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tem RAW novel - Chapter 163
00163 #8 – 고수(高手) =========================================================================
#8 – 고수(高手)(6)
행운의 편지나 불행의 편지라면 차라리 실없다고 생각하고 말지.
발드 마이저의 편지에는 좀 더 동심이 묻어났다.
당장에 편지의 서문부터가 [10년 뒤의 나에게]라고 적혀있는 걸.
그렇다.
이 녀석, 사춘기의 소녀들이나 할법한 10년 뒤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적었다!!
‘이건 확실히 곤란하네!!’
카심이 조금의 주저도 없이 짐을 떠넘긴 이유를 알 것 같다.
완전 부담스럽잖아.
남의 동심을 들춰봤다는 죄악감의 무게가 느껴진다고.
서문만 읽었을 뿐인데도 느껴지는 쪽팔림에 차마 뒤는 읽을 엄두도 나지를 않는다.
그래도 발드 마이저가 배신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그럼 남은 건 궁중무투회라는 건데.’
궁중 내에서 그만한 이벤트가 있었으면 몰랐을 리가 없는데.
얼마나 은밀하게 일어난 이벤트인 거냐.
지난 메시지 출력을 게을리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놓치고 지나가는 일이 생기다니, 분명 특정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는 트리거가 있는 이벤트였음이 틀림없다.
냄새가 난다.
구린 내가 풀풀 풍기는 범죄의 냄새라고.
즈베늄의 실종에 단서가 있다면 틀림없이 이거라고 본다.
‘켈티고. 궁중무투회가 뭐지?’
(왕가의 친위대에 한하여 개최되는 비공식 대전이오.)
‘그런 게 의미가 있어? 친위대쯤 되면 돈이나 명예는 차고도 넘치게 있을 거 아냐. 게다가 다들 기본적으로 절대자 초입에는 들어섰고.’
(우승자에게는 왕위찬탈의 기회가 주어지지.)
‘뭣!? 그런 걸 왜 니들끼리 정하는 건데!?’
아무렇지도 않게 역모를 꾸미고 있네, 이 녀석들!
뭐 관습적으로 납득 못할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투르비쳬 공국의 왕좌는 공국에서 제일 강한 자가 쟁취하고 있고.
실제로 셀레나가 공왕으로 즉위하게 된 것도 즈베늄을 꺾은 결과, 이러한 명분을 거머쥐며 즈베늄 친위대를 휘하에 거느렸기 때문이다.
친위대 내에서 우승자를 선출해서 1인자가 왕에게 도전한다는 건 투르비쳬 공국에 한해서는 전통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규율이겠지.
“우승자의 특권은 그것뿐인가?”
‘무슨 소리야?’
“모든 우승자가 왕에게 도전할 리도 없지 않은가. 분명 그대가 전한 유령의 진술이 모든 진실을 포함한 것은 아닐 걸세.”
셀레나의 예리한 질문에 켈─티고는 적잖이 감탄했다.
(과연 당대의 왕다운 놀라운 혜안이시군. 우승자가 왕위찬탈의 기회를 포기할 경우, 친위대 내부에 한해서 모든 친위대원들에게 어떠한 명령이라도 내릴 수 있는 절대명령권이 부여되지.)
무려 [절대명령권]이라 불릴만한 권한인가.
이쯤 되면 범인은 사실상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지.
즈베늄의 실종과 이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친위대의 모습.
이 모순을 해명할 수 있는 진실은 궁중무투회의 우승자가 절대명령권으로 즈베늄의 실종을 누구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도 거론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아야 할 용의자는 궁중무투회의 우승자임이 틀림없다.
‘켈티고. 이번 궁중무투회의 우승자는 누구냐.’
(이반 도스토예프스키. 무투계열에서는 견줄 자가 없는 대단한 강자이지.)
‘…러시아?’
(음?)
‘아니, 별 거 아냐. 북방민족이니 이름이 유사해도 이상할 건 없겠지.’
중요한 건 그 이반이라는 녀석의 현 소재지이다.
‘셀레나. 친위대를 소집할 수 있지?’
“문제없다.”
셀레나의 명에 의해 소집된 친위대원은 스무 명 가량.
본래는 이보다는 숫자가 많았지만 지방파견이나 여러 요인으로 인해 참석할 수 없는 이들은 제외되었다.
때마침 이반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현지임무를 명목으로 불참했다고 한다.
‘역시 그거겠지?’
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반의 업무지역은 어디인가.”
아니나 다를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들 한통속까지는 아니어도 이반의 절대명령권으로 함구당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셀레나는 무턱대고 윽박지르는 대신, 조금 더 현명하게 꾀를 부렸다.
“친위대원 간의 업무를 관리하는 자는 누구인가.”
“친위대장과 부대장입니다.”
“친위대장은 얼마 전에 슈바인드브를 임명했었고, 부대장은 이반 도스토예프스키로 기억하고 있지. 친위대의 임무를 본녀가 알 수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괴변이며, 나아가 친위대장인 슈바인드브를 거느린 본녀에게 정보의 검열은 무의미하다.”
