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321
84 닿지 않은 마음 (1)
내게 제압된 메이는 계속해서 헛소리를 내뱉었다. 나는 몇 번이나 메이와 대화를 나눠 보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내 말에 트리거가 눌린 건지, 뭔지. 정신을 반쯤 놓고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한 메이는 도저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체…….”
나는 메이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준을 그곳에 가둬 둔 것인지, 둘 사이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조금 더 듣고 싶었지만,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 메이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는 건 무리였다.
일단은 이쪽을 확보했다는 데에 포인트를 둬야 할까. 나는 앞으로 허물어지는 메이의 몸을 받았다. 지나친 스트레스 때문인지 메이는 혼절하듯 기절했다.
“이런.”
누가 보면 내가 대단히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것 같지 않은가. 내가 한 건 그냥 핍박에 압박을 곁들인 협박뿐이었는데.
━네가 말하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드냐?
‘하지만 그런 짓까지 저지른 사람이, 겨우 제 말 몇 마디에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을 줄 몰랐단 말입니다.’
이보다는 조금 더 당당하게 나에게 따질 줄 알았달까? 겨우 이 정도에 기절해 버리다니. 생각보다는 담이 약하다고 해야 할지.
‘이상하네. 가면도 썼는데 말이죠.’
━네 인상이 좀 더러운 편이기는 해도 누굴 얼굴로 기절시킬 정돈 아니지 않나?
‘그 정도던데요.’
레이의 위로는 고마웠지만, 현장에서 겪은 반응이니 부정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던진 말인데도 상대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내게 바짝 머리를 조아린 적도 있으니. 진지하게 쌍꺼풀 수술을 생각해 본 적도 있다니까.
━그때 상황이 안 좋았겠지.
‘으음, 저보다 더 인상파인 사람도 있었는데, 저한테만 유난히 다들 난리더란 말입니다.’
나름대로 외모에 신경을 쓰던 때라 얼마나 상처가 되었는지. 뭐, 인제 와서는 다 지나간 얘기다만.
어쨌거나 메이가 이런 식으로 기절할 줄은 몰랐다.
이제 어쩐다.
원래대로라면 메이에게 ‘준’에 대해 묻고, 준을 구출할 계획이었지만 그 계획은 메이의 기절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
그때, 무전기 너머에서 한서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스, 구덩이 쪽에 보낸 언데드들과 연결됐어요.]
흠, ‘상황을 알아본다’는 파트가 누락되긴 했지만…….
일단 구출 작전을 진행토록 해 볼까?
* * *
그리고 그 구출 작전.
나는 준이 갇혀 있는 지하실의 벽을 뚫고 직접 여기까지 왔다. 첫인상은, 글쎄,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아 보인다’ 정도?
구덩이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것치고, 눈앞의 여자는 건강해 보였다. 오히려 호리호리한 체격에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메이보다도 훨씬 단단해 보였다. 같은 얼굴에 비슷한 체형이지만, 훨씬 단단해 보이는 인상이랄까.
그리고 태도도 그렇다.
내가 윽박지르자마자 파랗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다가 기절해 버린 메이와는 모든 게 달랐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 자길 구해 달라며 소리를 치기 마련인데, 눈앞의 여자는 뭐랄까. 오랫동안 이곳에 갇혀 자신의 재능을 착취당한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덤덤해 보인달까.
뭐, 이런 상황에 부닥친 모두가 같은 반응을 보일 필요까지야 없지만, 이런 반응은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당신을 구하기 위해 무려 벽을 뚫고 왔다고요?
하지만 준은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내 사과를 무시한 준은 그대로 파편과 먼지에 파묻힌 재료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 음…….]
━정말로 뻘쭘한 상황이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음, 이런 경우에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보통 이런 구덩이에서 착취당하는 상황에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온다면 ‘날 구해 줘서 고마워!’, ‘후후, 무슨 말을. 그동안 고생 많았어.’, ‘어흐흑, 따흐흑.’ 식으로 대화가 이어지지 않나?
자신을 구하러 온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더라도, 보통 벽을 이렇게 뚫고 오면 왜 여기까지 온 건지 묻지 않겠냐고.
준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나는 무어라 말을 꺼낼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덤덤히 내 앞에서 재료들을 줍는 모습을 보니, 내가 저지른 일이 꽤나 음, 잘못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나는 준을 따라 파편에 파묻힌 재료를 슬쩍슬쩍 꺼냈다. 그렇게 파묻힌 금속들을 꺼내 한곳에 쌓아 놓자, 그제야 준이 입을 열었다.
[저 위에 문도 있는데 그쪽으로 들어오지 그랬어?]
[……어, 그렇구나. 미, 미안하게 됐어. 여러모로.]
준은 내 사과에도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준은 여기저기 파묻힌 금속에 관심을 더 두고 있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절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기, 있잖아.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는 궁금하지 않은 거야?]
[날 여기서 꺼내서 다른 공방에 집어넣을 생각인 거잖아. 아니야?]
[음.]
그렇게 물으면 할 말이 궁색해지는데.
━정곡이군.
‘그러니까요.’
애초에 내가 준을 구하러 온 이유는 준의 재능 때문이 맞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이런 식으로 벽을 뚫고서 달려들진 않았겠지.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곧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이런 타입은 괜히 이리저리 말을 돌리는 것보단 솔직하게 다가가는 게 최선일 것 같았으니.
[맞아, 널 다른 공방, 그러니까 내 공방으로 데리고 가려고 여기에 온 거.]
내 말에 준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슬쩍 말을 던졌다.
