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275
74 그걸 저희한테요? (2)
내 인사에 백도산은 입가를 씩 올린 채로 내 얼굴을 훑어보았다.
뭐야, 저 눈빛은.
“얼굴을 보니 그동안 아주 잘 지낸 것 같네.”
“못 지낼 것도 없어서요.”
“뉴스만 들으면, 아주 죽일 놈이 돼 있어서 말이야.”
“그나저나 추운데 여기에 계속 세워 둘 겁니까?”
“최상급 아머리의 코트를 걸치고도 추위를 느끼는 줄은 몰랐네.”
짧은 사이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튄 대화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백도산은 나를…….
엄청나게 미워하고 있다!
━친구를 뺏겨서 질투라도 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귀엽게 표현하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우리 둘 사이에 오가던 날카로운 분위기도 잠시, 백도산의 옆으로 어리바리해 보이는 사람이 끼어들었다.
“이, 이분이 그분입니까?”
내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남자가 대뜸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제발 저, 절 좀 도와주십쇼!”
순간 우리 둘 사이에 맴돌던 긴장감은 유리창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남자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쉰 백도산은 직접 몸을 숙여 그를 일으켰다.
“최 사장님, 일어나세요.”
최 사장이라고 불린 남자는 50대 중반의 작은 키, 반쯤 벗겨진 머리와 통통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의 행색을 훑었다. 그의 옷은 분명 고급 브랜드의 것이었으나, 맞춘 지 오래된 듯 낡은 티가 났다. 시계 또한 유명 명품 브랜드의 것이었지만 나온 지 십여 년은 지난 것이었고.
엄청난 구두쇠거나, 아니면 과거에는 부유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못한 상황이 됐다는 뜻이다.
이 남자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
“그, 안녕하십니까! 제 이름은 최철곤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뵙는 게 무례한 일임을 알고는 있지만, 제 사정이 급해 이렇게 염치 불고하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남자의 깍듯한 사과는 나를 더 당황하게만 할 뿐이었다.
오늘 내가 이곳에 온 것이, 백도산도, 중국의 은월회도 아니라 이 남자 때문이라고? 나는 백도산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 남자의 말이 맞냐는 듯이.
백도산은 내 시선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정말 이 남자 때문에 나를 부른 게 맞단 말이지. 대체 이 남자가 누구길래? 어떤 사연을 가졌길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지.”
백도산의 말에 나는 그를 흘겨봤다. 조금 전에 내가 계속 세워 둘 거냐고 물었을 때에는 꿈쩍도 안 하더니. 하지만 이해가 됐다. 아티팩트를 두른 우리와 가오로 추위를 이겨 낸 백도산과는 달리 최 사장의 볼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파랗게 질렸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저 사람이 누구길래 나를 이런 식으로 불러야 했던 건지.
내게서 떨떠름한 기색을 읽었기 때문인지,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백도산이 내게 사과를 건넸다.
“원래대로라면 그쪽에 양해를 먼저 구하고 상황을 설명하고 의뢰를 맡기는 과정을 거쳐야 했겠지만 말이야, 워낙 상황이 급박해서.”
“그래서 그 급하다는 사정이 뭡니까?”
일단은 이야기를 듣고 판단할 문제다.
“제 딸이 납치되었습니다. 제, 제발 제 딸을 구해 주세요.”
그 말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니까 우리한테 누군가를 납치해 달라고 사주하는 게 아니라, 납치당한 사람을 구해 달라고 의뢰를 한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이분 딸을 데려간 사람이, 중국의 갱단이야. 은월회와는 척지고 있는 곳이고. 개인의 일이 아니라 은월회의 일이기도 해.”
백도산의 말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그 딸이라는 사람이 누구길래?”
“은월회에서 통칭 메이커로 통하는 사람. 쉽게 말해 마약을 제조하고, 개발하는 역할을 맡았던 브레인이지.”
나는 그 말에 눈앞에 있는 최 사장의 모습을 다시 한번 눈으로 훑었다. 아무리 봐도 그냥 좀 과거에 여유가 있다가 쫄딱 망한 중소기업 사장으로 보이는 이 남자의 딸이 그런 어마무시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사, 사정이 있습니다.”
내 의심 섞인 눈빛을 알아챈 것인지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남자는 젊은 시절 패기가 넘쳤다고 했다.
부모로부터 막대하다고까지는 말하지 못하지만 제법 많은 부를 물려받은 데다가 좋은 대학교까지 합격한 그에게 인생은 너무나도 쉽게 느껴졌다.
그때 그의 목표는 자신의 명의로 된 회사를 차려 부모가 물려준 부를 더 큰 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자가 꿈의 무대로 삼은 곳이 바로 중국이었단다. 세계 최대의 물류 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서 그는 물류업을 익히고자 했고, 두려울 것이 없는 그는 바로 유학길에 올랐단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여자와 한여름 폭죽처럼 짧고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을 했다나.
‘사족이 긴데요.’
━누구나 자신의 사랑 이야기는 특별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지.
하지만 말을 끊기엔, 이 모든 말을 꺼내는 남자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해 보였다. 훌쩍 눈물을 닦는 남자를 바라보며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할 수만 있다면 세 줄 요약이라도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최 사장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국으로 돌아온 최 사장은 자신이 원하던 꿈을 그대로 이루고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사업은 여러 가지 암초를 만나 무너지고 말았고 결국 그는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만 했다.
수십억의 빚을 지고 최 사장이 죽음에 내몰렸을 때, 그의 앞에는 백도산이 나타났다. 그동안 최 사장의 능력을 눈여겨본 백도산은 최 사장에게 손을 내밀었고 최 사장은 기꺼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팔기로 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은월회와의 거래를 트기 시작했을 무렵, 백도산은 최 사장과 함께 중국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최 사장은 자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지금까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자신의 딸.
