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31
230화. 두 번째 백보 의식 (4)
쿵-!
다시금 내디딘 한 발.
‘서른… 셋!’
사방에서 밀려드는 압력에 숨이 턱턱 막혔다.
호흡이 부족해 눈앞이 아찔해진 순간, 혀를 깨물어 정신을 일깨운 유리.
꿀꺽-.
입 안에 고인 피를 삼킨 그는 흐린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피가 잘 돌지 않는 것인지 사고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니 시간 감각인들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겠는가.
다만, 제법 꽤 시간이 흘렀다는 것만 인지하고 있을 뿐.
스읍-!
공기를 크게 들이쉰 유리는 눈에 힘을 줬다.
‘이거… 반성해야겠네.’
조금 자만했었다.
지난 1년간 성장해 온 자신이라면 못해도 50보는 걷지 않을까 하는…….
내심 이번 백보의식을 가벼운 마음으로 보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유리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한 걸음 이전과 한 걸음 이후… 그 차이가 이토록 심하다니.’
이제 고작 33번째인데.
백 보의 절반도 가지 않았는데 이 정도이다.
그럼 50보 이상, 나아가 검주의 지척은 대체 어떤 세상이란 말인가.
으득-.
유리는 이를 악물고 반사적으로 다리를 내밀었다.
그렇게 서른네 번째 걸음을 내디디려 했으나.
지직-.
발바닥이 땅에 달라붙기라도 한 듯 쉽사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엄청난 저항에 유리는 마나를 맹렬하게 끌어올렸다.
‘큭!’
어느새 절반 넘게 줄어 버린 마나 핵.
유리는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눈을 빛냈다.
‘괜찮아. 아직… 여유 있다.’
비록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백보 의식의 수준이 높았지만, 유리는 두렵지 않았다.
믿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쌓아 온 것들이라면…….’
차곡차곡 쌓아 온 그 시간이라면 충분히 더 나아갈 수 있으리라고.
그 믿음대로 유리의 다리가 들어 올려졌다.
그렇게 내딛는 한 걸음.
입도 초창기 테레시아와의 만남과 그녀와 행한 수없이 많은 대련의 나날.
그리고 테레시아에게 배운 끝없이 노력하는 집념.
유리가 요람에서 처음으로 쌓은 기초의 시간이 서른네 번째 걸음을 내디디게 했고.
쿵-!
요람에 들어와 배운 강·연·화·마·성의 이론.
가짜 취성을 펼치기 위해 연구한 시간과 그레타 위건을 꺾으려는 투지의 시간이 서른다섯 번째 걸음을 내디디게 했으며.
쿵-!
동기들과 경쟁하는 월말 평가.
끊임없이 도전한 기관 돌파 퀘스트.
테레시아, 아린, 뽀삐, 군터와의 무한 대련이 서른여섯 번째 걸음을 만들어 냈다.
쿵-!
또한, 목숨 걸고 마왕을 이겨 낸 순간.
세경의 야금술을 통해 얻은 돈오의 시간이 서른일곱 번째 걸음으로 이어질 수 있게 했다.
쿵-!
그리고 서열전을 통해 부족한 기본기를 채운 시간이 서른여덟 번째 걸음을.
쿵-!
요한의 도움으로 되살린 마나 핵과 아득바득 마나를 채워 온 시간이 서른아홉 번째 걸음으로.
쿵-!
공인 6단의 경지를 안정시키고, 내실을 다져온 시간이 마흔 번째로 이어졌다.
쿵-!
그렇게 유리가 쌓아 온 모든 순간순간이 그가 마흔 번의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했다.
“후욱- 후욱-.”
유리는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었다.
40보(步).
여기까지 도달하며 그는 자신이 쌓아 올린 거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전신은 부서질 듯 아프고, 마나 핵의 마나는 10%가 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유리는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비교적 최근에 쌓아 올린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아직 더 갈 수 있다!’
1~3년 차의 연합 퀘스트.
나아가 무룡대전까지.
권터 라이더란 존재와 맞부딪힌 시간들.
그 순간이 자신을 이다음으로 나아가게 만들리라.
‘이 백보 의식은 나의 싸움… 그렇기에 내가 거쳐 온 1년의 시간, 내가 쌓아 온 역량만으로 도달하겠다! 거기서 잘 보라고… 영감탱이!’
유리가 높디높은 상공을 의식하며 다짐한 순간.
지이잉-!
그의 전신에서 황금빛이 터져 나왔다.
이후 은은하게 흐르는 빛이 유리의 육신을 따라 퍼져 나가며, 얇은 황금색 선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으니.
우우우웅-!
유리의 육신에 활력이 차올랐고, 머리는 맑아지며 시야가 훤히 트였다.