[어쩌다 너에 대해 알게 됐거든. 여기에 갇혀 있다는 거 말이야. 넌 여기에서 분명히 ‘나가고 싶다’고 말했잖아. 그래서 난 생각했지. 어쩌면 널 구해 주면, 나를 위해 일하게 할 수 있겠다고.]
내 말에 준은 애매한 반응을 내놓았다.
[흠.]
저 짧은 콧소리로는 준의 마음을 읽어 낼 수 없었다.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터라 표정도 살필 수 없었다.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당장 우리 공방으로 오지 않아도 돼. 다만 너와 연을 이어 놓고 싶었던 거야. 왜냐하면 넌…….]
[대단한 장인이니까?]
[뭐, 그렇지.]
꽤나 덤덤해 보이는 성격인데, 자신을 치켜세우는 데에는 별 저항감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정말로 대단한 장인이긴 하지.
지금 이곳에 굴러다니는 물건만 봐도 그렇다. 정확히 감정을 해 봐야 알겠지만, 메이의 가게에 전시된 것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해 보이는 아티팩트 뿐이었으니.
그러니 꼭 확보해 두고 싶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내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준이 입을 열었다.
[그래, 상관없어.]
[상관이 없다니?]
[어디든 나는 상관없다고. 망치만 들 수 있다면, 그래서 무언가를 계속해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나는 괜찮아. 하지만 말이야. 그 전에 하나 그쪽한테 물어볼 게 있어.]
그렇게 말한 준은 재료 사이에 숨겨져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누가 봐도 ‘잘 만들었다’는 감탄이 나올 만큼 잘 벼려진 검이었다. 음, 새삼 자기가 만든 검이 얼마나 끝내주는지 자랑하는 건 아니겠고. 저 검을 손에 든 이유가 있겠지?
[메이는 어디에 있어?]
검을 들이대며 내게 그렇게 묻는 준에게 나는 양쪽으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다 설명해 줄게!]
* * *
내게 검을 들이댄 준에게 나는 필사적으로 메이를 해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준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메이를 직접 보여 주겠다는 내 말에 겨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나는 준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그 공간을 벗어나 밖을 보는 것일 텐데도 준의 표정에는 그 어떤 설렘도, 환희도, 기쁨도 없었다.
당장 어제도 나와 본 것 같은 얼굴에,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에서 얼마 만에 나오는 거지?]
[2년 8개월.]
[음.]
전혀 감흥이 없을 만하네. 하하, 2년 8개월밖에 안 됐다니. 난 또 한 10년 정도는 갇혀 있었는 줄 알았잖아. 확실히 감흥이 없을 만하……긴 뭐가!
나는 한 달만 안에 갇혀 있다 나와도 세상이 다 아름답게 보였는데. 확실히 저 반응은 이상하다, 이상해. 하지만 우리 그룹에 언제 정상이 있었나. 나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얘기 말고 빨리 메이를 보여 줘.]
쿡쿡, 내 등을 검으로 찌르려는 준의 행동에 나는 또 한 번 손을 들어 올렸다.
[곧 안내해 줄 테니까, 내 등에 구멍을 내려는 행동 좀 그만해 줄래?]
[무섭지도 않으면서.]
준의 말대로 나는 준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야, 지금 당장에라도 제압할 자신이 있었으니. 준도 알고 있을 거다.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이 나를 이길 수는 없을 거라는 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은 검을 들었고 나는 그런 준이 두려운 체를 했다. 일종의 신뢰 표현이다. 나는 너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지금 준의 말로 그 신뢰가 몽땅 부서져 버렸지만 말이다.
[진짜 무섭지 않아도 무서운 척을 해 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거든. 네가 그렇게 말해 버리면 이쪽이 뻘쭘해진다고.]
[서둘러.]
내 말을 무시하는 준의 태도에 나는 예예, 하며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뚫어 놓은 길을 따라 바깥으로 나오자, 대기 중이었던 일행이 보였다. 한서현과 차송진은 나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그 사람은?”
“보다시피 내 뒤쪽에.”
나는 슬쩍 차송진이 볼 수 있게끔 몸을 옆으로 틀었다. 내 뒤에 있는 사람을 본 차송진이 소심하게 손을 올렸다. 안타깝게도 준은 그 인사를 무시한 채로 내게 물었다.
[메이는?]
그 채근에 나는 재빨리 한서현에게 말을 던졌다.
“메이는?”
“그 여자는 왜요?”
“이쪽이 보고 싶으시단다.”
내 말에 한서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오, 직접 복수를 하고 싶다고 했나 봐요? 하긴, 그 긴 시간 동안 갇혀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죠.”
“하, 하지만 둘이 쌍둥이라고 하지 않았어?”
“같은 피를 타고 태어났다고 꼭 사이가 좋으란 법은 없잖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서현이 저런 말을 하니까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는데. 그러는 너는 같은 피가 이어진 형을 죽어도 못 잃겠다며 스켈레톤으로 만들었잖냐…….
아니, 이런 말을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복수든, 뭐든 일단 메이를 봐야겠대.”
“아무리 가둬 뒀다고 해도 그렇지, 지, 직접?”
차송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사이, 한서현이 검은 모래에 둘러싸인 메이를 이쪽으로 보내 주었다. 준은 그런 메이를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준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했다. 표정만 보고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한서현의 말대로 복수를 생각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죽였어?]
[아니, 기절한 거야. 그리고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냥 너에 대해 물으니 악을 쓰다가 스스로 기절해 버렸다고.]
나는 다시 한 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포즈다.
아쉽게도 준의 눈은 내게 향하지 않았다. 준은 검을 든 채로 메이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차송진의 불안한 시선과 한서현의 흥미가 가득한 눈길이 그녀의 움직임을 좇았다.
메이의 앞에 선 준은 거침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차송진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32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