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143
46 테러, 테러, 테러 (5)
“굳이 우리가 잡은 인질 중에서 몇 명을 갖고 가겠다고?”
바로 경계심 섞인 말이 돌아오는군. 이것까지 예상했던 바다.
“말씀드렸다시피 여러분의 손을 탄 기념품을 갖고 싶어서 말이에요.”
“기념품이라.”
겉으로 보면 내 말을 영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듯하지만, 들어줄 거다. 내가 이렇게 자신만만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놈들을 만났을 때부터, 나는 놈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탑의 빌런들에게 무한한 호감을 품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내 거짓말은…….
딸깍, 하며 떨어지는 허공의 자물쇠를 보며 나는 가면 안에서 미소 지었다. 역시 이런 놈들에게는 이런 거짓말이 기가 막히게 잘 먹힌다니까.
“뭐, 정말로 우리를 좋아하는 모양이군. 이런 별 볼 일 없는 기념품까지 원할 정도로.”
트릭스터는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좋아, 하지만 저놈은 안 돼.”
역시 차송진은 바로 빼돌리는군.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여기까지 모두 내가 예상한 대로니까.
“네, 좋습니다. 뭐, 저놈이 취향이라면.”
“그런 취향 아니거든!”
내 말에 조립가는 곧바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농담인데, 화를 내기는. 영 놀리는 재미는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몇 명을 골라냈다. 정신을 반쯤 놓은 이들은 내 지목에도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몇 사람을 짚은 나는 빌런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저놈들은 잘 써먹도록 하죠.”
말뿐이다. 정말로 저 사람들을 실험체로 써먹을 일은 없다. 한서현에게 실험체가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나쁜 놈으로만 잘 수급하고 있단 말이지.
불행히도 내 말을 들은 누구 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인질을 챙기는 내게 제미니가 말했다.
“다음에는 우리 탑에 놀러 오기도 해 봐.”
“오, 뭐야.”
그렇게 말한 제미니는 주변의 놀림에도 꿋꿋하게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네가 그다지 싫지 않으니까. 이번 사건도 아주 잘 봤거든!”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러 놓고, 잘도 저런 말을 하는군.
확실히 수백 명의 사람을 죽여 놓고 내뱉을 만한 말은 아니긴 하지.
‘뭐, 이 사람들에게는 그게 나쁜 짓이라는 자각이 전혀 없을 테니까요.’
반성이라는 것도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나빴는지를 자각하고 난 다음에야 가능하다.
이들의 사고 회로는 이미 망가진 지 오래였다. 후회 같은 걸 할 수가 없는 인간들이라는 거다.
“나중에 꼭 뵙도록 하죠.”
그렇게 말한 나는 손가락으로 툭툭 허벅지를 두드렸다.
이건 신호다.
건물들의 틈 사이를 파고들어 온 검은 모래가 우리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일에 빌런들이 이를 드러냈다. 세 사람은 곧장 나를 의심했다. 하지만 소리를 지르는 건 내가 더 빨랐다.
“뭐, 뭡니까?”
“뭐?”
“이 모래, 모래 말입니다!”
자고로 이런 일은 먼저 호들갑을 떠는 쪽이 이긴단 말이지. 나는 진지하게 세 사람을 향해 외쳤다.
“지금 저를 공격하는 겁니까?”
내 말에 빌런 셋은 벙찐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이 모래는 네놈 짓…….”
“이런, 세 분을 믿었는데! 제가 싫으면 싫다고 말씀을 하시지!”
내 말에 세 명의 빌런은 동시에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우리가 한 게 아니라니까!”
“맞아! 애, 애초에 우리 중에 모래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그러는 네 녀석이야말로 흙을 다룰 수 있지 않나?”
어……, 내가 흙을 다룬다는 걸 어떻게 알았담. 하지만 당황스러운 티를 내면 안 된다.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저는 흑마력을 다루지 못한단 말입니다! 저 모래를 움직이고 있는 건 흑마력이지 않습니까?”
물론 흑마력을 다룰 수 있는 건 벨츠머츠의 구성원인 한서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서현이 모래를 다룰 수 있다는 건, 아직은 밝혀지지 않은 비밀이란 말이지.
━나중에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건 나중에 생각해야죠.’
━하여간 대책이 있는 듯 없는 놈이라니까.
