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23
222화. 용패갈이2 (7)
후욱- 후욱-.
무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게 도대체 며칠째일까…….’
머리가 몽롱하니, 사고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저 이러고 있는 시간이 꽤 오래되었다는 것과 너무도 배가 고프다는 것.
그리고 잠들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만이 머릿속에 가득할 뿐.
하지만 생각을 멈추면 정말로 그대로 잠들 것 같아, 무치는 억지로 머리를 굴려 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흐릿한 기억 너머로 한 달 전쯤의 일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요람으로 오는 흑선 안에서 이뤄진 간단한 통성명.
그와 함께 자신에게 쏟아진 다양한 시선들.
누군가는 부러움을.
누군가는 두려움을.
그리고 누군가는 적개심 어린 눈빛을 보내왔다.
아니, 사실 대다수가 경계심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자신은 딱히 반목할 생각이 없었으나 이미 그들은 자신을 적수 내지는 최악의 장애물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만약 옛날의 나였다면, 유리 형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분명 그런 시선에 주눅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저들도 그저… 뒤처지고 싶지 않은 거뿐이야.’
자신이 그러했듯.
저들도 경쟁자를 이기고 싶어할 뿐일 거다.
유리와 만나고 호승심을 배운 무치는 이제는 경쟁이란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저들의 적개심을 이해했으며 무치 역시 그들과 싸우려 했다.
다만 그가 간과한 사실.
그건 바로 세계에서 거르고 거른 아이들의 투쟁심을 너무 얕보았다는 것과.
모든 경쟁이 꼭 정정당당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었다.
[미안하지만, 넌 여기서 탈락해 줘야겠어.]정체를 알 수 없는 구멍 뚫린 기괴한 은화가 지급되고 이틀 뒤.
스무 명에 가까운 이들이 무치를 덮쳐들었다.
그들은 집요했고, 지독했다.
[우리 개개인의 실력은 너보다 한참을 밑돌겠지만… 결국 우리는 널 꺾을 거야.]스물에 가까운 인원은 열 명 내외로 번갈아 교대하며 무치를 덮쳐들었다.
그로 인해 무치는 밤낮없이 공세에 시달려야만 했다.
[과연 넌…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렇게 20일 이상.
적들도 힘들고 피곤해 보였지만, 그래도 그들은 최소 쉴 수 있었기에 상태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무치는 아니었다.
그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며 오랜 시간 시달렸기에 하루하루 초췌하게 변해 갔다.
그리고 그런 무치를 괴롭히는 이들의 중심에는 레몬빛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가 있었다.
[…대단해. 설마 이렇게 오래 버틸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대체 무슨 술수를 쓴 건지, 열댓 명의 예비 기수들을 개인 사병처럼 부리는 소녀.
그녀는 외로운 싸움을 이토록 오랫동안 버텨 낸 무치에게 찬사의 미소를 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일이면 이 시험은 끝나. 하루만 더 버티면 되는 거야. 나… 응원할게. 네가 오늘도 버텨 낼 수 있기를.]악의(惡意)인지.
순수(純粹)인지.
그도 아니면 호기심인지.
다양한 느낌의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지시에 따라 십수 명의 예비 기수들이 총력을 다해 덤벼들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났을까.
[조금만 더 힘내! 우리 꼭 같이 진짜 기수가 되어 보자.]어디서인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좇아 무치는 창을 휘둘렀다.
그간의 고된 훈련이 헛된 것이 아닌지,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에도 무치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세에도 무사히 버텨 내었다.
하지만 그는 직감했다.
이제 자신이 버틸 힘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그 예감대로 어느 순간 힘이 풀린 무치가 그대로 무릎 꿇고 말았다.
풀썩-.
무치가 한 자루 창에 의지해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때였다.
“끝인 거니?”
레몬 향이 묻어날 듯싶은 미소가 고생했다는 듯 무치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쉽네. 조금만 더 버텼다면… 되었을 텐데.”
귓가로 파고드는 목소리는 마치 자장가처럼 고막에 울렸다.
한쪽 무릎을 꿇은 무치가 자꾸만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와 함께 레몬빛 소녀의 청록색 눈동자와 마주했고.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봐. 그래도 넌… 제법 인상적인 남자였어.”
그녀의 손끝이 무치의 볼을 살포시 쓰다듬었다.
“내 이름은 리사야, 리사 베르포트. 우리 기회가 된다면… 또 보자.”
리사가 지은 순백의 아름다운 미소가 무치의 흐릿해진 시야에 가득 담겼다.
그건 어딘가 모르게… 자신이 알고 있는 누군가와 닮은 미소였다.
그것을 떠올린 순간 들려온 또렷한 목소리.
[야, 코찔찔이.]타박하는 듯, 혹은 비웃는 듯한 환청에 점점 흐릿해지던 무치의 시야가 조금은 맑게 개었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어!’
약속했다.
꼭 요람에 들어가기로.
그리고 그와 또다시 싸워 보기로.
그런데 고작 이런 곳에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끄으윽!”