“으음… 하오나.”
“본녀는 그대들을 곤란하게 하고자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통상의 업무절차에 따라 응당 이루어져야 할 업무를 요구하는 것이니라.”
친위대원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시선을 옮겼다.
이윽고 전원의 시선이 한 명을 가리켰다.
필경 대장과 부대장의 다음 가는 서열을 지닌 실권자일 것이다.
“지당하신 명령이옵나이다. 명에 따라 이반의 업무지역을 밝히자면, 수도의 대미로 어딘가에 자리한 안전가옥입니다.”
“미로 수도에 그런 해괴한 것이 있단 말인가.”
“공왕님께서 새로이 수도를 복구하면서 지어진 집이, 재앙으로 인해 파손되기 전의 주거지와는 평수가 다름을 빌미로 서민들 간에 제 집에 확장공사를 하거나, 혹은 이웃의 집을 부수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이를 막고자 온갖 조치가 이루어지며 현재 수도의 암흑가는 미로가 되었나이다.”
아니 이 자식들이?
기껏 먹고 살 집을 마련해주니 이런 깽판을 쳤다니.
확 그냥 통일된 규격의 아파트를 지어서 모조리 삭막한 감옥 같은 21세기 주거지의 삶을 살게 해버릴까.
“알겠노라. 이만 물러가도록 하라. 본녀는 음지에서 본국의 안위를 위해 노력하는 그대들의 충의를 높이 사고 있노라. 근시일내로 포상이 내려질 것이니 기대하여도 좋다.”
친위대원들은 잠자코 자신들의 근무지로 복귀하였다.
괜히 임무에 동원해봤자 이쪽이 꺼림칙할 뿐이지.
그놈의 절대명령권 때문에 이반을 보고도 못 본 체 하거나 거짓보고를 올리면 괜스레 우리들만 혼란을 겪는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지.
셀레나의 조치는 실로 적절했다.
“켄이치를 데려왔다.”
“이리도 호들갑을 떠는 걸 보니 즈베늄이 실종됐나보지?”
“두 사람 모두 좋은 시기에 잘 왔노라. 지금부터 수도의 암흑가 어딘가에 자리한 친위대 부대장 이반 도스토예프스키를 찾으러 갈 것이다. 그는 즈베늄을 빼돌린 유력한 용의자이니라.”
“증거는?”
“상황 증거 뿐이지만 본녀는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이 단기간에 여기까지 의심스러운 용의자를 추려냈다.
이보다 수상한 인물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겠지.
켄이치는 셀레나의 판단을 존중하여, 이반이 범인이라는 가정 하에 그를 찾을 방안을 모색해내었다.
“대미로에서 몬스터 게이트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흘려. 동시에 대미로의 거주민들에게 긴급 대피소를 마련해주고. 어중이떠중이들은 제 발로 나올 거고, 그러고도 대미로에서 버티고 있는 녀석들은 범죄자라고 단정 지어도 좋을 테지.”
“과연! 실로 피아를 구분 짓기에 편리한 묘안이로구나. 잔류하는 자는 모조리 보호를 구실로 체포하도록 하고, 만일 병사들의 실력으로 제압할 수 없는 자가 나타나거든 우리가 나선다. 그 중의 한 명이 이반이라고 볼 수 있겠어. 실로 좋은 작전이다!”
“할 거면 바로 시작해야 할 거야. 괜히 얘기가 새면 곤란하니까.”
병사를 동원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접견국인 카이브스탄 제국의 동향도 심상치 않았었고.
준 전시태세나 다름없던 탓에 공국의 정예병들이 즉각 대미로를 사방에서 엄중히 포위하였다.
여기에 먹음직스러운 미끼까지.
대피소와 구휼소의 설립이 이루어지자 대미로에 거주하지 않는 일반 시민들까지 모여들 정도로 호응은 폭발적이었다.
‘…아니, 우리나라 백성들 밥도 못 먹고 다녀? 무료배급소 열었다고 뭐 이리 환장해?’
“몰랐어? 준 전시태세에 돌입하면서 군량 확보한답시고 곡물 좀 사들였거든. 가뜩이나 먹을 거 없는 우리네로서는 살림살이가 쪼들릴 판국이지. 빈곤한 겨울이 될 거야.”
‘먹을 거 딸려서 군비 사들였다며. 배급소 열어도 되는 거야? 그냥 나랏돈만 풀어버린 꼴이잖아.’
“아무렴 어때. 지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할 때인데. 이왕이면 셀레나의 평판도 높아질 만한 정치적인 수를 두는 편이 낫겠지. 덤으로 골치 아픈 대미로의 두더지들도 싹 다 족쳐버리고.”
‘…굉장하네.’
일거양득도 아니고 한 번에 세 개의 이득이라니.
그것도 방금 거론된 것만 포함했을 뿐이지.