어쨌거나 당장 혐의를 벗는 게 중요하다.
나는 과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세 분도 아니라면 그럼 누가?”
그렇게 말한 나는 시선을 슬쩍 옆으로 돌렸다. 내 시선을 따라 시선을 돌린 세 명의 빌런이 입을 벌렸다.
모래 너머에 등장한 ‘스미스’를 그제야 발견한 거다.
“저놈!”
그 얼굴을 확인한 셋의 반응이 격렬했다.
나는 그사이에 재빨리 외쳤다.
“이런, 저는 여기에서 빠지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또 뵙도록 하죠. 부디 세 분 다 무사하시길!”
어그로가 스미스에게 쏠려 있을 때를 이용해 나는 인질 한 명의 손을 꽉 붙들었다.
세 사람은 나를 보며 무어라 말을 뱉으려 했지만, 스미스(?)가 빨랐다. 그의 손짓에 따라 검은 모래가 그들을 덮쳤다.
세 빌런이 검은 모래에 둘러싸인 사이, 나는 인질을 끌어당겼다. 인질은 나에게 잡히자마자 나를 밀쳐 내려는 듯 반항했다.
발버둥을 치는 남자의 귓가에 내가 속삭였다.
“여기서 도망가기 싫어?”
제 얼굴이 아닌 가면을 뒤집어쓴 남자는 덜덜 떨며 나를 바라보았다.
“다, 당신이었어?”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라서 실망했나?”
“미, 미친.”
김춘태, 아니, 차송진.
나는 녀석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나로 만족하라고.”
나는 놈의 등을 두드렸다. 적들의 시야를 모두 차단한 검은 모래는 나에겐 흔쾌히 길을 열어 주었다. 그 길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간 나는 한서현에게 두 번째 신호를 보냈다.
지금쯤 유리창에는 유선제와 내가 정해 둔 암호가 떠올라 있을 거다.
그리고 그 암호를 본 유선제가 취할 행동은 간단했다.
전면 유리창이 박살 나는 것과 동시에 번쩍, 사방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번개가 튀었다.
* * *
안으로 들어선 유선제는 곧바로 트릭스터부터 견제했다.
그의 환상에 다시 놀아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번개가 트릭스터에게 곧바로 내리꽂혔다. 트릭스터는 재빨리 몸을 굴렀지만, 번개는 그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따라갔다.
“크읏!”
몸에 두른 아티팩트로 위력을 반감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머리털 끝이 쭈뼛 서는 고통이었다.
“너, 이 자식!”
유선제의 등장에 세 빌런은 곧바로 마력부터 끌어올렸다. 제미니의 마력은 곧장 주변을 불태울 불꽃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힐끗, 유선제는 인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강이신이 말한 대로 모래로 만들어진 벽이 불꽃을 차단해 인질을 보호하고 있었다.
평소에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모를 놈이지만, 확실히 쓸 만했다.
자신의 인생에 위험한 일이 생길 때마다 튀어나와 자신을 돕다니. 자신을 늘 보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참 나, 내 걱정 같은 건 안 한다더니.’
역시 말이랑 행동이랑 따로 노는 놈이었다.
유선제는 번개로 세 빌런을 정신없이 몰아쳤다.
그때, 유선제의 뒤에서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이거야, 원. 혼자서 너무 다 하시는 거 아닙니까?”
누구였었지. 이름도 모를 녀석이다. 유선제는 곧바로 그 녀석에게 시선을 뗐다. 뒤에서 무어라 말을 건네는 것 같았지만, 유선제는 무시하고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놈의 얼굴이 구겨지는 걸 봤음에도 유선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유선제의 신경은 오조리 눈앞에 있는 세 빌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모든 게 다 끝난 것처럼 조용해 보이지만, 아직 그들의 마력은 그대로였다. 아니나 다를까, 유선제의 예상대로 반격이 시작되었다.
“다, 죽일, 죽일 거야.”
제미니의 손끝에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닿기만 하면 모든 게 녹아 버릴 정도의 고온이었다.
트릭스터는 환영을 짜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몰아치는 번개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살갗이 타들어 가고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 세 빌런은 비명을 내질렀다.
“젠장.”
상황은 탑의 빌런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수많은 헌터 중 오직 유선제만 들이닥쳤는데도 이 꼴이다.
