하임이라는 곳에서 바깥으로 열린 문으로 넘어오려는 녀석들도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녀들의 신중론은 일리가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그것에 하얗고 펑퍼짐한 옷을 입은 엘프리데가 답해준다.
“그래서 이 중심 줄기만을 태우는 거야. 여파를 최소화 하고, 안쪽에서 바깥으로 넘어올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문만을 열려는 거니까.”
엘프리데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듬직하기 짝이 없다.
그리하여 두근거리는 긴장감의 시간을 보내-.
저녁이 되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정말 두 개의 달이 하나로 겹쳐져서 마치 지구에서 올려다보는 밤하늘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커다랗고 밝은 보름달 아래.
밀알이 가득 달린 짚단을 쥔 엘프리데가 횃불이 켜진 신전으로 행차한다.
그 주변을 감싼 이들은 모두 흥분과 긴장으로 떠들썩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둥두둥-하고 북치는 소리와 신묘한 풀피리 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우는 가운데에-.
촤르르, 촤르르르-.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밀알 다발을 흔들며 엘프리데가 말했다.
“긴 세월의 방랑자들아-. 오늘을 기뻐하라-. 긴 겨울에 버려진 자들아-. 어두운 그늘처럼 황량한 시간 아래 숨어 있던 자들아-.”
화륵-.
힘 있는 목소리와 함께 엘프리데의 손에 들린 다발에 불길이 붙었다. 불꽃의 부케를 든 엘프리데가 계속해서 주문을 읊는다.
“차가운 눈발 아래 숨어 있던 씨앗이-. 뿌리를 내딛고 고개를 뻗을 때가 온다-. 얼음은 녹고-. 웅크린 대지와 샘물이 녹아 따스한 강을 흘려 내리리니-.”
화르르-.
엘프리데의 손에 붙은 불꽃이 더욱 크고 강렬한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람 크기보다 몇 배는 길고 커다란 검의 형태를 띄었다.
그 뜨거운 불길에 주변에 몰린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가린다.
너구리 가죽을 깊게 눌러쓰는 글로리아.
“멀리서 보고만 있는데도,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네. 강렬한 불꽃이야. 저것을 맞추기만 한다면, 하이포스의 신들마저 소멸시킬 수 있겠어.”
실제로 엘프리데의 저 불꽃 검은 신의 육체를 두동각 내다 못해 타르타로스의 절반을 갈라버렸던 전적이 있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세계수를 가르는 데에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을 테지.
━종막의 검, 수르트.
엘프들의 예언에 따르면, 세계수의 몸을 불태우고 완전한 황혼과 동시에 여명을 불러온다는 불꽃이라나.
그러한 불꽃이 요정의 형태로 살아 움직이는 것.
그것이 바로 엘프리데의 정체였다.
지금 엘프리데는 요정의 모습을 한 불꽃 그 자체인 것이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세계수를 불태우기 위해 존재했던 불꽃.
이번 일이 끝나면, 그녀는 어쩌면 힘을 잃고 평범한 소녀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었지. 그 날이 오기를 바라며 나는 주먹을 쥐었다.
화르르르르-.
엘프리데는 불타오르는 검을 두 손 높이 들어올렸다.
이대로 저것을 내려쳐 줄기를 가르기만 하면 되는 일.
그러나, 엘프리데의 손은 쉬이 움직이질 않고 마치 못으로 고정된 것처럼 멈췄다. 루나는 그 모습을 보며 “왜 내려치지 않지?”라고 의아함을 느끼는 듯했지만.
나는 엘프리데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 망설이고 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엘프리데가 망설일 이유가 뭐가 있지?
“후-.”
엘프리데는 곧 깊은 심호흡을 내뱉었다.
“오랜 시간에 지나간 따스한 봄날이여,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아름다운 미래여. 거대한 나무를 장작삼아, 강렬한 불꽃처럼-. 내려쬐는 햇살과 함께 오라-.”
그리고는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을 위에서 아래로, 크게 호를 그어 내려쳤다.
스으으윽-!
불꽃의 검은 마치 사람의 배를 가르는 날카로운 메스처럼 줄기의 겉 표면에 반으로 상처를 냈다.
동시에-.
촤아아아아아-.
엘프리데의 하얀 옷이 붉은 액체로 물든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다만, 나의 머릿속과 눈앞은 새하얗고,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누가 등을 떠 밀은 것처럼 달려가서, 바닥으로 무너져 내린 엘프리데의 어깨를 붙들자, 녀석이 입가에서 피를 토해내며 미간을 찌푸린다.
“핫산, 왜 이렇게 죽상이야-. 얼굴 펴-. 누가, 못된 귀쟁이가, 채찍으로 괴롭히기라도, 했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왜 네가 상처를….”
“별 거 아냐. 별 일 아닌 거야-. 호들갑 떨 거 없어. 원래 이렇게 되는 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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