보이지 않는 부차적인 이득까지 포함하면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이득을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얻을 수 있다.
과연 켄이치다운 수완이다.
언제나 일에 치여 살기에 한 번에 여러 가지의 일을 하지 않으면 제 성에 차지 않는다는 거다!
“약한 것들이 잘도 이렇게나 잔뜩 모여 있었구나.”
대미로에서 줄줄이 빠져나오는 빈민들을 보며 셀레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쩌다보니 낯선 타지의 왕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단은 그녀의 통치 하에 있는 공국.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힘겹게 숨만 이어가는 처지가 가엾어보여도 어쩔 수 없겠지.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대여. 이번만은 본녀의 억지를 들어줘야겠다.”
‘또 무슨 착한 일을 하려고 그러는 건데?’
“대미로에 정말로 몬스터를 풀어서, 이 병약한 백성들에게 신체를 단련하는 기쁨을 느끼도록 해야겠다.”
‘전혀 착하지 않았어!!’
“안되는가?”
애틋한 표정을 지어도 어림없는 소리이다!
‘인간이라고, 얘들은! 악마와는 다르다, 악마와는!’
“어찌 인간은 이리도 나약하단 말인가.”
‘나한테 물어도 몰라. 아이템인걸!’
“후우.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는 약골들이로구나.”
“…나는 이런 녀석을 주군으로 맞이하고 있었던 건가.”
란도멜의 한탄이 어느 때보다도 힘없이 느껴졌다.
“음? 란도멜이여. 그대는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가.”
“처음부터다! 네놈들, 멋대로 즈베늄이 어쩌고 얘기하더니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본래의 목적이라면. 분명 맛있는 쿠키를 사기 위한 외출이었지.”
“겸사겸사 희망사항을 이야기하지 마라!”
“오늘따라 곧잘 타박을 들으니 서운하구나.”
그렇게 말해도 네가 엉뚱했다는 게 달라지는 건 아니다!
셀레나와의 만담은 둘째 치고, 병사들의 투입 역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애초에 걸림돌이라고 여길 만한 적은 별로 없단 말이지.
투르비쳬 공국이 불량배가 살기 좋은 나라도 아니고.
그만큼 남은 불한당들의 평균스펙이 높기는 한데, 그런 녀석들에게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얼마 전에 털보 녀석이 길을 잃은 김에 범죄조직의 소굴을 박살낸 일도 있었으니까.
“비켜라! 여기는 레드슬라임의 소굴이다!”
“북방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후덥지근한 조직명이군.”
“히, 히익! 불곰이다! 불곰이 떴다!!”
그나마 남아있는 잔당들도 털보와 눈을 마주치기가 무섭게 달아났다.
이거 좀 싱거울 정도인데.
원래 이럴 때에는 뭔가 팟팟, 하고 심장이 뜨거워질만한 이벤트가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닌가.
“뭔가 미지근하구나.”
주인과 도구는 일심동체라더니, 셀레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나 보다.
나직이 푸념하는 모양새에 털보가 황당해하였다.
“상식적으로 범죄자들이라고 이런 곳에 머무르고 싶겠는가.”
셀레나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발언은 간과할 수 없구나. 본녀의 공국이 살기 힘든 장소란 말인가.”
“어.”
“…….”
나까지 덩달아 상처 입을 정도의 즉답이었다.
“잘 생각해봐라. 대뜸 밑에서 초대형 블리자드가 올라와서 도시를 반파하지를 않나. 난데없이 불의 교단에서 불타는 베이컨의 비를 쏟아내며 거주민 모두를 질식사시키려 들지를 않나. 연달아 전쟁을 빌미로 나라에서 식량을 사들이지를 않나. 이런 험악한 도시에서 살고 싶은 놈들은 없을 거다.”
“그렇게 듣고 보니 꼭 공국이 마계처럼 들리지 않는가.”
“다를 게 있나?”
실제로 마계를 가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고작 이 정도로 마계에 비견되는 건 엄살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뭐, 그렇다고 이게 살기 좋은 건 아니지만.
여하튼 범죄자들도 질색하고 빠져도 무리는 아니라는 거다.
“강력한 적을 발견했습니다! 아직까지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일반 병사들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실력자가 날뛰고 있습니다!”
전령의 보고를 들은 털보가 시큰둥하니 등짐을 짊어졌다.
“간만에 몸 좀 풀어볼 시간이군.”
의욕적으로 나서는 셀레나, 켄이치, 털보.
세 실력자와 내 사기는 높았지만 한 명만은 달랐다.
노스트라 대신 줄곧 지팡이에 매달려있는 란도멜은, 신체개선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표정으로 바위 위에 드러누운 채 망연히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 작품 후기 ============================
으음.
템포가 조금 더딘 것 같기도…
뭔가 약기운을 끌어올릴 시각자료를 구해봐야겠군요.
예를 들면 만화 [호문클루스]라거나.
정말 재밌게 본 기억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