그로 인해 드높은 고양감에 사로잡힌 유리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이거 기분… 끝내준다!’
그는 활짝 웃으며.
쿵-!
마흔한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 * *
유리가 마흔한 번째 걸음을 내디디는 모습을 본 요한은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말았다.
‘저, 저건… 설마?!’
유리의 전신에 좍좍 그어진 기하학적인 금빛 선.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것과는 형태의 괴리감이 있었으나, 그 기질만은 너무도 비슷했다.
아니, 똑같았다.
‘그럴… 리가?!’
상상도 못 한 것이 튀어나오자 요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유리의 신체적 변화에 놀란 건 비단 요한만이 아니었다.
“……?!”
날듯이 뛰어 순식간에 관객석의 앞줄로 튀어나온 권터.
몸만 앞으로 튀어나온 게 아니라 그의 눈도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단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커다랗게 치떠진 눈.
그 속에 자리한 검은 눈동자가 태풍이라도 맞은 듯 급격히 떨리고 있었다.
“말도… 마, 말도 안 된다!”
그는 일단 눈앞의 현실을 부정해 보았다.
하지만 권터의 이성은 끊임없이 그 ‘부정’을 다시 부정하고 있었다.
그게 맞다고.
지금 네가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라고.
‘그럴 리가…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유리의 전신으로 퍼져 나간 황금빛의 선들.
그건 자신의… 아니, 라이더 가의 절기 중 하나와 너무도 기질이 유사했다.
바로 신체 능력을 인외의 수준으로 증가시키는 기술.
“…흑혈?!”
‘검은 피’라는 명칭을 부여받은 절기와 말이다.
* * *
권터 라이더와 부딪혀 온 시간 덕분에 훔칠 수 있게 된 절기, 흑혈(黑血).
이를 바탕으로 삽시간에 육체의 활력은 물론이요, 소모된 정신력까지 되찾은 유리는 힘차게 걷고 또 걸었다.
마흔둘 -쿵!
마흔셋 -쿵!
마흔넷 -쿵!
정오 무렵 시작되었던 백보 의식.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노을이 지고 있었지만, 유리는 여전히 걷는 중이었다.
느리지만 착실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검주를 향해 나아갔다.
쿵-!
그렇게 마흔여덟, 마흔아홉 번째 걸음을 넘어 쉰 번째 걸음을 내디딜 찰나.
우웅-!
유리의 전신에 생겨난 황금빛 선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그건 누가 봐도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스스스-.
마나 핵에 자리한 모든 마나가 소진되며 유리식-흑혈 역시 그 빛을 잃고 사라졌다.
하지만 유리식-흑혈은 마지막까지 그 역할을 다했다.
쿵-!
황금색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유리가 50번째 걸음을 내딛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와 함께 엄습한 끔찍한 무력감.
‘크윽!’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피로감이 몰아쳤고.
전신을 거대한 사슬로 옭아맨 듯한 거대한 중압감이 유리를 짓눌렀다.
거기에 몇 시간 동안이나 유지된 검주의 강렬한 기세는 성냥불 같은 유리의 의식을 꺼뜨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겨우… 절반이다!’
오십 보.
누구에게는 백보의 절반‘씩’이나일지 모르겠지만, 유리에게는 ‘겨우 절반’에 불과했다.
‘이대로는… 이대로는 못 쓰러진다!’
조금이라도 더 검주에게.
그리고 요한에게 다가가리라.
“으아아아악!”
괴성을 내지른 유리의 눈과 코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내장에서 치밀어 오른 피를 토해 내며 유리는 처절하게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절반, 그 이상을 향해.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 싶을 정도로.
유리의 모습은 너무도 처절했다.
하지만 그 처절함을 말미암아.
쿵-.
유리의 오른발이 지면에 닿았다.
그리고 뒤따라 당겨지는 왼발.
쿵-!
마치 여기까지라는 듯 유리의 두 다리가 굳건히 대지를 디뎠다.
정확히 51번째 구간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동시에 유리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툭- 툭-.
핏물이 유리의 얼굴과 턱을 타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
스륵-.
검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느새 그는 유리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사방을 짓누르던 압력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왔다.’
붉게 물든 시야 속에 ‘그’가 서 있었다.
저 멀리 앉아 있던 이 시대의 절대자가.
그를 본 유리는 웃었다.
‘흐흐흐!’
드디어 백보 의식이 끝났다는 사실과.
또다시 검주를 자신의 앞으로 오게 했다는 사실이 유리에게 참을 수 없는 큰 기쁨을 주었기 때문이다.
유리와 눈을 마주친 검주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쓰러져 있지 않았군.”
1년 전, 지금과 같은 구도에서 유리는 검주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그런 검주의 이야기에 유리는 씨익 웃어 보였다.