“제가 아비 노릇을 하지 못하는 사이, 딸은 천재적인 능력으로 은월회의 중요한 자리까지 치고 올라갔더군요.”
“흐음.”
헤어졌던 딸과 아버지가 범죄 조직에서 만나게 됐다라. 그나마 적이 아니라 동맹 관계로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할까.
“물론 아버지라고 말할 자격도 없는 저지만, 가끔씩 중국에 가게 되면 그래도 그 아이를 꼭 보러 가고는 했습니다. 그러다가 알게 된 겁니다. 며칠 전, 그 아이가 납치됐다는 걸.”
“누굽니까? 그 납치를 했다는 사람은?”
“그놈들이 분명합니다. 얼마 전부터 그, 그놈들이 자꾸 자신에게 접근해 왔다고, 그 아이가 말했다고요. 몇 번이나, 조심하라고 했는데도…….”
잔뜩 흥분해 제대로 말을 끝내지도 못하는 최 사장을 대신해 백도산이 말을 마무리 지었다.
“해성회야.”
그 이름에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마침 우리가 미국에서 들었던 그놈들의 이름이 여기에서 나온다고?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이미 그놈들이 누구인지 아나 봐?”
백도산의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도 아는 건 이름뿐이야. 그러니까 그놈들이 이쪽 아저씨의 딸을 납치했다는 거지? 이유는 뭔데, 마약을 만들기 위해서?”
아무리 뛰어나다고는 해도 한 조직의 주요 인물을 납치할 정돈가.
“단순히 천재적인 화학자여서가 아니야. 그녀의 약이 특별하기 때문이지.”
“얼마나 특별하기에?”
“그녀는 자신의 환상을 담은 약을 만들어 낼 수 있어.”
“각성자라는 뜻입니까?”
내 말에 백도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환상을 구현해, 물질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자라. 확실히 일반적인 능력자는 아니었다.
그런 능력자를 겨우 마약이나 만드는 데에 쓰다니.
개발에 편차가 따로 없긴 하지만…….
“그녀의 능력이 탐이 나 납치한 만큼, 죽이거나 해치지는 않았을 거야. 계속해서 거절한다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아직까지는 회유를 할 생각일 테니까.”
확실히, 어렵게 납치를 한 만큼 헛되이 죽이려 들지는 않았을 거다.
“그러니 부탁해, 그 사람을 구해 주지 않겠어?”
백도산의 부탁에 나는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 어차피 중국에 가려던 것도 맞고, 은월회에 들러 마약 상황에 대한 말을 전하려 하기도 했다. 거기에 해성회는 내가 쫓던 바로 그 그룹이었고.
모든 상황이 마치 나에게 이 일을 받아들이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저 아저씨야, 자기 딸이 납치되었으니 저렇게 나에게 쩔쩔맬 만하죠. 하지만 당신은 왜?”
백도산은 저 아저씨의 딸이 어떻게 되든 그다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 여자가 없으면 마약 공급에 차질이 생기니 사업적으로 손해를 볼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불러 이런 부탁까지 할 정도인가. 그것도 은월회 보스의 부탁이 아닌 저런 아저씨의 부탁으로?
내 말에 백도산이 말했다.
“최 사장은, 내 사람이니까. 그리고 난 내 사람을 진심을 다해 지키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노려보는 게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아까도 느꼈지만, 이건 경고다. 내가 그 눈빛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백도산이 서늘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찬명이랑 무슨 소꿉장난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일로 찬명이가 다치거나 한다면…….”
“그럴 일 없을 거야.”
나는 백도산의 말을 끊었다.
“나도 제법 내 사람은 잘 아끼는 편이라서.”
우리 둘 사이에는 또 한 번 스파크가 튀었다.
참, 친구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그리고 애초에 금박사가 나를 먼저 도와준다고 한 건데 왜 저 난리람.
━말은 바로 해야지. 중간에 연을 끊겠다는 사람을 꾄 건 네 놈이잖냐.
‘꼬시다니요. 그냥 제의한 거죠. 이런 기회가 있는데 한 번 참여하실? 이렇게 물어본 거라고요.’
━네 놈의 기억이 대단히 미화돼 있다는 거 하나만은 알겠다.
“후, 어쨌거나 이 부탁은 제발 들어줬으면 좋겠군. 나로서도 할 수 있는 보상은 다 할 테니…….”
“따로 보상은 필요 없어. 그건 은월회 쪽에서 받도록 하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도산이 나와 우습지도 않은 자존심 싸움을 한 것은 모두 잊기로 했다.
어차피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고, 중요한 건 한 여자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거니까.
“제발 구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최 사장은 나를 바라보며 간절히 말했다.
겨우 몇 번 보지도 못했던 딸을, 제 딸이라고 저렇게 아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부모이기 때문일까?
부모라는 게 무엇이기에.
잠시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그대로 묻어 놓았다.
어쨌거나 이 거래는 우리에게도 나쁠 것이 없다.
“그럼 바로 출발하지?”
“……정말이지 무례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겁니까?”
“말했잖아, 사정이 급하다고.”
백도산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돌아가는 내용을 들은 벨츠머츠 멤버들은 내 눈치를 보며 내 뒤에 따라붙었다. 차송진은 자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던지는 에드워드의 팔뚝을 제게로 잡아끌었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 꼴을 보며 나는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그나저나 못 보던 사람이 둘이나 늘었군.”
“참으로 빨리 말하네요.”
내 핀잔에 백도산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내가 준비한 객실의 침대는 셋뿐이야.”
이런 젠장!
어쨌거나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구출 작전에 동원되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희는 구출보다는 납치 쪽인데 말이죠.’
━자랑이다, 그래!
제27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