이 좁은 곳에서 번개술사와 싸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푸른 빛과 흰색의 빛으로 일렁이는 동공을 본 트릭스터가 입가를 비틀었다.
탑의 빌런들은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하지만 온 세상의 축복을 다 받고 태어난 것 같은 저런 놈들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제미니의 불꽃 또한 치명적이긴 마찬가지였으나, 전장이 좁아질수록 힘든 건 빌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까지 태워 죽일 셈이야?”
조립가의 짜증에 제미니가 이를 악물었다.
“적당히 피하면 되잖아!”
“여기에서 어떻게 피하라고!”
능력을 쓰려면 적들에게 어쩔 수 없이 접근해야 하는 그와 제미니의 능력은 상성이 좋지 않았다.
평소에는 각자 구역을 정해 싸웠지만, 좁은 백화점 내부는 그들에게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안 되겠다.”
튀어야지.
세 사람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굳이 이런 불리한 곳에서 저런 괴물과 싸워 줄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곧 세 사람은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뭐, 뭐야.”
그들이 유선제를 신경 쓰는 동안에, 그들의 탈출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는 걸.
“없어.”
“뭐?”
“안 보인다고!”
이곳에서 빠져나갈 길은 막혀 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잔뜩 열이 받은 시리우스의 1군이 있었다.
“X발.”
트릭스터는 깨달았다.
그들은 정말로 X 돼 버리고 만 것이다.
* * *
나와 함께 밖으로 나온 차송진은 이 모든 일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송진을 빼돌린 방법은 간단하다.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은 아무런 기능이 없는, 겉모습만 그럴싸한 가짜다. 나는 한서현의 도움을 받아 얼굴을 바꿀 수 있는 기능이 있는 가면 두 개를 미리 안으로 보냈다.
그중 하나는 차송진이, 나머지 하나는 모래 속에 섞여 들어간 스켈레톤이 뒤집어썼다.
스켈레톤이 차송진의 얼굴을 흉내 낸 가면을 뒤집어쓴 사이, 차송진은 ‘다른 얼굴’을 뒤집어썼다.
내가 자주 사용했던, 30대 남성의 얼굴이다. 그 인파 속에서도 내가 차송진을 쉽게 골라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내가 인질을 기념품으로 요구했을 때, 빌런들이 확인한 차송진은 진짜가 아니었다.
피부 위에 얹은 게 아니라 뼈다귀 위에 얹은 것이라 조금 더 자세히 스켈레톤을 살펴보았다면 이상한 점을 알았겠지만, 그때 놈들의 신경은 모두 나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고 나의 ‘거짓말’까지.
놈들을 속여 넘기는 데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애초에 그들은 차송진에게 그 어떤 관심도 가지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검은 모래가 등장했을 때, 스켈레톤의 가면을 스미스의 얼굴로 바꾸는 것만으로 나는 그 세 사람의 어그로를 완벽히 끄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유선제를 포함한 시리우스의 헌터들에게 모든 걸 떠넘기고 유유히 탈출.
스켈레톤은 적당히 유선제에게 시선이 끌린 사이에 역소환하고 잡혀 있던 인질들은 한서현의 모래로 빼돌린다는 작전이었다.
‘그 직전에 난입한 나를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어그로는 ‘스미스’와 유선제에게로 끌린 상황이다. 벨츠머츠로서 나는 이 일과 관계가 없다고 계속해서 잡아뗄 생각이었다.
‘차송진이 사라진 것도 내 짓이라고 의심하기는 힘들겠지.’
감정적으로는 나를 의심할 수 있겠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차송진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그보다는 차송진이 혼란을 틈타 스스로 도망쳤다고 생각하는 게 편할 거야.’
고로 차송진을 원망하면 원망했지, 나까지 원망할 일은 없다는 거다.
굳이 이기기도 힘든 상대와 싸울 필요가 있나. 이런 식으로 내가 원하던 것만 쏘옥 빼서 빠질 수도 있는데 말이다.
입구에 서 있던 사람들이 모래에 휩싸인 인질들이 나오는 걸 보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이 모래는 뭐야?”
“사람, 사람이 이 안에 있습니다! 아, 아마 저 안에 있던 인질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뭐? 당장 인질들 상태 확인해!”
나는 그 소란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자아,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다.
백화점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제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제14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