무치는 이를 악다물고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모습에 리사가 놀란 눈을 하고 폴짝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그녀의 뒤에 포진해 있던 다른 소년·소녀들이 금방이라도 무치를 향해 달려들려 했다.
그때 리사가 손을 들어 그들을 멈춰 세웠으니.
슥-.
바들바들 떨며 일어서려는 무치를 보며 소녀의 눈이 황홀로 물들었다.
“예쁘다…….”
그리고 그 황홀한 눈동자 속에 잔혹함이 퍼져 나갔다.
“조금 더 보고 싶어졌어…….”
사릉-.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서지 않았던 리사가 두 자루의 짧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칼날 길이는 15㎝ 남짓.
마치 살짝 휜 맹수의 이빨을 본뜬 듯한 모양새.
두 자루 단검을 역수로 쥔 리사가 무치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그 얼굴… 조금만 더 보여 주지 않을래?”
그러면서 그녀는 무치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저벅-.
의식은 흐릿했지만, 무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껏 자신이 상대한 17명의 소년·소녀보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저 작고 여리여리한 소녀가 수십 배는 더 위험하다는 것을.
하지만 무치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요람에 들어가서 유리를 만나야만 했다.
척-.
하여 그가 앞으로 창을 내밀며 소리쳤다.
“난… 반드시 요람의 기수가 될 거다!”
이에 소녀의 눈에 기쁨이 서렸다.
“응! 진심으로 응원할게!”
하지만 그런 말과는 달리 소녀의 전신에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살기가 풀려 나왔다.
고오오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정말로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린 무치의 기세와.
스오오오-.
레몬 머리 소녀의 노란 살기가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금방이라도 혈투가 벌어지기 직전의 순간.
“안 돼! 멈춰!”
“머리털 난 뽀삐 괴롭히지 마라, 이것들아!”
갑자기 나타난 1남 1녀가 무치를 포위한 포위망 뒤쪽에서 난입해 들었다.
쾅-!
콰득-!
예상치 못한 기습.
하지만 그보다도 더 경악스러운 것은 그들의 실력이었다.
“뭐, 뭐야?!”
“크흑!”
“윽! 당신들 누구야!”
여자는 장검을, 남자는 건틀렛을 휘둘러 무치를 포위한 이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려 나갔다.
콰드득-.
눈 깜짝한 순간에 17명 중 넷이 쓰러졌다.
그 모습에 무치는 두 남녀의 실력이 결코 자신의 밑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물론 이를 알아차린 건 리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맞부딪히지 말고 흩어져!”
소녀의 명령에 뿔뿔이 흩어지는 소년·소녀들.
하지만 이를 그냥 놓칠 넬리와 클라리스가 아니었다.
“가긴 어딜 도망가! 니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데!”
“이 버러지들! 눈깔 돌아간 유리 새끼한테 13박 14일을 처맞아야 정신 차릴 쓰레기들! 니들이 감히 우리에게 위협을 가해?”
대체 뭐 때문에 잔뜩 화가 난 것인지,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미쳐 날뛰는 두 남녀.
이에 지금껏 무치를 괴롭혔던 리사와 다른 소년·소녀들은 다급히 도망 다니기 바빴다.
반면 무치는…….
‘유리……?’
빨간 견장을 찬 남자가 언급한 익숙한 이름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고.
털썩-.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 *
유리는 다수의 흑검병에 둘러싸여 이동했다.
그건 분명 유리가 도망칠 것을 대비해 흑검병들이 그를 포위한 거였으나.
“에헴!”
뒷짐을 지고 앞장서서 걷는 유리의 걸음걸이가 어찌나 위풍당당하던지 포위가 아닌 호위를 받는 듯싶었다.
심지어 그의 왼편 조금 뒤쪽에서 흡사 비서처럼 따라오는 이는 무려 흑검병단의 부단장이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사치스러운 포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유리가 슬쩍 뒤돌아 물었다.
“이쪽 맞죠?”
“…지금까지 묻지도 않고 잘만 길을 찾아가던 놈이 갑자기 그건 왜 묻냐?”
“부단장님 막사 위치가 바뀌었는데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시험한답시고 말 안 해 주고 있는 거면, 괜히 시간 낭비 말고 그냥 말해요.”
“…이건 뻔뻔한 건지, 겁이 없는 건지 도통 모르겠군.”
“둘 다입니다만? 그래서 막사 위치 바뀌었어요, 안 바뀌었어요?”
“안 바뀌었다. 그대로다.”
“그래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유리는 과거의 기억 속, 자신이 털었던 부단장의 막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어느 한 막사에 도착한 유리.
“여기죠?”
“그래.”
그는 오랜만에 찾아온 장소의 주변을 세심하게 둘러보다가 늘어진 천막을 헤치며 그 안으로 들어섰다.
사륵-.
곧 실내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너른 공간.
좁은 침상과 대충 구겨 던져 놓은 침구류.
널찍한 책상과 여기저기 수북하게 쌓인 서류.
그리고 갖가지 생필품들까지.