“지금 넘어지면 못 일어날 거 같아서.”
1년 전에는 쓰러져서 다시 일어나려 안간힘을 썼고.
1년 후인, 오늘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유리는 이를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덤덤하게 웃으며 검주를 바라보았다.
“절반… 넘겼습니다.”
딱 절반이 아닌, 그 너머의 세계에 자신이 도달했다.
앞으로 남은 건 49보의 간격.
이를 줄이는 건 지금보다 더 지독한 과정이 되리라.
하지만 유리는 두렵지 않았다.
그가 뜨거운 눈으로 검주에게 선언했다.
“다음에는… 도달할 겁니다. 당신에게.”
고작 요람의 1년 차인 주제에 검주에게 도달하리라 선포하는 당돌함.
아니, 이건 당돌함을 넘어 숫제 겁대가리가 없는 수준이었다.
하룻강아지가 드래곤을 보고 짖어 대는 꼴이랄까?
하지만 그런 하룻강아지의 지껄임에…….
“때가 되었다 여기면, 언제든지 도전하라. 내 기꺼이 기다릴 터이니. 너에게는… 그만한 자격이 있다.”
늙은 드래곤은 더 짖으라며 판을 깔아 주었다.
그리고 그 판 위로 겁도 없이 올라선 하룻강아지는 드래곤을 보며 더 열심히 짖어 댔다.
“약속한 겁니다. 언제든 도전하면 받아 주겠다고?”
검주가 말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본 유리는…….
“흐흐흐.”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유리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완전히 허물어졌다.
뒤로 넘어가는 유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검주는 이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
잠시 말없이 정지한 구름을 바라보던 검주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백보 의식은 끝이 났다.
그리고 적막에 휩싸였던 원형경기장.
하지만 어느 순간.
“와아!”
누군가 내뱉은 짧은 환호성이 이내 들불처럼 번져 나갔고.
이는 곧 검주에게 도전자의 자격을 인정받은 어린 소년에게 바치는 경외의 함성이 되어…….
우와아아아아-!
원형경기장이 떠나가라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 *
조금 전 검주와 시선이 마주쳤던 요한.
그는 검주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와아아아아-!
자신이 있는 높은 상공까지 울리는 환호성에 요한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가 바라보는 건 원형경기장의 중앙에 대(大)자로 뻗은 채 기절한 함성의 주인공, 유리였다.
‘…저 녀석.’
기절한 유리를 내려다보는 요한의 눈빛은 너무도 복잡했다.
과거에는 고작 열다섯 걸음을 겨우 걸었던 녀석이 오늘은 무려 51번의 걸음을 내디뎠다.
‘…터무니없는 놈.’
유리가 괴물 같은 재능을 지닌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아직 자신과는 큰 차이가 있겠거니 안도하고 있던 요한.
하지만 아니었다.
‘안일했다.’
오늘 유리의 백보 의식을 보고 요한의 그러한 생각이 뒤바뀌었다.
이번 백보 의식에서 일부러 사용하지 않은 듯 보이는 마류.
대신에 그가 선보인 흑혈을 모방한 괴상한 절기.
거기다 한계를 넘어섰음에도 아득바득 일어서는 지독한 집념까지.
유리는 자신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더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성장세에 이렇게 놀란 것이 한두 번은 아니었다.
하지만 요한을 두렵게 한 점은 이제 이 정도가 끝이겠거니, 여기까지겠거니 싶을 때마다 유리가 한계점을 갱신하고 있다는 거였다.
‘녀석은 나날이 성장… 아니, 진화하고 있다.’
과연 1년 뒤, 저 녀석은 어디쯤 서 있을 것인가.
그것을 이제 요한도 장담할 수 없었다.
“허허…….”
낮게 웃음을 흘리는 요한.
기절한 유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복잡했던 심정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안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어.’
이대로 방심하고 있다가는 시간에 잡아먹히기 이전에 유리 홀랜드란 괴물에게 잡아먹힐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검주마저 유리를 자신의 도전자라 언급하지 않았는가.
저 어리디어린 소년에게 자격이 있다며 말이다.
이에 요한의 눈에 자리한 불꽃이 더욱 크게 활활 타올랐으니.
‘분발해야겠구나.’
그는 유리를 자신이 가르쳐야 할 어린 애송이가 아닌…….
‘저놈에게 따라잡히지 않으려면.’
경쟁자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Season.01 – End』
#Season.02 예고편
“유리, 집합하래!”
반복되는 평온한 일상.
하지만 그 속에 스며들기 시작한 어그러짐.
그로 인해…….
“잠깐만 기다려 봐, 나 이것 좀 빼고 시작하자.”
봉인되었던 괴물이 깨어났다.