잠시 실내를 슥 훑어본 유리는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을 따라 들어온 듀란을 향해 몸을 틀었다.
“…내가 괜히 시간 낭비 하지 말자고 했죠?”
“뭐가 말이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듀란의 반응에 유리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부단장님 막사 아니잖아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시치미 떼지 마요. 누가 봐도 부단장님 막사가 아니구먼.”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냄새.”
“고작 그거로?”
“여자와 남자, 그리고 아이부터 노인까지. 천차만별로 체취가 다른데… 여긴 아무리 맡아 보려 해도 홀애비 쉰내는 안 나고 다른 냄새만 납니다만?”
“호오? 그게 무슨 냄새?”
“여자. 그것도 30대 후반, 혹은 40대 초반의 여성이 거주하는 공간이네요.”
“허, 그거참 개새끼 못지않은 후각이군.”
피식 웃은 듀란은 가볍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다. 물러들 가라. 이 녀석은 아니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천막 밖에 숨죽이고 포위하던 이들의 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듀란은 곧이어 유리에게도 손을 내저었다.
“너도 가 봐라. 고생했다.”
“예?”
유리가 눈을 끔뻑거렸다.
“저… 가라고요?”
“그럼 계속 남아 있을 생각이었냐?”
“이대로 풀어 준다는 거… 맞죠?”
“그런데?”
“…왜요?”
“너 범인이었냐?”
“아닌데요?
“그럼 풀어 준다니까 왜 그딴 반응이 나와?”
“아니, 솔직히 너무 뜬금없잖아요! 풀어 달라고 할 때는 그렇게 안 풀어 주더니만!”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고.”
“그때는 범인 같았는데 지금은 아닌 거 같다?”
“제대로 알아들었군.”
“에이 씨!”
유리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진짜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던 유리는 순간 이 모든 상황에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풀어 줄 거였으면서… 어째서 그렇게 붙잡아 두려 했던 걸까?’
그리고 진범을 잡겠다는 자신의 제안에 왜 흔쾌히 수락했을까?
왜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을까?
그러고는 왜 또 갑자기 자신을 풀어 준다는 거지?
유리는 그 모든 의문이 가리키는 바를 대략 눈치챌 수 있었다.
‘이건 날 시험한 거네. 그리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 시험에 통과한 덕분에 나에 대한 의심이 풀렸다는 뜻이고.’
그래도 이렇게 단번에 풀어 준다고?
저렇게 티끌만 한 미련 하나 없이?
순식간에 많은 생각을 분석한 끝에 유리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그가 살짝 놀란 눈으로 물었다.
“설마… 이미 진범이 잡힌 상태인 겁니까?”
어느 정도 확신에 찬 유리의 질문에 듀란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눈치 하나는 빠르군.”
그의 검증이 끝나자 유리는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옘병. 그냥 범인이 아니라 공범을 찾으려던 거였군.”
* * *
클라리스와 넬리의 기습으로 순식간에 7명이 쓰러지자 무치를 괴롭히던 이들은 대응을 포기하고 그대로 도망쳤다.
원래였다면 그걸 두고 보지 않고 당장에 뒤쫓았겠지만, 클라리스와 넬리는 그러지 못했다.
한 가지 문제에 당면했기 때문이었다.
“음…….”
“어…….”
두 사람은 바닥에 널브러진 무치를 당혹스럽게 바라보았다.
“…이거 어쩌지?”
“…그러게?”
아무리 볼을 두드려 보아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머리털 난 뽀삐.
문제는 이 녀석을 이렇게 버려두고 갔다가는 또 신상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한참을 궁리 끝에 두 사람은 결론을 내렸다.
이 골칫거리는 이대로 방치해서 괜히 마음 졸이지 말고, 원하는 사람에게 가져다주기로 말이다.
“괜히 이대로 두고 갔다가 마음 졸이는 것보다는… 얼른 폭탄을 빨리 치워 버리고 용패갈이에 집중하는 게 훨씬 나아!”
“그래, 그러자!”
의견이 일치된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문제는 기절한 이의 몸뚱이가 ‘머리털 난 뽀삐’라는 별칭답게 거대하다는 점이었다.
들어서 옮기기 버거울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 문제는 클라리스의 기지로 쉽게 해결되었다.
즈즉- 구그극-.
숲으로 뛰어 들어가 넝쿨을 한 가득 가져온 클라리스는 무치의 손목과 발목, 종아리를 튼튼하게 묶어 버렸다.
그러고 나서 그 사이로 무치의 도끼 창을 끼워 넣었으니.
“자, 들자.”
“응.”
클라리스가 앞에서, 넬리가 뒤에서 도끼 창을 어깨에 짊어지자 무치가 창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
흡사 나무에 걸린 통돼지 구이처럼.
“읏차!”
“윽, 무거워.”
두 사람은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머리털 난 뽀삐’라는 시한폭탄을 시작의 숲 밖으로 내던지기 위해.
그렇게 50기 전체를 위기에서 구해 낸 위대한 영웅 둘이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